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부용 시신'이 된 버스기사…눈감지 못한 진실

공권력의 잔혹한 피해자 문영수, 국가가 나서서 사과해야 고상만l승인2013.02.04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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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대·관할구청, '시신 처리에 관한 각종 규정' 위반 총체적 위법 사실 확인

지금으로부터 30여 년 전인 1982년, 한 남자가 이유 없이 실종되었습니다. 이름은 문영수. 1953년생으로 당시 만 29살이었던 그는 직전까지 평범한 버스 운전기사로 서울에서 일했습니다.

그랬던 문영수가 1982년 갑자기 광주를 가게 된 이유는 새로운 일자리를 찾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마지막이었습니다. 문영수의 가족들이 그의 행방을 애타게 찾았으나 세상 어디에서도 문영수의 행방은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문영수는 과연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요. 사라진 문영수의 행방을 찾기 위한 가족들의 노력은 그야말로 피눈물 나는 과정이었습니다. 그러던 1987년, 문영수의 행방을 찾아 5년여를 동분서주하던 가족들이 마침내 그의 행방을 알게 되었습니다. 당시 치안본부(현 '경찰청')가 추진했던 '헤어진 가족 찾기 캠페인' 덕분이었습니다.

하지만 가족들이 만난 문영수는 살아 있는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시신도 아니었고, 매장된 봉분 형태도 아니었습니다. 과연 문영수에게는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일까요.

지난 2011년 12월 2일 배은심 회장(이한열 어머니), 황지익씨(한진중공업 박창수 아버지), 이기주씨(의문사한 이덕인 아버지) 등 유가협 회원과 추모단체 회원들이 경찰청 앞에서 “문영수를 죽인 경찰은 사죄하고 장례를 치를수 있도록 하라”고 촉구하고 있다. <사진=유가협 홈페이지>

경찰서에서 쓰러진 문영수, 행려병자로 조작되다

1982년 8월 19일 서울에서 버스기사로 일하던 문영수가 노조 활동과 관련한 부당해고를 당하면서 불행은 시작됩니다. 노조 관계로 해고된 그에게 일자리를 줄 서울지역 버스 회사가 없었습니다. 그의 이름이 버스회사의 블랙 리스트에 올라갔기 때문입니다. 그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였습니다. 자신을 모르는 곳으로 가서 일자리를 얻는 것입니다. 그래서 찾아간 곳이 광주였습니다. 그런데 일자리를 찾아 내려갔던 광주의 여관에서 그는 사소한 폭행 사건에 연루되었고 결국 경찰에 연행까지 되었습니다.

그런데 광주 서부경찰서로 연행된 당시 29살의 청년 문영수가 조사 중 갑자기 쓰러졌다는 겁니다. 경찰은 당연히 아무 문제가 없었다고 주장합니다. 고문도, 가혹 행위도 없었는데 갑자기 의식을 잃고 문영수가 쓰러졌다는 것입니다. 마치 1987년 1월 경찰청 남영동 분실에서 경찰의 고문 끝에 숨진 '박종철 치사 사건'과 같은 이야기입니다. 다만 박종철 열사는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쓰러졌다'라는 궁색한 거짓말이라도 붙었으나 문영수에게는 그마저도 없었다는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이같은 경찰의 주장을 그대로 믿을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요. 문영수가 쓰러진 그때는 1982년이었습니다. 군사 독재자인 전두환 쿠데타 세력이 자행한 1980년 5월 광주 학살이 있은 지 불과 2년여밖에 지나지 않던 그 폭압의 시대에 폭력 잡범으로 연행된 문영수를 경찰이 어떻게 대우했을지 상상해 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경찰은 자신들에게 쏟아지는 의혹에 대해 그때도 그렇고, 지금까지도 여전히 잡아떼고 있습니다.

본 사람도 없고 증언해줄 수도 없는 그날 1982년 8월 20일 새벽. 광주 서부경찰서 형사계 순경 최아무개로부터 조사를 받던 중 갑자기 쓰러졌다는 문영수는 3일 후인 22일, 끝내 광주 적십자병원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어처구니없는 죽음을 맞은 문영수의 비극은 이것이 다가 아니었습니다.

7개월간 '해부학 실습용'으로 사용된 문영수

만약 경찰의 주장처럼 정말 아무런 일도 없었는데 문영수가 쓰러졌다면 경찰은 자신의 무고함을 증명하기 위해서라고 반드시 사고 경위를 조사했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이 사건을 보고받은 검찰 역시 경찰을 상대로 수사를 개시하여 이 사건 경위에 대해 명쾌하게 밝혀야 했습니다. 그런데 당연한 이 과정이 전혀 그렇게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1987년 5월경, 치안본부 전산망을 통해 문영수의 행방을 알게 된 유족이 들은 문영수의 사망 경위는 거리에서 행려병자로 쓰러져 있는 것을 경찰관이 발견하고 병원에 입원시켰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후 문영수가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유족은 당시 치안본부와 광주지검 등에 의혹을 규명해달라는 진정서를 제출했습니다.

그리고 약 석 달 후인 1987년 8월, 문영수의 유족들은 이 사건을 조사하던 광주지검으로부터 놀라운 사실을 듣게 됩니다. 문영수의 조사 담당자였던 광주 서부경찰서 최아무개 순경이 이러한 모든 사실을 조작했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즉, 경찰서에서 조사받다가 쓰러진 문영수를 길거리에 쓰러져 있는 행려병자로 조작했고 이후 그를 병원에 입원시켰으나 사망한 것으로 조작한 것입니다.

마치 경찰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처럼 조작된 내용의 공문서로 경찰서장에게 결재를 받은 최 순경이 이후 행려 사망자로 조작된 문영수를 해부용 실험 시신으로 '전남대 의대 해부학 교실'로 보내버린 것입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이처럼 문영수의 사망 경위와 신분이 조작되는 데 걸린 시간입니다. 문영수의 억울한 시신이 본인의 뜻과 상관없이 '의대 해부용 실험 시신'이 되는 데 걸린 시간은 만 하루가 걸리지도 않았습니다. 22일 오후 6시 5분경 사망한 문영수를 전남대 의대 해부학교실로 인계한 시간은 23일 낮 12시 5분경이었습니다. 불과 18시간 만에 이루어진 일입니다. 그리고 무서운 조작과 음모로 보내진 문영수의 시신은 이듬해인 1983년 5월경부터 같은 해 12월까지, 무려 7개월간 '해부학 실습용 시신'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더 충격적인 것은 이러한 극악한 범죄를 저지른 당시 광주 서부경찰서 최아무개 순경에 대한 처벌 결과입니다. 진실의 일부를 알게 된 문영수의 유족이 1987년 9월 18일 최 순경을 '허위 공문서 작성'과 '사체 은닉' 등의 혐의로 고소했고 같은 달 23일 광주지검은 그를 구속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선고된 형량이 그야말로 어처구니 없습니다.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이었습니다.

진실을 밝히기 위한 투쟁 그리고 밝혀진 진실들

광주지법이 최 순경에게 그처럼 형식적인 형을 선고한 이유는 문영수가 사망한 경위에 대해서는 책임이 없고, 다만 '공문서'를 조작한 사실만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같은 판단에 대해 비판합니다. 최 순경은 이 사건의 진실을 은폐한 것입니다. 만약 그가 문영수의 지문만 채취해도 그의 신원을 알 수 있는 것이 대한민국입니다. 그런데 그는 문영수가 쓰러진 장소를 조작했고 더 나아가 그의 시신을 완벽하게 훼손하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상상할 수도 없는 공무원의 범죄 행위에 대해 단순히 기계적인 판단만 한 것에 대해 저는 도저히 동의할 수 없는 분노를 느낍니다. 경찰, 검찰, 법원 등 국민의 억울함을 해소해 줘야할 국가기관이 모두 합세하여 정말 억울한 국민을 만든 것입니다.

7개월간 자신의 뜻과 상관없이 마구 파헤쳐진 문영수의 시신은 1984년 1월, 다른 해부용 실험 시신 10여 구와 함께 화장되어 전남대 의대 추모관에 안치되었습니다. 그렇게 찾아낸 문영수의 유골함을 안고 울부짖던 그 가족들의 한을 상상한다면 이는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재판 결과입니다.

억울한 유족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그래서 온 몸을 내던지는 처절한 싸움이었습니다. 1988년 10월 17일부터 1989년 2월 27일까지 기독교회관에서 무려 135일에 걸친 의문사 사인 진상규명을 위한 농성을 시작으로 다시 그 10년 후인 1998년에도 여의도 국회 앞에서 천막을 치고 '의문사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해 달라는 농성을 무려 422일간이나 하는 등 참으로 혹독한 고난의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그런 처절한 노력 끝에 마침내 김대중 정부에서 '대통령소속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가 출범했습니다. 문영수의 유족 역시 문영수의 억울함을 규명해달라고 진정을 냈습니다. 2009년 11월 10일, 마침내 진실의 일부가 밝혀졌습니다.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를 잇는 진실화해위원회(진화위)가 문영수 사건을 조사하여 그 결과를 발표한 것입니다.

진화위는 "문영수를 연행한 당시 경찰이 시간과 사건 경위를 조작하였고 사건 전 과정에서 보고 누락과 허위 진술, 그리고 검사 지휘가 있기도 전에 문영수의 사체를 해부용 시신으로 전남대 의대에 인계하는 등 잘못이 있었음"을 공식 확인한 것입니다.

또한 당시 공문서를 조작한 최아무개 순경이 문영수에게 일체의 가혹 행위를 하지 않았다고 주장했으나 다수의 목격자와 정황 증거를 확보한 진화위는 그의 주장과 달리 그날 밤 문영수가 광주 서부경찰서 형사계에서 가혹행위와 폭언을 당했다는 사실 역시 확인해줬습니다.

이외에도 경찰뿐 아니라 행려병자로 위장된 문영수의 시신을 인계받은 전남대 의대 그리고 행정 업무를 관할한 북구청 역시 행려 사망자의 '시신 처리에 관한 각종 규정'을 위반하는 등 총체적인 위법 사실이 확인되어 '유족에게 사과하고 적절한 피해 구제를 위한 조치'를 하도록 권고했습니다.

문영수 유족의 한은 언제나 풀릴까

하지만 거기까지였습니다. 진화위의 진실 규명 결정 이후에도 경찰을 비롯하여 이들 관련 국가 기관들은 문영수에 대해 사과하지 않았습니다. 누구도 자기 책임이 아니라며 부인했고 다른 기관의 잘못이라며 그 책임을 떠밀었습니다. 그렇게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가운데 또 다시 시간만 흘러갔습니다. 억울하게 죽은 문영수의 유골이 사후 30년이나 전남대 의대 추모관에 있게 된 이유였습니다.

2012년 5월 15일. 문영수의 억울함에 대해 경찰이, 관할 구청이 그리고 국립대학인 전남대가 진심으로 사과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끝내 이러한 유족의 요구에 따라 단 한 마디라도 사과한 기관은 없었습니다.

문영수의 가족들은 이들 기관으로부터 '제대로 된' 공식 사과 한마디 못 들었지만 더 이상 문영수를 전남대 의대 추모관에 방치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사후 30년이 넘도록 제대로 된 장례식조차 치르지 못한 그를 이제 그만 가족의 품에 안아야 한다고 여긴 겁니다. 그래서 생전 자식의 억울한 죽음에 말로 다하지 못할 한을 품고 아프게 살다가 떠난 부모님 묘 곁에 문영수를 함께 안장해주기로 한 것입니다.

2012년 5월 15일.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유가협)와 추모연대, 그리고 의문사 유가족 대책위원회로 구성된 '경찰폭력 및 시신 훼손 희생자 고 문영수 사건 대책위원회'가 문영수의 영결식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문영수가 마지막으로 쓰러진 광주 서부경찰서 앞마당에서 한 맺힌 노제를 치르며 경찰에게 다시 한번 진심으로 사과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광주 서부경찰서장의 사과 인사만 있었을 뿐 그동안 요구해온 경찰청 차원의 공식 사과는 끝내 거부되었습니다.

그날 밤, 문영수는 30년 만에 부모님에게 돌아왔습니다. 그의 지독하고도 끔찍한 30년 악몽이 춘천의 가족묘지에 부모님과 함께 봉안되면서 다시 가족의 품 안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이 한맺힌 억울함에 사람들의 눈물은 통곡으로 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 사건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입니다. 그날 새벽, 1982년 8월 20일 광주 서부경찰서에서 정말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밝혀야 할 '남은 진실'이 있습니다. 그리고 정말 이 모든 일들이 고작 순경 한 명에 의해 이뤄진 일인지에 대해서도 밝히는 것은 결코 문영수 개인의 한을 풀기 위한 일이 아닙니다. 누군가 또 다시 이런 참담하고도 믿을 수 없는 피해자가 되지 말라는 법이 없습니다.

29살 청년이었던 문영수. 그의 억울한 죽음에 이 나라의 인권을 고민하는 사람으로서 진심으로 위로를 드립니다. 당신의 억울함을 잊지 않겠습니다. 그렇기에 30년 세월이 아니라 앞으로 더 많은 시간이 지난다 해도 우리가 또 다른 당신이 되어 당신의 억울함을 말하겠습니다. 부디 30년만에 다시 돌아간 부모님의 품안에서 행복하시기를 기원합니다. 문영수의 유족에게 깊은 위로를 전합니다.


고상만 객원기자

고상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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