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페르시아 전쟁의 격전지

철학여행까페[11]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l승인2007.11.12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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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희
다비드가 그린 테르모필라이 전투에서의 레오니다스 Jacques Louis David, 1814, Musee du Louvre, Paris

아테네에서 철학이 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또한번 모질고도 세찬 바람을 이겨내야만 했다. 마라톤전쟁에서 패한 다리우스 대왕의 아들 크세르크세스는 옥좌에 오르자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그리스에 대한 대복수전을 일으키기로 결심한다. 그는 전쟁에서 실패하지 않기 위해 보병 170만, 기병 80만에 달하는 엄청난 규모의 병력을 이끌고 그리스로 진군했다. 헤로도투스는 묘사하기를, 이 엄청난 규모의 병력이 물을 마시기 위해 대열을 멈추면 강줄기가 말라버렸다고 까지 했다. 크세르크세스는 엄청난 보병과 기병 이외에도 1천200척의 군함으로 구성된 대선단도 그리스로 향하게 했다.

영화 ‘300’의 배경 테르모필레

페르시아 보병은 오늘날 이스탄불이 위치한 헬레스폰토를 건너 그리스 북부 지역으로부터 내려 왔다.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싸워 볼 엄두도 내지 못하고 항복을 했다.

그리스와 페르시아가 처음으로 맞붙은 곳은 영화 ‘300인’의 배경이 되었던 데르모필레이다. 이 테르모필레는 뜨거운 통로라는 뜻이다. 나는 처절했던 테르모필레의 격전장을 찾아 그곳에 하루 머무른 적이 있었다. 밤늦게 그곳에 도착해 아침에 일어나 용변을 보고 호텔 화장실에서 물을 내리니, 변기에서 뜨거운 김이 솟아올랐다. 처음에 이곳에는 뜨거운 물로 변기를 씻나보다 생각했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것은 뜨거운 물이 아니라 바로 온천수였다. 테르모필레는 온천수가 흔한 지역이었다. 아직도 테르모필레에는 뜨거운 온천수가 솟아 바다로 향하고 있다.

그러나 기원전 480년에 이곳에서는 뜨거운 물이 아니라 뜨거운 피가 흘렀다. 스파르타의 지도자 레오니다스의 지휘 하에 스파르타 군인 300인을 포함한 4천명의 군사들이 이곳에서 엄청난 규모의 페르시아군대를 맞이했다. 페르시아군대는 태양이 가려질 정도로 수많은 화살을 쏘아댔다. 그 광경을 보던 스파르타 군인 한 명이 이렇게 말했다.

“잘 됐군, 오늘은 시원하게 그늘에서 싸우게 되었으니.”

크세르크세스는 고작 수천에 불과한 병력이 정말 자신의 대군과 맞서 싸울 것인가 하고 그리스에 정통한 고문관에게 물었다. 그러자 그 고문관은 이렇게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특히 스파르타군은 결코 항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이 인정하는 주인은 오로지 법률 뿐입니다. 그들의 법은 후퇴를 금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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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르타에 있는 레오니다스 청동상

크세르크세스는 수천 명의 저항에 부딪쳐 고전하면서 그리스 중부로 진군을 하지 못했다. 크세르크세스는 해군을 시켜 바다로 돌아 배후를 치려고도 했다. 그러나아테네군의 총사령관 데미스토클레스가 페르시아 해군과 격전을 벌이며 해협을 지켜 레오니다스가 이끄는 스파르타인들의 배후을 지키는 바람에 그 마저도 쉽지 않았다. 크세르크세스는 엄청난 손실을 입으며 계속해서 스파르타인들을 공격했다. 레오니다스는 그래도 퇴각하지 않고 그곳을 사수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러나 그는 그곳을 떠나기 원하는 사람에게는 탈출을 허락했다. 그와 함께 끝까지 남은 병사들은 스파르타 병사 300인이었다. 그들은 살아서 스파르타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가능하면 그들의 피와 살에 비싼 대가를 치르게 만들 생각이었다.

스파르타인 진영을 함락시키기 못해 고심하던 크세르크세스에게 에피탈레스라는 배신자가 나타나 스파르타군 진영을 우회할 수 있는 길을 알려 주었다. 후위에서 공격을 받은 스파르타군은 곧 전멸한다. 그러나 그들은 적에게 최대한 손실을 입히기 위해 방벽과 방패마저 버리고 마지막까지 처절하게 전투를 벌였다.

그렇게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300인 모두 다 장렬하게 전사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때 전투에서 모든 죽은 것은 아니었다. 1명은 전령으로 다른 데로 갔고, 다른 1명은 아파서 후송되었다. 그러나 테르모필레에서 모두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1명은 자살했고, 다른 1명은 다른 전쟁에 참가해 장렬하게 싸우다 전사했다.

페르시아인들은 테르모필레의 전투를 통해 죽음도 불사하는 스파르타인들의 용기와 투지를 경험하고 몸서리를 쳤다.

스파르타인들의 용기와 투지

테르모필레에서 승리한 페르시아군은 아테네를 향해 곧장 진격했다. 바다를 지키던 테미스토클레스는 함대를 이끌고 남쪽으로 퇴각했다. 남쪽으로 퇴각한 그는 아테네 시민들 대부분을 설득해 아테네 가까운 곳에 위치한 살라미스 섬으로 건너가도록 했다. 아테네는 곧바로 함락되었다. 아테네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페르시아인들에게 끔찍한 일을 당해야만 했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여러 사람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좁은 살라미스 해협 안으로 후퇴해 들어갔다. 크세르크세스는 지난 몇 주 동안 후퇴하는 그리스군대만 보았기에, 이제 아테네 함대가 독 안에 든 쥐처럼 생각했다. 그는 공격하기 전에 즉시 공격하는 것에 회의를 품고 있는 지휘관들을 불러 모아 그들의 의견을 들었다. 함께 전쟁에 참여했던 할리카르나소스의 여왕 아르테미시아 1세가 좀 더 참고 기다릴 것을 권고했다. 그녀는 살라미스 부군의 좁은 해로에서는 페르시아 함대의 수적인 우위가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이동희
테미스토클레스

크세르크세스는 함대를 일단 아테네 앞바다에 대기하도록 했다. 며칠이 지나자 초조해 진 크세르크세스는 생각을 바꾸어 그리스 함대를 공격하기로 했다. 페르시아 함대가 공격을 하자 그리스 함대는 좁은 만으로 계속 퇴각했다. 전 속력으로 추격해 들어 온 페르시아 함대는 좁은 해협에서 엉키며 서로 충돌했다. 재빠른 그리스 배들이 혼란에 빠진 페르시아 함대를 공격해 침몰시키기 시작했다.

크세르크세스는 가까운 산 정상에서 자신의 함대가 대패해 몰락하는 것을 지켜보아야만 했다. 그 후 1년 뒤, 스파르타의 파우사니아스 장군의 지휘로 그리스군은 플라타이아전투에서 또한번 페르시아군을 물리쳤다. 이렇게 해서 그리스와 페르시아 사이에 벌어졌던 전쟁이 끝났다.

전쟁 뒤 풍성한 문화·사상사 누려

플라타이아 전투가 끝난 다음 아테네는 사상이나 문화에 있어서 인류사에 찾아보기 힘든 풍성한 시대를 맞이한다. 이러한 시대는 전쟁에서 승리한 아테네인들이 자신의 체제에 대한 자신감과 우월감에서 비롯한다. 그것은 아테네인들만이 갖는 민주주의 체제였다. 이 민주주의라는 토양이 있었기 때문에 전쟁이라는 혹독한 바람을 거치고도 아테네에서 다양한 문화와 철학이 꽃이 피어날 수 있었던 것이었다.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 \'구스타프 슈바브 그리스로마신화\' 역자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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