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마 ‘쫄조리’와 외국 ‘여행객’

민주화 열망, 요동치는 버마를 가다[1] 버마=이유경l승인2007.11.26 09:57

크게

작게

메일

인쇄

신고

언론자유 목말라하는 그들의 욕구
9월 항쟁 후 외인 사원 출입 경계

이유경 특파원이 돌아왔다. 어김없이 아시아 분쟁의 현장에서 글을 보냈다. 이번엔 민주화 열기로 뜨겁게 타오르고 있는 버마다. <시민사회신문>은 9월 항쟁 이후 다시 국제사회의 기억 밖으로 흘러가고 있는 버마의 이야기를 현지에서 생생하게 다시 들춰낸다. /편집자

이유경
랑군 시내 한 시장에서 과일가게 상인이 돈을 세고 있다. 기름값 인상과 경제적 빈곤으로 촉발된 9월 시위사태가 강경 진압되면서 랑군은 일상으로 돌아간 듯 하지만 구속과 공포 정치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지난 9월 말 외신 톱을 뜨겁게 오르내리던 버마 소식이 이제는 가느다란 줄기로 겨우 명맥을 유지하는 수준이다. 유엔특사 이브라임 감바리가 여기 저기 ‘왔다 갔다’ 하는 얘기. 그가 11월 13일 유엔안보리에서 ‘긍정적인 진전이 있었노라’며 현실과 동떨어진 방문 ‘성과’를 보고했다는 소식, 그리고 아웅산 수치가 4년 만에 당 간부들과 만나 "나는 군부와 대화할 의지가 있다"고 말했다는 10년도 더 묵은 뉴스. 이런 조루한 소식들이 이름값 하는 외신을 타고 있다면, 조국 민주화에 한 우물 파는 미즈마(Mizzima.com, 인도주재), 이라와디 (Irrawaddy.org, 태국주재) 등 버마 망명 언론들은 시시각각 벌어지는 구속사태 등을 보도하며 꺼져가는 불씨 살리기에 안간힘을 쓰고 있는 모양새다. 지난 수십 년간 보여 온 미얀마 뉴스의 사이클이 반복되고 있는 셈이다.

3년전의 기억

솔직히 말하면, 3년 전 버마 안팎을 처음 취재할 당시부터 나는 그만 버마에 조루해지고 말았다. ‘고상한’ 노선으로 한없이 무기력한 야당과 제아무리 버마 민주화를 지지한다고 떠들어대도 국익 최우선의 이기적인 국제사회의 본질을 알게 되었고, ‘민주세력’이라고 이름 붙일 만한 이들은 국경 밖으로 끝없이 탈출하거나 아니면 다 잡혀가고 없는 텅텅 빈 버마내부와 무장투쟁보다는 생존투쟁을 더 벌어야 하는 국경의 무장투쟁단체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뉴스도 운동도 없으니 내가 다시 그 땅을 딛을 명분도 없었다. 그렇게 3년 ‘버마 조루증’에 빠져있던 나의 뒤통수를 친 게 다름 아닌 ‘쫄조리’다.

이유경
11월 초순, 술레 파고다 안에서 승려들이 기도 중이다. 9월 시위의 중심이었던 술래 파고다 안에는 10월 까지만 해도 경찰들이 상주해 있었고 승려들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았다. 9월 시위 당시 승려들은 이곳으로 먼저 모여들어 시민들과 기도를 올린 뒤 그 무리를 끌고 거리 행진으로 나섰기 때문이다.
쫄조리는 버마의 국민신발이다. 버마내부를 여행해본 이는 알겠지만 교통경찰이나 총잡이 일부를 제외하면 모두 쫄조리를 신고 다닌다. 지난 9월 랑군 거리를 가득 채운 그 승려들도, 손 맞잡고 승려들을 감싸며 행진을 벌이던 수많은 시민들도 모두 쫄조리를 신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9월 27일 일본 저널리스트 나가이 겐지를 쏴 죽인 그 유니폼도 쫄조리를 신고 있었고, 그 총에 맞아 죽은 나가인 겐지도 쫄조리를 신은 채 저 세상으로 갔다.

"그 신발을 봐봐. 군화가 아니거든. 정식 군인이 아니라는 얘기지. 내 확신컨대, 감옥에 있던 범죄자들 사면해서 친 정부 민병대로 이용한 거라고."

버마-타이 국경도시 메솟에서 만난 한 버마 활동가는 쫄조리를 신은 그 총잡이가 정식 군인이 아니라고 아주 확신에 차 있었다.

아무튼 그 쫄조리를 신고 총격진압을 피해 허겁지겁 달아나던 발들과 술레 파고다 부근 여기 저기 선연한 핏자국을 말하고 있던 쫄조리들은 내게 국제사회의 외교놀음과 대표 야당의 ‘비폭력 평화’ 노선을 마음껏 이용해온 군부독재의 장난으로 수십 년 고달팠을 인생을 말해주고 있었다. 산발적으로 흩어져 있는 그 헌신짝들은 마치 ‘그 동안 너무 외롭고 힘들었어…’ 라는 유언을 남긴 채 꺼져 가는 것 같았다.

늦었지만 짐을 싼 게 10월 중순이다. "군인들도 다 빠지고 그림이 별로 없을 텐데…." 버마 내부취재를 앞두고 먼저 취재를 다녀온 한 기자에게 정보와 조언을 구했더니 그이는 이런 저런 정보 말미에 살짝 김을 뺐다.

발 빠른 움직임을 붙들어 맨 취재장비를 노려본들! 노트북 수리문제로 잠시 한국에 들렀던 나는 카메라도 렌즈도, 성한 물건이 한 개도 없었음을 알고 ‘장비굿’을 한 판 치루며 시간을 보냈더랬다. 그리고는 심상찮게 돌아가는 버마사태를 하루가 다르게 지켜보며 나의 조루했던 판단을 한없이 탓했다. 8월말부터 수상하던 버마를 나는 솔직히 우습게 봤다. 새로운 여정을 앞두고 늘 콩쾅거렸던 설레임보다는 역사적 현장을 놓쳐버렸다는 자괴감이 밀려온 것도 나의 조루했던 판단 때문이다.

그리고 10월 15일 난 뒷북을 치며 버마 땅에 2번째 입성했다. 공항에서 다운타운으로 이어지는 한적한 길을 지나 닿은 랑군 시내 다운타운은 여전히 쫄조리와 롱지(버마 전통치마로 남녀 공용) 두른 개미허리 남정네들로 분주했다. 그 기자의 말대로 그림은 별로 없었다.

이유경
랑군 강 다리를 건너는 사람들.
반가운 해후


랑군시 다운타운 XX번 스트리트. ‘내 호텔’에 이르니 가물에 콩 나듯 오고 가는 ‘여행객’을 호텔 직원들이 버선발로 나와 반겼다. 모조 아웅(가명)을 찾았다. 3년 전 내가 야당인사 2 명을 호텔로 모셔 인터뷰할 때 나의 뇌물을 먹었던 아주 친절한 호텔 직원이었다.

"싱가포르, 한국, 일본 어디든 가서 (이주 노동자가 되어) 일하면서 그 나라 여자와 결혼하고 싶어."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이주노동자를 꿈꾸던 그가 꿈을 이뤘는지 이따금 궁금했었는데 보이지 않는 그의 행방을 다른 직원에게 물어보니, 그는 꿈을 이뤄가는 듯 했다. 희망했던 세 나라 대신 말레이시아 (임금이 낮은 대신 브로커 비용도 덜 더는)로 떠났단다. 그리고 그 호텔에는 또 다른 이주노동자의 꿈을 꾸는 틴틴누(22, 가명)가 대기 중이었다. 11월 중순 두바이로 떠난다고 했다.

"나는 웨이트리스로 일할 예정이고, 돈을 모아 가급적 그곳에서 공부도 하고 싶어."

교사 월급 30달러의 나라에서 400달러가 넘는 거금을 챙겨 먹은 브로커의 약속대로 그녀가 두바이에서 진짜 웨이트리스로 일하길 바라지만 마음 한 구석은 왠지 불안했다. 레바논 수도 베이루트의 대형 슈퍼마켓에서 수없이 보았던 주인과 장보러 나온 아시아 출신 파출부들이 자동적으로 떠올랐다. 필리핀, 스리랑카 출신들이 대부분이며 그들은 하나같이 ‘나는 파출부다’ 라고 말해주는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그런 나라에서 "필리핀?" 하는 질문을 받으면 기분이 좋을 리 없다. 그 질문의 눈빛이 이미 내리 깔리거나 뭔가 껄덕대는 듯한 태도도 묻어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두바이, 레바논 등 중동 일부 부국들에는 버마를 포함하여 동아시아와 남아시아 출신 여성들이 대거 파출부로 일하고 있다. 반세기 군부 독재에 경제와 교육이 망가져버린 버마의 젊은이들은 한국, 일본, 싱가포르의 공장 노동자 혹은 중동의 파출부 혹은 ‘웨이트리스’로 떠나는 이주노동자의 꿈을 여전히 꾸고 있었다. 그 썰렁한 랑군 국제공항에도 중동의 대표적 항공인 ‘퀘타 에어라인’이 직항노선을 띄울 정도다. 틴틴 누와 같은 예비 이주노동자들을 실어 나르기 위해.

틴틴누의 행복한 표정을 한 켠에 새기며, 나는 그 옆에 앉은 몇 달 째 밥줄 안 잡히는 여행 가이드 민아웅(30, 가명)과 대화를 트는 걸로 4주간의 취재일정에 들어갔다. ‘나는 절대 저널리스트가 아니며 반드시 투어리스트다’ 스스로에게 단단히 입 조심을 일렀다. 버마 내부취재는 이렇게 신분위장을 하지 않으면 영락없이 실패하기 십상이다. 시위대에 박수를 보낸 사람들도 귀신같이 잡아가는 마력의 정부 덕에 주민들은 기자냄새를 풍기면 입을 굳게 닫는다.

때문에 아주 특별한 인터뷰 대상이 아닌 이상 그냥 순진한 여행객입네 해야 귀동냥으로라도 상황 파악을 할 수 있는 아주 지독한 언론 통제의 나라가 바로 버마다. 어차피 그런 이들의 이름은 전부 ‘영희’나 ‘철수’ 같은 흔한 이름으로 위장되고 그들의 목소리와 메시지를 전하는 데 주력하는 게 버마내부를 취재의 암묵적 원칙 같은 거다.

나는 우선 민 아웅을 내 가이드로 잡았다. 나도 그가 필요했고 그도 내가 필요했다. 그는 총명하고 의식도 있는 사내였다. 그 역시 시위에 열심히 동참했다.

"당신 기잔가?" 이 눈치 빠른 가이드가 얘기 시작한 지 5분도 안되어 내게 물었다. “아니 사설학원 영어선생이라니까.” 그렇게 안심을 시켰지만 그는 시시각각 "당신 참 호기심 많네" 를 연발했고 "나는 현지인 생활에 푹 빠져드는 좀 독특한 여행 매니아야" 따위의 ‘썰’을 주고 받으며 우린 친구가 되었다.

취재기간 내내 그는 나의 주요 정보원이었다. 그를 통해 시위 정국 당시 상황과 최근 상황을 때때로 브리핑 받았고, 내게 익숙해진 그는 이런 저런 많은 정보를 알아서 물어다 주기도 했다. "어제 말야, 정부가 각 타운십 짱에게 전화를 하고 그 짱이 가가호호 방문하며 10월 XX일 각 가정 별로 1명 이상 친 정부 시위에 참여하라고 통보했어" 따위의.

나는 9월 시위 사태의 중심이었던 사원(monastery, 단순 절이 아니라 승려들이 공부하고 숙식하는 공간이다)방문에 대한 과제도 그의 도움을 받아 도착한 첫날 치뤘다. 내가 기잔지 아닌지를 그가 눈치를 챘는지 말았는지 나는 떠나는 날까지 물어보지 않았다.

나는 3년 전 취재경험에서 배운 게 있다. 입을 굳게 닫은 버마민중들이 실은 언론자유에 얼마나 목마르고 외지인들에게 얼마나 털어놓고 싶은 얘기가 많은 지를. 사진 속 주인 없는 쫄조리들이 내 뒤통수를 친 것도 3년 전 그 목말라하던 그 얼굴들이 마구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호기심 많은 관광객?

그러던 어느 날 버마 제 2의 도시 만달레이에서 나는 랑군의 민 아웅에게 전화를 걸어 또 슬쩍 현지 분위기를 물었다. "그래 거긴 좀 어때, 넌 여행객 좀 잡았고?" "모두 위험한 요구만 해서 말야… 거절했어." "위험한 요구라니?" 그의 말인즉슨, 영국에서 온 ‘여행객’ 두 명이 자꾸 사원을 가자고 했단다. 그래서 거절했단다. 어이없게도 9월 대규모 시위 이후 사원은 버마에서 가장 ‘위험한 곳’이 되어 버렸다. 요주의 감시 대상이라는 말이다.

최근 승려들이 주도한 ‘항쟁 급’ 시위를 전후로 불교신자도 아닌 주제에 불교 사원 방문과 승려들을 미친 듯이 찾아다니는 그런 취재 길이 어디 나뿐이었으랴. 웃음을 한 바탕 터트리며 난 그에게 말했다.

"그 친구들도 나처럼 호기심 많은 가 보네"

버마=이유경 특파원

버마=이유경  @

<저작권자 © 시민사회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버마=이유경의 다른기사 보기

인기기사




여백
시민사회신문 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08288 서울특별시 구로구 새말로 93, 신도림태영타운상가2동 B105  |  대표전화 : 02-3143-4161  |  팩스 : 02-6737-1115  |   ingopress@ingopress.com
등록번호 : 서울 다 10706  |  등록일자 : 2013년 8월 26일  |  회장·논설주간 : 강상헌  |  발행·편집인 : 설동본  |  편집국장 : 양병철
후원계좌 : 국민은행 7788-01-04-375819 (시민사회신문)  |  청소년보호책임자 : 설동본
Copyright © 2007 시민사회신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