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는 시효가 없다”

편집인레터 김주언l승인2013.03.05 16:59

크게

작게

메일

인쇄

신고

“불을 낸 방화범은 잡지 않고 화재신고자를 잡아들인 격이다.” 감사원장을 지낸 원로 법조인 한승헌 변호사가 지난 1987년 법원에 제출한 변론문의 한 구절이다. 전두환 정권의 보도지침을 폭로한 언론인들을 대상으로 한 1심 마지막 공판에서다. ‘보도지침 사건’의 결심공판이었다. 당시 필자는 피고인 석에 선배 두명과 함께 앉아 있었다. 아직도 카랑카랑한 한 변호사의 목소리가 귓전을 때린다.

군사독재정권은 권력기관의 비리 등을 폭로한 내부 제보자들을 각종 죄목을 붙여 단죄했다. 정권안보를 위해서는 권력내부의 불법 탈법 사실이 외부로 빠져나가 국민에게 알려지는 것을 철저하게 차단했다. 1990년 재벌의 로비로 감사원 감사가 중단된 사실과 재벌의 비업무용 부동산 소유실태를 폭로한 이문옥 감사관. 1992년 14대 총선과정에서 군 부재자 투표 부정사례를 양심선언한 이지문 중위. 1990년 보안사의 민간인 사찰 문건을 폭로한 윤석양 이병. 이들은 하나같이 공무상 비밀누설죄 등의 혐의로 구속돼 곤욕을 치러야 했다.

우리사회가 민주화하면서 권력기관 내부의 내부고발을 보호하는 제도가 도입됐다. 2001년 부패방지법을 시작으로 2011년엔 공익신고자 보호법이 제정돼 시행되고 있다. 선진국에서 시행중인 ‘휘슬 블로어(whistle blower)법’을 원용한 것이다. 이제 내부고발은 보호되어야 할 가치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내부고발은 이제 “개인의 양심을 능동적으로 실현하여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수호하기 위한 행위일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외부인이 알 수 없는 조직 내부의 부조리함을 통제하여 부패를 예방하고 단체나 조직의 투명성과 책임성을 실현하는 기능”으로 규정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익제보 보호제도는 무력화해 있다. 2년 전 ‘한겨레21’이 1990년대 이후 대표적 공익신고 사건 36건을 조사하여 분석한 내용은 이를 잘 말해준다. 이중 12건(31.5%)만 비리혐의자가 유죄판결을 받았다. 아예 사법당국의 수사가 이뤄지지 않은 사건도 10건(26.8%)이나 되었다. 반면 45명의 공익신고자 가운데 20여명은 오히려 파면이나 해임을 당했다. 비리혐의자 10명은 오히려 승진했다.

지난해 한국투명성기구로부터 투명사회상을 수상한 이해관 KT새노조 위원장도 비슷한 일을 겪었다. 이 위원장은 국내전화망을 이용한 ‘제주 7대 경관’ 전화투표에 해외요금을 부과했던 KT를 내부고발하고 조직의 부도덕성을 외부에 알렸다. 하지만 곧 KT로부터 보복성 징계를 받아 파면당했다. 정수장학회의 MBC 지분 매각 계획을 보도한 최성진 ‘한겨레’ 기자의 사례도 비슷하다. MBC가 지난해 10월 최기자를 통신비밀보호법 위반 혐의로 고발했기 때문이다. 앞으로의 재판과정을 지켜볼 일이다.

박근혜 정부는 과거로 돌아가려는가. 박근혜 정부의 출범을 앞두고 불거져 나온 국가정보원의 ‘댓글녀’ 관련 내부고발자 파면 사건과 대법원의 노회찬 의원 ‘삼성X파일’ 폭로 유죄확정 사건은 매우 상징적이다. 내부의 비리는 덮어둔 채 경고성 호루라기를 분 내부제보자들에게 보복을 가했기 때문이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이다.

국가정보원은 직원 김모(29)씨의 대선 여론조작 의혹을 전직 직원에게 제보한 현직 직원들을 파면하거나 징계했다. 더 나아가 전 현직 직원들을 비밀누설 금지 등 국정원법 위반혐의로 검찰에 고발했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시민사회와 여론은 들끓었다. 국가기관의 조직적 선거 개입의혹 등 본질적 문제는 제쳐두고 권력기관의 비리를 은폐하기 위해 제보자를 파면했다는 비난의 목소리였다.

이에 대해 통합진보당은 “국정원의 대선 개입은 민주주의에 대한 엄중한 도전이며 국기 문란 행위”라며 “관련 의혹을 명백히 밝히고 책임을 묻는 게 상식이지 제보한 직원들을 파면하는 게 상식인가”라고 비난했다. 진보당은 “이러한 작태에서 유신독재의 망령이 아른거린다”고 지적했다. “도둑놈 알리면 해고되는 정의로운 세상” “돈과 권력 비리에 저항하면 목숨이 위태로운 나라” 등 온라인의 반응은 국민의 분노를 대변한다.

삼성 X파일 사건의 떡값 검사 명단을 공개했던 노회찬 진보정의당 의원의 유죄판결에 대한 반응도 폭발적이다. 노 의원은 8년 만에 대법원에서 징역 4개월 집행유예 1년, 자격정지 1년의 유죄확정 판결을 받아 의원직을 잃었다. 노 의원은 ‘떡값 검사’ 7명의 실명과 대화내용이 담긴 보도자료를 기자단에게 배포한 뒤, 이를 자신의 홈페이지에 올렸다. 노 의원이 인터넷에 명단을 공개한 것이 통신비밀보호법 위반에 해당된다는 것이 대법원의 최종 판단이었다.

반면 검찰 수사 과정에서 “떡값 준 놈, 받은 놈, 알선한 놈”은 증거불충분을 이유로 모두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검찰은 이건희 회장을 소환 조사하지 않았고, 증인으로 채택된 홍석현 회장은 출석을 거부해 과태료 300만원 처분을 받았다. 떡값 검사로 지명된 전·현직 검사 7명도 모두 무혐의 처리됐다. 하필이면 삼성X파일 사건의 수사를 지휘한 검사가 박근혜 정부 첫 법무부 장관 후보자로 지명된 황교안 전 고검장이다.

노 의원은 “8년 전 그날, 그 순간이 다시 온다고 하더라도 나는 똑같이 행동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불의가 이기고 정의가 졌다고 보지 않는다. 싸움은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역사에는 시효가 없다”고 선언했다. 시민의 분노도 하늘을 찌른다. 서울에서는 노회찬 공동대표 사면촉구 서명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한마디로 삼성-검찰-법원으로 이어지는 어둠의 삼각동맹이 정의를 쓰레기더미에 묻은 것” “부패한 재벌과 검찰은 무죄, 이를 폭로한 노회찬은 유죄. 대한민국 법원은 유죄인가 무죄인가?” 온라인을 달구는 비난여론은 무엇을 말하는가.

박근혜 정부는 출범하기 전부터 대통령직 인수위원회가 내부정보를 꽁꾱 묶어놓아 ‘밀봉 인수위’라는 지적을 받았다. 내부정보의 유출을 엄격하게 통제하겠다는 발상이다. 권력내부의 비리를 감추기 위해 양심세력의 입을 ‘밀봉’시키겠다는 의도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박근혜 정부에서의 공익제보는 엄두도 내지 못할 것이라는 단초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김주언 편집인

김주언  

<저작권자 © 시민사회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김주언의 다른기사 보기

인기기사


여백
시민사회신문 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08288 서울특별시 구로구 새말로 93, 신도림태영타운상가2동 B105  |  대표전화 : 02-3143-4161  |  팩스 : 02-6737-1115  |   ingopress@ingopress.com
등록번호 : 서울 다 10706  |  등록일자 : 2013년 8월 26일  |  회장·논설주간 : 강상헌  |  발행·편집인 : 설동본  |  편집국장 : 양병철
후원계좌 : 국민은행 7788-01-04-375819 (시민사회신문)  |  청소년보호책임자 : 설동본
Copyright © 2007 시민사회신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