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르메니데스의 엘레아에서

철학여행까페[6] 이동희l승인2007.10.08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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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희
포세이도니아

서양철학사를 들여다보면, 이오니아학파 다음에 보통 크세노파네스, 파르메니데스, 제논 등으로 대표되는 엘레아학파라는 이름이 등장한다. 보통 엘레아를 오늘날 터키 서부 연안에 위치한 이오니아 근처에 있는 지역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엘레아는 지금 이탈리아 남부 지역인 벨리아에 있다.
지도를 펼쳐 놓고 보면, 밀레토스에서 엘레아까지 서로 엄청나게 멀리 떨어져 있다. 지금도 배를 타고 꼬박 이틀은 가야 하는 거리이다. 이오니아 지역에서 발생한 철학이 어떻게 이렇게 먼 지역까지 전파될 수 있었을까 ?

철학의 여정

원래 엘레아라는 도시를 건설한 사람들은 이오니아지역에 살던 포카니아(현재 터키의 지명은 포샤)주민들이었다. 포카이아인들이 그들의 고향을 버리고 엘레아를 건설하게 된 까닭은 페르시아의 침공 때문이었다. 이 페르시아의 침공 때문에 철학자 크세노파네스도 젊은 나이에 고향을 떠나 이탈리아를 전전했다. 기원전 540년경, 페르시아의 키루스 대왕은 리디아를 멸망시킨 다음 그 여세를 몰아 이오니아 도시들을 모두 점령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하르파고스 장군이 이끄는 페르시아 군대가 포카이아 도시를 포위하고 항복을 할 것을 종용했다. 포카이아인들은 하루만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요청했다. 하르파고스 장군은 항복을 전제로 그 요청을 받아 들였다.

그러나 포카이아인들은 항복 보다는 도주를 선택했다. 원래 포카이아인들은 해운업으로 그리고 때로는 해적질로 먹고 사는 사람들이라 짐을 꾸려 도망가는 데에 그다지 큰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그들은 배에다 가재도구뿐만 아니라 신전의 신상도 몽땅 챙긴 다음 그날로 줄행랑을 쳐 버렸다. 하르파고스 장군이 포카이아를 점령했을 때, 이미 도시는 텅 비어 있었다.

고향을 떠난 포카이아인들은 처음에 고향 근처에 있는 키오스에 딸린 작은 섬을 사서 정착하려 했다. 그러나 키오스인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들은 여러 차례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결국 새로운 지역인 이탈리아 남부까지 떠 밀려 가게 되었다. 그들은 나폴리를 지나 남쪽으로 계속해서 내려가다가 그리스의 식민도시 포세이도니아에서 60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알레토 강의 하구에다 히엘레라 불리는 도시를 건설했다. 이 히엘레라는 도시에서 엘레아 학파의 파르메니데스가 태어났다. 후대의 사람들은 파르메니데스 때문에 히엘레라는 도시를 더 이상 히엘레가 아니라, 엘레아로 기억하게 된다.

‘존재’를 물었던 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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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메니데스
파르메니데스는 철학사에서 '존재'라는 문제를 최초로 제기한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서구의 존재론과 형이상학의 기초를 마련한 사람치고는 그에 관한 기록이 별로 없다. 기원전 6세기 말, B.C. 515~510년 사이에 태어났다고 추정된다. 그는 명망 있는 부잣집 가문의 아들로 태어나 훌륭한 교육을 받고 성장했던 것으로 보인다. 나중에 그는 엘레아에서 정신적 지도자뿐만 아니라 정치적 지도자로서의 역할도 했던 것 같다. 엘레아의 모든 시민들은 자신의 자식들이 성년이 되면 파르메니데스가 만든 법에 따라 충성의 서약을 시켰다고 하니까.

파르메니데스가 논리학과 천문학을 배우기 위하여 이집트를 방문한 이야기도 있지만 확실하지 않다. 플라톤이 쓴 '파르메니데스'에 따르면, 예순 다섯의 나이로 파르메니데스가 제자인 제논과 함께 엘레아의 사절로 판아테나이아제를 위해 아테네를 방문했다고 한다. 파르메니데스는 그때 이미 머리가 하얗게 세었는데 그 하얗게 센 머리가 그를 더욱 우아하고도 아름답게 보이게 했다고 한다. 파르메니데스는 당시 아테네 근교의 피토드로스라는 부자의 집에 묵고 있었다. 그 당시 스무살을 갓 넘긴 새파란 청년 소크라테스는 그 소식을 듣고 파르메니데스를 찾아가 철학적 문답을 벌였다.

파르메니데스는 만물은 변화한다고 주장했던 헤라클레이토스와 다르게 변화는 없다고 주장했다. 변화가 없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 그는 존재와 무의 문제를 끌어 들인다. 그는 지극히 당연하게 존재는 있는 것이고, 무는 없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가 생각할 때 무는 생각할 수조차 없는 것이기 때문에 무는 존재할 수조차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가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때문에 무의 세계란 생각할 수조차 없으며, 오로지 존재의 세계만이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변화는 없다는 것일까? 그리스인들은 흔히 생성소멸을 변화로 본다. 그것은 존재의 세계에서 ‘무’의 세계로 넘어가는 것을 뜻한다. 그렇지만 ‘무’의 세계라는 것은 애당초 없기 때문에 소멸도 없고 또한 생성도 있을 수 없다. 따라서 변화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변화란 없다고 주장했던 파르메니데스가 살던 도시 엘레아는 아이러니하게 변화해서 이름마저 벨리아로 바뀌었다. 엘레아는 복잡한 나폴리나 관광객이 들끓는 폼페이와 다르게 한 여름에도 별로 찾는 사람이 없다. 엘레아 도시가 있던 고대의 아크로폴리스에 자리에 올라 가 보니 지금은 중세 때 세워진 성탑 일부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높은 성탑이 있는 자리에서 보니 앞으로는 지중해의 검푸른 물결이 해안선 쪽으로 계속해서 달려들고 있었고, 뒤로는 평화롭게 산들이 펼쳐져 있었다. 엘레아는 현재 발굴 작업이 진행 중이다. 유적지에서 발굴된 파르메니데스 흉상이 성탑 반대편의 종탑에 전시되어 있다.

그리스 문화의 남하

철학이나 고대 그리스문화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엘레아를 포함해 이탈리아 남부를 꼭 들러 보라고 권하고 싶다.

이동희
엘레아의 중세 때 종탑

그리스 문화를 꼭 그리스에 가야만 보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탈리아 남부에서 훨씬 더 잘 보존된 그리스유적지를 만날 수 있다. 고대에는 이탈리아 남부도 대그리스에 속했다. 세계 3대 미항으로 유명한 나폴리라는 도시의 이름도 새로운 도시라는 뜻의 그리스어인 네아폴리스에서 유래한 것이다. 나폴리 국립 고고학 박물관에 가보면 고대 그리스 문화 유품과 고대 그리스 문화가 로마인에게 끼친 영향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폴리에서 차로 1시간 정도 더 내려 가면 고대 그리스 도시인 파에스툼을 만날 수 있다. 파에스툼은 고대 그리스 시절에는 포세이도니아라 불렸다. 이곳에 가면 기원전 6세기에 세워 진 그리스 신전을 비교적 온전한 형태로 감상할 수 있다. 물론 나폴리에서 파에스툼으로 오기 전에 시간이 된다면 화산으로 멸망한 도시 폼페이를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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