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과 삶의 자세

내 인생의 첫 수업[23] 서순탁l승인2007.11.12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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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이면 내 나이 50살이 된다. 돌이켜보면, 20대에는 방황과 혼돈의 시기를 겪였고, 30대에 들어서야 무엇을 할 것인지를 정하고 준비하는 시기였던 것 같다. 그 결과 소망했던 전문가로서의 본격적인 연구와 사회활동은 40대 들어서야 가능했다. 이런 삶의 궤적에서 현재의 필자에게 크고 작은 영향을 끼친 분들이 많다. 이 가운데 가장 크게 기억이 나는 분 중의 한 분은 아무래도 유학시절의 지도교수가 아닌가 싶다.

연구기관의 연구원으로 일하면서 하루하루를 아무 생각없이 보내던 30대 중반의 어느날 불현듯 유학 결심을 하게 되었다. 모순으로 가득 찬 현실세계 속에서 너무도 무력한 나 자신을 들여다보게 되었고 무언가 돌파구가 필요했다.

현실세계를 바라보는 나만의 렌즈를 갖고 싶은 열망은 맨손뿐인 필자를 미지와 도전의 세계로 내몰았던 것 같다. 가진 것이라고는 사랑스런 아내와 어린 두 딸 그리고 전세금 3천만원이 전부였다. 늦은 나이에 가족들 고생시키면서 무슨 고생을 사서하느냐고 주위의 반대가 심했지만, 무모함에 가까운 용기 하나만으로 영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무기력한 필자의 일상을 뒤흔드는 지적인 자극이 있었다. 유학을 준비하던 어느 날 필자는 도서관 서고에서 관심을 끄는 몇 편의 논문을 접할 수 있었다. 이 논문을 몇 번이고 읽으면서 지적인 흥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곧바로 논문의 저자에게 편지를 썼다. 영국 뉴캐슬대학의 팻치 힐리 교수였다. 당신의 글을 통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그래서 당신과 함께 나만의 지적인 창을 만들고 싶다고.

당시에는 이메일이 없어서 일주일이 넘어서야 우편으로 전달되는 시기였다. 통상적으로 답장이 오려면 한 달 정도 걸리기 때문에 까마득히 잊고 있었는데, 답장은 예상 밖으로 2주일만에 왔다. 당신을 진정으로 환영한다고. 편지를 받자마자 그 즉시 답장을 한 셈이다. 이와 같은 상대에 대한 배려는 필자에게 또 다른 감동을 주었다. 당시 이미 다른 대학에 지원서를 냈으나 나의 선택은 분명했다. 이렇게 해서 힐리 교수가 있는 잉글랜드 북동쪽에 있는 대학에 가게 되었다.

영국에 도착해 힐리 교수를 처음 만나던 날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50대 중반의 지적이면서 친근감을 주는 얼굴로 한국의 첫 제자인 필자를 맞이했다. 마침 미국에서 방문한 교수와 함께 자기 차에 태우고 도시의 주요 명소를 소개해 준 것도 지금의 내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쉽지 않은 배려였다. 이러한 배려는 학위과정 내내 이어졌다. 매년 자신의 집에 우리 가족들을 초대하여 음식을 함께 먹으면서 일상의 일과 학문적 관심사에 대해 진지하게 대화하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영국에서의 지적인 경험은 지금의 나를 있게 한 토대가 되었다. 어렵게만 느껴졌던 제도주의적 접근과 분석방법을 이해하고 활용하는 데는 힐리 교수의 지도가 결정적이었다. 항상 웃는 얼굴로 대하며 자신의 어떤 일보다도 지도하는 학생과의 미팅을 우선하여 시간을 할애했고, 지도학생의 연구능력을 키워주는 자극과 지원을 아끼지 않으셨다. 이런 분을 지도교수로 두게 된 것은 내게는 행운이었고 주위 다른 유학생들의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필자는 학위란 의사소통적, 협력적 과정의 산물이라는 인식을 하게 되었고, 학위과정이란 현실세계에 대한 지적인 창(렌즈)을 형성하는 과정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 밖에도 연구를 수행하는 방법, 이론과 실제를 병행하는 강의방법, 연구소를 경영하는 방법도 힐리 교수를 통해 직간접으로 알게 된 것도 필자에게는 지금의 생활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학위논문을 성공적으로 마치던 날 힐리교수는 필자를 위해 학과에서 축하하는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이 자리에서 그 교수는 필자와 인연을 맺게 된 사연과 지도하면서 느낀 것을 학과 교수와 학생들에게 조목조목 얘기했다. 필자는 지금도 그 감동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 이후 필자의 생활은 대학에서 연구와 강의를 본업으로 하면서 동시에 시간을 많이 할애하지는 못하지만 시민단체 활동을 하고 있다. 이를 통해 유학시설 형성한 시각과 인식을 실천에 옮기려고 노력하고 있다. 간혹 그 시절을 떠올리면서 스스로 많은 반성과 질책을 하기도 한다.

불현듯 명예교수로 있으면서도 열정적으로 학문 활동을 하고 계시는 힐리 교수를 뵙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해가 바뀌기 전에 꼭 한번 찾아뵈어야겠다.


서순탁 경실련 토지주택위원장

서순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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