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수업

내 인생의 첫 수업 [20] 고은광순l승인2007.10.22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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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4녀 2남의 다섯째인 4녀로 태어났다. 내가 대 여섯 살이었을 때, 조그만 마당이 있는 집으로 이사를 갔다. 언니 오빠들이 모두 학교에 간 한가한 초봄의 어느 날 아침, 마당에 나가셨던 어머니가 나를 부르셨다. 그리고는 손가락으로 흙을 조금 헤쳐 내시고는 막 솟아나기 시작하는 어린 싹을 보여주셨다.

‘우와~.’ 날씨도 아직 쌀쌀한데 거무튀튀한 흙 사이로 돋아난 초록의 예쁜 새싹은 나를 깜짝 놀라게 했다. 나는 이 날의 감동을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것이다. (내 아이들에게도 그런 감동을 느끼게 해주고 싶어 수십 년을 벼르다가 어느 이른 봄날 산에 오르며 덮여있는 낙엽들을 헤치고 돋아나는 새싹을 보여주었다. 녀석들은 무덤덤한 시선으로 흘긋 보고는 바쁘게 눈길을 돌려버렸다. 이렇게 허망할 데가…)

초봄 새싹의 감동

외할머니와 어머니를 따라 가끔 절에 따라다닌 기억도 있다. 때로 학교에서 돌아오면 어머니는 스님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따로 요약해서 들려주셨다. “울지도 말고 웃지도 말아라”, “깊은 강물은 소리를 내지 않는다.” 이런 말씀들은 감정적으로 이리 저리 휩쓸리지 말고 언제 어느 때라도 고요히 중심을 잡으라는 것인데, 역시 오래도록 내 가슴에 남아 있다. 기독교 재단의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를 다녔지만 50살이 넘어 불교공부를 새롭게 시작하게 된 것도 어린 날 어머니가 맺어주신 인연 때문일 것이다.

내 밑으로 아들을 더 낳고서야 어머니는 마음 놓고 단산을 하셨는데 첫아들을 낳고 딸 둘을 낳자마자 아들을 더 얻기 위해 첩을 얻어야 한다고 아들(내 아버지)을 다그쳤다는 시어머니 의 영향 때문이었을까, 가부장적인 사회에 순응했던 어머니는 딸들에 비해 아들들에게 더 많은 신경을 쓰셨지만 딸 넷에게도 모두 대학 다닐 기회를 주셨다. 그런데 넷째 딸인 나는 얌전하게 공부만 하지 않았다. 70년대 후반, 긴급조치위반으로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고 있는 나를 면회 오신 어머니는 형사들이 편히 말하라며 모두 자리를 비키자 재빨리 눈을 꿈쩍거리며 허튼 소리는 하지 말라는 신호를 보내셨다. 물론 눈물 따위도 보이지 않으셨다.

자식들과의 인연

부모가 죽으면 큰아들이 기둥노릇을 하게 된다며 부모님은 맏자식인 오빠에게 심혈을 기울였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맏아들과 살기를 희망하셨던 어머니는 ‘오냐 자식, 호로 자식’이라는 말대로 아들에게서 편안한 대접을 못 받으시고 80세이 넘은 지금, 막내딸인 내 집에서 살고 계신다.

자식을 오냐 오냐 키워봤댔자, 딸 보다 아들을 더 귀히 여기고 더 많은 투자를 해 봤댔자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어머니는 보여주고 계신 것이다. 아무렴, 자식은 그저 건강한 몸과 마음을 갖게 키우면 그 뿐. 장성하면 몸도, 마음도, 경제적으로도, 법적으로도 확실하게 독립시킬 일이다. 부모 입장인 나 자신도 늙으면 몸도, 마음도 자식들로부터 확실하게 독립해서 거리를 조금 둔 채로 믿음과 사랑만 나눠야 한다고 마음을 다잡을 일이다.

신이 주신 귀한 선물

곧 85세가 되시는 어머니는 치매와 요실금증세로 하루 종일 종이기저귀를 하셔야 한다. 괄약근의 힘이 약해져 배변관리가 되지 않는 것인데, 나이 들어 벽에 똥을 칠하는 것은 자존심 때문에 나름대로 감추기 위한 노력을 하느라고 그러는 것이란다. 일회용기저귀가 환경을 오염시킨다고 하지만 사용하는 동안은 벽에 그림 그릴 일은 없을 터이니 노인의 인간적 존엄성을 지켜주는 일회용기저귀에 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다.

어머니를 보니 치매는 세상의 괴로운 기억과 남겨진 피붙이에 대한 걱정 없이 죽음을 맞게 해주는 신이 주신 귀한 선물이라는 것을 알겠다. 어머니의 수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고은광순 종교법인법제정추진시민연대 공동대표

고은광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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