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혈병이 내게 남긴 것

내 인생의 첫 수업[22] 강주성l승인2007.11.05 1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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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은 내 인생을 앞과 뒤로 뚜렷한 구분을 해주는 기준선이자 전환점이었다. 지난 1999년에 백혈병 진단을 받았으니 이제 다시 인생을 산 게 벌써 8년을 넘었다. 병이 걸리기 전에도 여러 변화의 계기가 있었지만 내게 있어서의 진정한 첫 수업은 병이 걸린 것이었다. 모든 사람들은 새로운 천년의 시대를 맞이하려고 난리를 치던 때에 나는 죽음을 선고 받았다. 그리고 여동생의 골수를 받아 반이 죽는다는 골수이식을 했다. 단지 ‘살기 위해서’였다.

금값보다 비싼 약값

골수이식을 했지만 이후 다시 감염으로 한쪽 눈을 잃어버렸다. 나이에 걸맞지 않게 몸은 10~20년이 늙어버렸고, 먹고 토하고 먹고 토하고 하는 과정을 수없이 겪었다. 머리카락과 손톱 발톱은 아기의 것으로 다시 자라기 시작했고 소아마비, 홍역 등 갓난아이가 맞을 예방주사도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
그리고 1년하고도 반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이미 골수이식을 했던 내게는 필요 없는 약이었지만 나와 같은 환자들에게 정말 획기적인 신약이 나왔다. 이 약의 이름은 ‘글리벡’이었다. 세상에 태어나서 그렇게 드라마틱한 효과를 보여주는 약을 이전엔 보지 못했었다. 사람들은 환호했고, 이제 살았다며 기뻐했다.
그러나 그 기쁨과 환호도 잠시 뿐. 환자들은 금보다도 더 비싼 약값에 절망하기 시작했다. 한 알에 2만5천원, 하루에 4알 먹어야 하니까 하루에 10만원, 한 달이면 300만원, 1년은 3천600만원, 3년이면 1억800만원을 내야 하는 것이었다. 이제 의학적 한계로서 죽는 것이 아니라 돈의 한계로 죽어야 하는 상황이 온 것이다. 환자는 누워 있고, 가족들은 먹고 살려고 다 생계 현장에 있기에 이 비싼 약값을 보고도 어느 누구 나서서 이 문제를 풀어보고자 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약값을 내리고 보험적용을 하라고 내가 앞에 나섰던 이유는 단 한가지였다. 모든 사람들에게 진 ‘빚’을 갚자는 마음, 그것이었다.

그리고 앞에 나서다

하지만 이 다국적 제약회사라는 거대집단과의 싸움이 매우 무모한 것이었다는 것을 아는 것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 싸움은 무려 3년이 걸렸다. 어떻든 그 결과로 약은 보험적용이 되었고, 본인부담금도 떨어졌다. 본인부담금에 해당하는 약값을 다시 제약회사로부터 환불받아 환자들은 이제 실제로는 본인부담금이 없이 약을 먹고 있다.
이 과정은 다시 나를 의료제도와 건강권 그리고 환자권리라는 주제에 대해 눈을 뜨게 만들었다. 건강이 왜 인권으로 자리 잡아야 하는지, 의료가 앞으로 어떤 체계를 갖추어야 하는지 고민하게 되었다. 지금 일하고 있는 건강세상네트워크는 그래서 만들었다. 모든 의료 문제에 대해 전면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조직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제 우리 조직은 보건의료에 있어서 힘 있는 단체로 튼튼히 섰다. 모두 병이 내게 선물해 준 것이다.
병은 내게 가장 강력한 첫 수업이었다. 이 수업을 받지 않았다면 나는 보건의료운동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병은 나를 질병의 ‘당사자’로 만들고 운동을 구체적인 삶의 영역으로 끌어들였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환자의 ‘관점과 입장’을 만들었다.

환자의 관점과 입장

그래서 나는 병이 시켜준 수업에 매번 감사한다. 글을 쓰는 이 순간도 자판과 화면이 가물가물 잘 안보이고, 눈물이 나오질 않아서 수십 번 인공눈물을 넣으면서 글을 쓸지라도 내게 백혈병은 이전과 이후의 삶을 구분 짓게 한 훌륭한 첫 수업이었다. 이렇게 살 것이라고 스스로조차 생각하지 못하게 했던 첫수업의 과목은 ‘백혈병에서 살아남기’였다.


강주성 건강세상네트워크 대표

강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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