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전과 평화의 총체적인 접근

‘잘사는 평화’를 찾아서[2] 김승국l승인2007.10.22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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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학 시각에서 바라보는 경제
배제되는 가치 통시적인 관찰을

갈퉁은 발전학의 총체적인(전체론적인) 접근을 통해 평화학의 지평을 넓히려고 한다. 평화를 위한 발전의 이론이 전체론적(holistic·총체적)이어야 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발전과 평화의 관련성을 평화학의 시각에서 전체론적으로 다루려는 시도가 그의 저서 ‘Globalization and Intellectual Style-Seven Essays on Social Science Methodology’(2003)의 네 번째 에세이에 잘 나타나 있으므로, 이 부분을 아래와 같이 요약·해설한다.

유엔헌장에 발전·평등·평화의 3가지 가치가 담겨있다. 발전은 ‘축적’(풍요함 대 빈곤함의 자본 축적만이 아니라 건강, 교육 및 발전의 여러 측면과 관련되어 있다)의 높낮이를, 평등(마르크스주의적 평등, 자유주의적 평등)은 평등한 정도의 높낮이를, 평화는 직접적 폭력의 존재·부재(不在)를 뜻하며, 이 3가지 가치의 상호관계가 관심사이다. 이 3가지 가치는 3가지 변수의 최종지점으로 간주된다. 그런데 이러한 가치는 어떤 사람·어떤 나라와 결부되어 있으며 그 사람이 갖고 있는 세계관(social cosmology)을 반영한다. 사람들이 예견하는 변수들 간의 관계를 세계관이라고 정의내릴 수 있으며, 이 정의를 명제(These)로 치환할 수 있다. 또한 변수를 두 가지 좌표로 나누어 다양한 공간을 형성할 수 있다.

발전과 평등에 관한 명제

우선 서로 배제하는 가치를 다룬다. 이 때의 명제는 부정적(否定的)으로 정식화된다. 즉 ‘고도로 발전된 사회에서는 평등을 실현할 수 없다’거나 ‘평등한 사회는 고도의 발전을 이룰 수 없다’는 부정형의 명제가 나온다. 이 명제는 명제에 포함된 3가지 조합을 강조함으로써 긍정적으로 정식화할 수 있다. 더욱이 이 명제는 공시적(共時的)이자 통시적(通時的)인 것이 될 수 있다. 즉 발전·평등과 관련된 명제를 중심으로 공시적·통시적인 모형을 그릴 수 있다.

김상택 기자
국가보안법폐지연대는 17일 서울 여의도 국민은행앞에서 한반도의 평화를 가로막는 국가보안법 폐지를 위한 각계 원로 및 대표인사 선언 기자회견을 가졌다.

더 나아가 부정적으로 정식화된 다음의 명제들을 생각할 수 있다. 즉 ‘고도로 발전된 사회는 평화롭지 않다’, ‘평화로운 사회는 고도의 발전을 취할 수 없다’는 명제가 가능하다. 이 명제들에 포괄된 3가지 가치의 조합에 따라 긍정적으로 정식화할 수 있다. 이 명제들(발전과 평화에 관한 두 개의 명제) 역시 공시적·통시적인 모델을 선보일 수 있다. 즉 가난하지만(발전이 덜 되었지만) 폭력이 없는 ‘평화지향적인 상태(A)’에서 가난하며(발전이 덜 되었으며) 폭력도 존재하는 ‘평화결여의 상태(B)'로 나아간 다음에, 풍요롭지만(발전이 잘 됨) 폭력이 존재하는 ‘평화롭지 않은 상태(C)’로 명제를 이동시키는 통시적인 작업이 가능하다.‘축적(자본·건강·교육 등의 축적)은 적지만 평화로운 단계(A)’에서 ‘폭력이 출현하지만 고도의 축적이 나타나는 단계(B)’를 거쳐, ‘고도의 폭력을 동반하는 단계(C)’로 이행하는 것을 상정할 수 있다.

전쟁과 평화적 경제

여기에 국가, 중앙집권적인 사회조직, 물질적·구조적인 권력을 지닌 사회계층을 변수로 집어넣으면 더 좋다. 이들 조직된 인간집단은, 이와 같은 특징이 결여된 유목민 종족에 비해 조직적인 전쟁을 수행하는 능력이 높고 내적축적(內的蓄積)을 위해 자기 조직을 원료가공 공장으로 전환하는 능력이 높다. 전쟁을 위한 조직과 발전을 위한 조직 사이에는 양립성·동일성이 있으며, 양자는 영역국가에서 조우하게 된다.

그런데 ‘전쟁수행이 아닌 경제발전만을 위해 사회가 형성되는 일이 왜 없는지’에 관하여 아무런 설명이 없어서 설명하겠다. 첫째, 전쟁기구가 경제적 목적을 위해 이용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생산요소(자본·원료·값싼 노동력·노예)의 확보, 제품시장의 확보를 위해 전쟁을 일으키는 경우이다. 둘째, 전쟁기구가 경제적 특권·수탈을 보호하기 위해 투입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전쟁·발전의 증대가 (제3의 요소인) 국가형성에 의한 것이라는 암묵의 전제가 내재해 있다. 즉 국가가 형성됨과 더불어 전쟁·발전의 증대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국가형성의 영역성 때문에 (A)~(B)로의 이행이 발생한다.

비폭력 혁명에 관한 명제

부정적으로 정식화한 명제로서 ‘폭력을 없애지 않고 평등을 이룰 수 없다’를 제시한다. 이와 관련하여 4가지 국면을 생각할 수 있다. 첫째, 노골적인 폭력이 나타나지 않는 불평등 사회(‘법과 질서’의 사회). 두 번째, 폭력의 국면(혁명적 폭력, 반혁명적 폭력). 세 번째, 불평등 사회가 붕괴되어 평등한 사회질서가 만들어졌지만 당분간 폭력에 의해 유지되지 않을 수 없는 국면(프롤레타리아트 독재). 네 번째, 폭력이 불필요하며 평등이 계속 존재하는 국면.

이처럼 발전을 평등과 연관하여 생각하는 것은, 마르크스주의의 발전이론과 관련이 있다. 마르크스주의에서 ‘폭력 없는 혁명은 없다’는 명제의 이론적 근거는 다양하다. 불평등이라는 관계 속에서 지배계급의 기득권이 매우 크다. 여기에서 ‘지배계급의 착취를 유지하기 위한 폭력’을 타파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폭력이 필요하다는 견해가 도출된다. 이와 관련된 기본적인 문제는, 혁명이 본질적으로 사람을 겨냥한 것이냐 구조를 겨냥한 것이냐는 점이다. 전자는 지도적인 인물이 목표이지만, 후자는 구조를 변화시키는 게 목표이다. 물론 양자는 결합되어 있다.

이러한 구조적인 혁명과 관련하여 비폭력 혁명의 문제가 등장한다. 착취 받은 자가 억압적 구조에 관여하는 것(마르크스주의의 구조적인 혁명)을 거부하고, 간디처럼 자신의 대항적인 구조를 만드는 일이다. 간디처럼 과거의 착취자에게 원조를 제공하고 그들이 기본적인 불이익을 입지 않도록 보호하는 것이다. 이는 사람을 상대로 한 것이 아니라 구조를 상대로 한 비폭력 행동이다. 비폭력이 의거하는 기본사상 속에 권력을 뛰어넘는 깊은 통찰이 깃들어 있다.

많은 사람들이 보기에 억압적 구조의 옹호자에 대한 효과적인 대항력은 동일한 종류의 대항적 폭력이다. 그러나 비폭력적인 대항력은 다르다. 자존심·자립·대담함·자율·자기통제라는 비폭력적인 대항수단이 있다.

개발-폭력-평화의 3자 관계

자동사로서의 발전은 주체(발전의 주체) 중심이다. 이와 달리 타동사로서의 개발은, 개발의 주체(선진공업국 및 선진공업국에 종속된 제3세계 국가·지배계급)가 객체(민중)를 타자(他者)로 삼아 부려먹거나 착취하는 관계이다. 개발주체(선진 공업국)가 객체(제3세계 국가)를 개발하는 타동사가 'develop'이다. 타동사 ‘develop'은 먹히는 개발이요, 착취당하는 개발이므로 폭력적이다. 타동사로서의 개발은 폭력성을 머금고 있다. 직접 눈에 보이는 폭력이 아니라, 사회 구조적으로 은폐되는 구조적 폭력을 머금고 있는 게 타동사로서의 개발이다. 타동사로서의 개발이 구조적 폭력을 지니고 있으므로, 구조적 폭력을 지양하는 평화의 과제가 절실하다. 여기에서 개발과 평화의 관련성이 깊어진다.

이러한 개발-폭력(구조적 폭력)-평화의 3자 관계를 잘 설명한 이반 일리치(Ivan Illich)가 지난 1980년 12월 초순 요코하마에서 강연한 내용을 요약하며 해설을 곁들이면 다음과 같다.

‘개발이라는 구호 아래에서 민중의 평화를 공격목표로 삼는 세계적 규모의 싸움이 전개되어 왔다. 그 결과 개발이 진척된 지역에 사는 민중의 평화가 거의 상실되었다. 개발주도 세력이 ‘개발=평화’라고 강변하는 평화는 ‘경제 평화(Pax Economica·인간이 경제에 예속됨으로써 얻는 평화)’로서 희소성의 가설에 바탕을 두고 규정된 평화이다. 경제평화의 본질은 경제대국끼리의 세력균형 질서에 있으며, 이 질서 아래에서 제3세계를 대상으로 개발이 진행되고 있다. 따라서 경제평화에 의한 개발은 제3세계 민중의 ‘Subsistence Culture’(어떤 사회를 그 사회답게 만드는 물질적·정신적인 기반)을 파괴한다. 한마디로 경제평화에 의한 개발이 제3세계 민중의 평화를 유린한다. 민중의 생존환경(subsistence)이 ‘경제평화에 의한 개발’의 공격대상이 된다. 생존환경에 의존하면서 권력자의 개입을 거부하는 ‘민중평화’를 ‘경제평화에 의한 개발’이 짓밟으면서 평화의 의미를 독점한다. 본래 평화와 개발은 동떨어진 개념이었지만 유엔 창설 이후 평화가 서서히 개발(development)과 연결되어 왔다. 특히 1949년 1월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이 ‘저개발 지역 원조를 위한 Point 4’ 계획을 발표하면서 ‘평화는 개발에 의해 달성될 수 있다는 통념’이 생겼다.

‘Point 4'는 냉전 시대의 주도권을 쥐려는 미국판 경제평화의 개발 계획이었으며, 주요한 대상 지역이 제3세계이었다. 미국판 경제평화(Pax Economica)의 군사·정치적인 별명이 ‘Pax Americana’(팍스 아메리카)이다. 팍스 아메리카는 ‘미국이라는 제국의 힘에 의한 세계평정’을 뜻하므로 반드시 세계화(globalization)를 동반한다. 세계화가 없는 Pax Americana를 상상할 수 없다. 이렇게 Pax Americana와 짝을 이루는 세계화 속의 개발은 냉전시대의 개발과 차원을 달리한다.

세계화는 전 세계를 예전에 없던 치열한 경쟁으로 몰아넣었다. 국가도 기업도 개인도 살아남기 위한 경쟁을 강요당한다. 전 세계의 물적·인적 자원을 단기간에 동원하여 특정 개발사업을 위해 편성하거나, 전 세계의 모든 장소·사람에게 개발의 물결이 미치게 하는 기능을 촉진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세계화는 개발의 세계화이다.’


김승국 평화만들기 대표

김승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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