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인, 아니면 노예로 살 것인가”

철학여행까페[8] 이동희l승인2007.10.22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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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희
아테네와 페르시아 사이의 전쟁을 자유 대 전제주의로 해석한 역사가 헤로도토스의 두상이 그의 고향 할리카르나르소스(오늘날 보드룸)에 가면 볼 수 있다.

밀티아데스는 칼리마코스를 찾아가 페르시아와의 전쟁이 단순한 전쟁이 아니라 “아테네인의 자유”를 지키기 위한 전쟁이라고 설득한다.

“칼리마코스여, 바야흐로 아테네가 노예로 전락할 것이냐, 아니면 그 자유를 확보하고 하르모디오스와 아리스토게이톤 두 사람 조차 남기지 못했던 찬란한 업적을 세워 후세에 전할 것이냐 하는 것은 오직 그대에게 달려 있소.” (헤로도토스, 제6권)

양 날개 전법으로 페르시아군 격퇴

밀티아데스의 말에 설득된 칼리마코스는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벌이는 쪽에 표를 던졌다. 밀티아데스의 주장이 관철되자 반대했던 사령관들도 밀티아데스를 따랐다. 밀티아데스는 이른바 양 날개 전법으로 페르시아군과 맞섰다. 중앙부 쪽은 겨우 몇 개의 열만을 배치해 세력이 약했지만, 양 날개에는 충분한 병력을 배치해 놓았다. 오른쪽 날개는 당시의 관습대로 군사장관이 지휘를 맡았고, 왼쪽 날개는 플라타이아인이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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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더아버지 필립포스 2세는 마라톤 전쟁에 등장한 방진을 더욱 개발해 창 길이도 늘리고 256명이 열을 짓는 구조를 만들었다. 마케도니아 방진 모습

그렇게 진영을 짠 아테네군은 적과의 거리가 1.6km 정도 이르렀을 때 구보를 하면서 적진을 향해 돌진했다. 페르시아병사들은 아테네군들이 창과 방패만 달랑 들고 열을 지어 구보로 뛰어 오는 것을 보고 어이없어 했다. 아테네병사들이 아예 전쟁을 포기하고 죽으려고 달려드는 미친 사람들처럼 보였다. 그러나 병사들이 이렇게 앞으로 빠르게 돌진한 까닭은 페르시아 궁병들의 사정거리(약 162m)에서 빨리 벗어나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막상 양쪽 군대가 충돌하자, 그리스 병사들은 양 측면에서 페르시아의 군대를 쳐부수기 시작했다.

취약했던 중앙부는 페르시아군에게 밀렸다. 그러나 양쪽 측면에 있던 아테네군과 플라타이군이 승리를 거둔 다음, 양 날개를 합쳐 중앙 깊숙이 들어 온 페르시아보병을 협공했다. 측면에서 공격을 받은 페르시아보병은 다시 당황했고 분열하기 시작했다. 아테네군의 속도에 놀라고, 양 측면의 공격에 다시 놀란 페르시아군은 제대로 손도 쓰지 못하고 도망가기에 바빴다. 아테네군은 여세를 몰아 마라톤만에 정박해 있던 페르시아 선단 7척까지 나포하는 전과를 올렸다.

페르시아군은 마라톤평야에서 배로 퇴각한 후, 수니온 곶을 돌아 아테네를 직접 공략하려 하였다. 그러한 낌새를 알아챈 아테네군은 구보로 페르시아군보다 빨리 아테네에 도착했다. 아테네군이 조국을 지키기 위해 헤라클레스 신전에 진주한 것을 안 페르시아군은 결국 아테네 공략을 포기하고 다시 아시아로 귀환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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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르모디오스와 아리스토게이톤. 동성애 관계에 있던 두 사람은 애정문제에 얽혀 독재자를 살해했는데, 나중에 아테네인들은 민주정체를 회복하고 나서 이들을 민주정체의 상징으로 만들어 버렸다.
헤로도토스는 이 마라톤 전투에서 전사자 수는 페르시아 쪽은 6천400명이었고 아테네 쪽은 192명이었다고 전해준다. 마라톤 전투의 성과는 후대로 내려가면서 한껏 부풀려 지기도 하였다. 유스티니아누스(2세기 안토니우스 시대의 로마 역사가)는 페르시아의 원정군의 총병력을 60만으로 산정하고 20만 정도를 잃은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폴리스를 지키기 위한 시민정신

아테네 군이 마라톤 전쟁에서 적은 수의 병력으로 대병력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승리의 원인은 그리스인들의 생활방식에 기초한 특유한 전투조직에 있다. 그리스 병사들은 매우 값비싼 장비들로 무장한 중무장 보병들이었다. 그리스에서는 이러한 전투 장비를 국가에서 공급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모두 알아서 구해야만 했다. 따라서 어느 정도 경제력을 가진 시민만이 이런 장비를 구할 수 있었고 전투에 참여할 수 있었다. 물론 노예는 권리도 의무도 없었기에 장비를 구할 수 있다하더라도 전투에 참여할 수 없었다. 그리스에서 충분한 중무장 보병군대가 조직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재산을 가진 시민들이 많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투표권을 행사하는 시민들은 자기의 생활터전인 폴리스를 스스로 지키기 위해 스스로 전쟁터로 나가 싸웠다. 전쟁에 나가 싸우지 못하면 참정권을 얻을 수 없었다.

이러한 시민들로 구성된 그리스군의 전투조직은 중무장 보병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이들은 전투시 밀집대형을 이루어 공격을 했는데, 보통 밀집대형은 8열을 이루고 있는 긴 횡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밀집대형은 직사각형의 모습을 띠고 있었기 때문에 방진(Phalanx)이라고 불린다. 밀집대형을 유지한 채 그리스군은 앞으로 나가 적의 방진과 정면충돌해 그것을 깨부수곤 했다. 앞의 사람이 쓰러지면 다시 뒷사람이 열을 채우고 그렇게 해서 계속 적진이 무너질 때 까지 밀어부친다. 이 전투방식은 그리스인의 엄격한 규율과 협동 그리고 불퇴정신을 나타내며, 모든 시민의 평등에 기초한 정치제도의 특성을 반영한다. 그리스인들은 그들의 독특한 정치제도에서 민주적 원리를 적용했듯이 군사제도에서도 구성원 모두가 대등하게 참여하는 민주주의적 원리에 기초하여 시민군대를 만들었다.

마라톤에서 죽기로 싸운 아테네인에게 전쟁은 자신과 자기 가족의 자유를 지키기 위한 전쟁이었으며, 밀티아데스가 말한 것처럼 “자유인으로 살 것인가 노예로 살 것인가”하는 문제를 결정짓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다레이오스 왕이 마라톤 전쟁을 통하여 깨부수고자 했던 그리스인들의 자유분방한 생활방식은 오히려 그 전쟁을 통해서 더욱 더 확고한 토대를 얻게 되었다. 플라톤은 전쟁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새기고 있다.

“(마라톤에서 싸웠던) 이 사내들은 우리들의 육체적 아버지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자유의 아버지이고 이 나라에 사는 모든 사람의 자유의 아버지라고 나는 주장한다.” (플라톤, 메넥세노스 10, 240 C 241-A)

그래도 전쟁은 전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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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톤 전쟁이 벌어진 계곡은 위로 올라갈 수록 협곡으로 되어 있다.

플라톤을 위시해서 역사가 헤로도토스 등 그리스인들은 마라톤 전쟁을 자유와 전제의 대결로 해석한다. 그러나 아무리 전쟁을 “자유와 전제”의 대결로 해석하든지, 아니면 단순히 침략 전쟁으로 해석하든지 간에 전쟁은 전쟁이었다. 그 전쟁 속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죽음이 있고, 아픔이 있다. 나는 마라톤 협곡을 내려다보면서 그리스군만 아니라 묘지조차 없이 개들의 먹이가 된 무수한 페르시아군인을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 다음과 같은 핀다르의 시를 떠올렸다.

“전쟁은 달콤하리라
전쟁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만
전쟁이 가까이 다가 올 때
전쟁을 경험한 사람은
극도로 전율하리라
가슴 속 깊이”
(핀다르 단편, 110)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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