친절한 너구리

한정선의 금수회의록禽獸會議錄 한정선l승인2012.11.28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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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짐승들한테 아주 친절한 너구리가 있었다.
너구리는 특히 산토끼들한테 아주 싹싹하고 후했다.
너구리는 우연히 산토끼들의 대화를 엿듣다 그들이 먹는 풀뿌리가 병을 낫게 하는 성분이 들었다는 말에 귀가 번쩍 뜨였다.

너구리는 당장 당근을 뽑아들고 산토끼네 굴을 찾아갔다.
그 때 마침, 자식이 많은 산토끼가 비좁아진 굴속의 큰 돌덩이들을 힘겹게 끌어내고 있었다.
그것을 본 너구리가 돌덩이를 번쩍 들어내 주고는 당근을 내밀었다.
“식구가 많아 살림 꾸리기 벅차겠군. 애들 주게나.”
너구리는 구석에 웅크린 채 귀만 쫑긋 세우고 있는 산토끼새끼들에게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 이후 산토끼들이 약초 보퉁이를 들고 너구리를 자주 찾았다.
“당근이랑 좀 바꿔주게나. 어린 것들이 하도 졸라서 그러네.”
“친구사이에 당연히 나눠먹어야지. 허허허”
언제나 너구리는 속 너그러운 너털웃음을 웃으며 당근 두어 개와 바꿔주었다.

너구리의 환약이 속병에 잘 듣는다는 소문이 퍼졌다.
너구리의 집은 먹거리와 환약을 바꿔가려는 병난 산짐승들로 벅적거렸다.
너구리의 비밀 굴에는 먹거리가 쌓이고 있었다. 재미가 붙은 너구리는 비밀 굴을 몇 개 더 팠다.

너구리가 약초를 캐러 산 속을 헤집고 다녔다.
더 많은 양의 환약을 만들기에는 약초가 턱없이 부족해진 때문이었다.
그러나 약초는 쉽사리 눈에 띄지 않고 발바닥만 부르텄다.

그때부터 너구리는 원래의 약재 풀뿌리와 비슷한 향이 나는 풀잎이나 열매를 따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약초 향기가 나는 산토끼 똥도 담아와 갈아 섞었다.

이따금, 환약을 먹은 뒤 경련을 일으키다 죽은 아기 산토끼들의 부모가 찾아와 울며 약재를 보자고 뻗댈 때가 있었다.
“몸에 보약이 되는 풀뿌리와 산머루로만 만든 환약이에요. 환약을 먹인 후 한뎃잠을 재우지 않았어야 합니다.”
너구리는 한번 가보았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며 산토끼의 손을 부여잡고 함께 슬퍼했다.

어느 날, 너구리가 새 약재를 구하기 위해 집을 비웠다.
그 사이 너구리의 어린 새끼들이 출입을 금지시킨 지하의 굴로 쪼르르 달려 내려갔다.
“내 말 맞지. 아빤 맨날 이런 맛있는 걸 혼자 먹은 거야.”

한 새끼가 달큼한 환약을 볼이 미어터지게 입에 몰아넣었다.
다른 새끼들도 덩달아 입에 털어 넣고 삼켰다.


한정선 작가

한정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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