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지와 감세, 두마리 토끼잡기
동의하지 않은 사람이 많을지 모르지만 좀 과장해 말하면 경제학은 사상이다. 이번 대선정국의 '경제살리기’도 사실 사상에 가깝다. 1, 2등 후보의 경제공약을 뜯어보자. 규제 풀고 세금 내리면 경제 문제는 다 해결이다. 복잡하지 않다. 단순한 사상이다. 근데 이 후보들이 여기다 ‘사회안전망’까지 동시에 추구하겠다고 한다. 세금을 내리는데 복지까지 하겠다니. 세금만 내리겠다고 했으면 이번 기획은 준비할 필요가 없었다. 어느 선진국에서도 성공적으로 해내지 못한 ‘두 마리 토끼’ 잡기에 주요 대선주자들이 도전한다. 사회안전망 확보와 감세, 그들이 무한 도전을 진단한다. 비판 일색의 참여정부 사회안전망 확충이 나름대로 공을 들였는데 왜 실패할 수 없었는지도 함께다./ 기획취재팀 |
시민사회 “앞 뒤 안 맞는 청사진”
“레이거노믹스 신화는 허상” 지적
국가채무 증가 및 양극화 심화 우려
대선후보들이 복지국가 복안을 내놓고 있다. 이번 선거의 정책에서 예년과 달라진 점은 보수진영 후보까지 적극적인 복지, 의료 등 사회안전망 공약을 내놓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에 소요되는 예산 확보와 자신들이 이미 내놓은 감세 공약이 병립할 수 있을 지에 대한 의문이 커지고 있다.
◇보수 진영의 적극적인 복지정책=이명박 한나라당 후보, 이회창 무소속 후보 등 보수진영의 후보들은 복지, 보건 등 사회안전망 확보를 위해 참여정부 수준을 유지하거나 보육, 교육 등 일부 부분에 있어선 오히려 사업을 확충하겠다고 밝힌다.
지난달 3일 발표한 한나라당 10대 기본정책에는 기초생활보호 대상을 점진적으로 확대하고 중증질환자에 대한 보장성을 강화하겠다는 내용 등 참여정부의 복지정책과 비견될 정도의 적극적 복지정책을 담고 있다. 의무보육시스템을 도입, 치매 중풍 등 노인관련 시설에 총 3조원을 투자하겠다고도 밝혔다. 이외에도 중증질환자의 보장성 확대 등 상당한 재원이 요구되는 정책까지 포괄하고 있다.
이회창 후보도 법인세 등 감세를 강조하면서 다소 추상적이긴 하지만 ‘맞춤형 복지’를 내세웠다. 그러면서 맞춤형 복지는 같은 돈을 쓰더라도 효과가 배가되도록 한 강력한 복지라고 밝혔다. 대표적인 복지 증가 항목으로 20만원 수준의 기초장애연금을 지급하고 기초노령연금도 대폭 확대한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이러한 예산은 어디서 확보할까. 한나라당은 법인세 인하 등 감세를 하지만 ‘불요불급’한 예산을 절감해 복지에 드는 최소 20조원 이상의 예산을 확보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경제성장으로 세수가 증대되면 감세분이 충당될 것이기 때문에 복지예산 확보에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
이회창 후보도 재정에서 10조원의 감세를 실시하고 각종 준조세도 대폭 줄이지만 정부예산을 효율적으로 집행해 부족분을 메운다는 설명이다. 특히 한나라당은 연간 7% 경제 성장으로 복지와 감세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다는 전략이다.
◇시민사회 “감세 복지 양립 힘들어”=이러한 보수 후보군의 복지 공약에 대해 시민사회는 실현가능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박완기 경실련 정책실장은 “법인세 등 감세를 주장하면서 기존 정책과 다수의 복지 공약을 나열하는 부분은 앞뒤가 맞지 않은 측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최영태 참여연대 조세개혁센타 소장도 “만일 한나라당이 주장하는 기초노령연금 65세 이상자 전면 확대는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재원이 소요될 것이다. 한편으론 한반도대운하를 실행에 옮길 경우 예상 사업비 14조가 충분한지도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 적지 않은 실정”이라며 “다행히 경제성장이 7%가 된다면 세입이 많아져 부족한 세출예산을 만회할 기회가 될 것이지만 현실적으로 7%의 경제성장은 쉽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경제학자들의 견해는=감세정책과 사회안전망 확보 양립에 대한 실물 경제학자들의 견해는 어떨까. 경제학자들 사이에도 논란은 존재한다.
주류경제학자들은 대부분 감세를 통한 경기 활성화가 복지 예산 증대의 도움을 줄 것이라고 강조한다. 부유층의 소비와 소득증대가 선순환 돼 전체적으로 부가 증가한다는 낙수(落水, trickle-down)효과가 작동한다면 정부의 전체 세수도 확대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급작스런 감세정책이 복지예산 등 사회안전망 확보와 양립할 수 있을까에 대해선 진보성향의 경제학자 뿐 아니라 중도적인 경제학자들도 조심스러운 전망을 내 놓는다.
중도성향이라고 평가받는 권영준 경희대 교수는 “감세는 나쁘고, 증세를 좋다는 식으로 이분법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박훈 서울시립대 교수도 “복지 등 사회안전망을 확보하기 위해선 정부의 재정수요가 늘어날 수밖에 없다”며 “감세를 하면 우선은 재정 수입이 줄텐데 이를 보완할 만큼 경기가 상승할지는 확실하지 않다”고 말했다.
◇감세론 ‘신화’ 레이거노믹스 그늘 주목해야=보수정치인들이 말하는 감세를 통한 경제성장과 그에 따른 재정확보 논리는 미국의 80년대 ‘레이거노믹스’에 기초한다. 비판적인 경제학자들은 보수정치권 뿐 아니라 신자유주의적 경제학자들이 그토록 감세를 강조하는 이유로 미국 레이건 행정부의 감세 정책에 의한 경기회복을 ‘신화’로 받아들인 결과라고 입을 모은다.
지난 1970년대 후반 주드 외니스키와 아더 래퍼 같은 공급중시론 신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은 세율을 낮춤으로써 폭발적인 경제성장을 불러일으켜 세입을 늘릴 수 있다고 주장했고, 이를 정책화한 레이건 행정부는 일정한 높은 경제 성장률을 기록했다. 레이건 집권기(1982~ 1990년)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3.6%를 기록해 직전 카터행정부의 성장률 1.8%에 비해 2 배에 이렀다.
하지만 미국 내에서도 레이건의 1980대 초반 감세정책이 사회전체와 재정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한 의견이 엇갈린다. 신자유주의 경제학의 대부 격인 밀턴 프리드먼 등은 경제성장률 상승을 이유로 레이건 정부를 옹호하는 입장을 취했었고, 폴 크루그먼, 조셉 스티글리츠 등 신케인즈주의 학자들은 레이건의 감세 정책이 80년대 ‘쌍둥이 적자’와 부의 편중에 직접적인 원인이 됐다며 미국사회의 어두운 그림자를 던졌다고 평가한다.
크루그먼 교수는 저서 ‘경제학의 향연’에서 “소득 불균형 확대의 주된 이유는 세전 수입의 불공평이 확대된 데 따른 측면이 강하다”며 “하지만 레이건의 세금 삭감은 최상위 고소득층의 가계에 대부분의 혜택이 돌아간 반면 사회적 지출의 대폭적인 실질 삭감을 야기시켜 빈곤층에 타격을 주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면서 “공급 중시론의 신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은 레이거노믹스가 부유층 세금을 삭감하고 그만큼을 중산층에 전가했으며 빈곤층을 쥐어짰다고 하는 주장에 격분한다. 그러나 실제로 바로 그같은 일이 일어났다”고 강조했다.
국내의 비판적인 학자들도 감세를 핵심으로 하는 레이거노믹스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은 무리라면서 감세를 통한 성장은 검증되지 않은 측면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조성대 한신대 교수는 “체감경기가 안 좋아 국민들이 어려움을 느낀다면 감세를 통한 성장을 강조하기보다 오히려 양극화를 완화할 수 있도록 사회안정망 확보에 우선해야 할 것”이라며 “OECD 가입국 가운데 사회안전망 예산이 최하위 수준인 우리나라에서 감세와 사회안전망이라는 두마리 토끼를 잡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감세, 오히려 국가채무 늘릴 것”=보수정치권에서는 이번 대선에서 참여정부의 실책 중 하나로 국가채무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김정훈 한나라당 원내공보부대표는 최근 "2006년 현재 국가채무는 282조6천억원으로 노무현 정부 4년간 국가부채가 150조원이나 증가해 역대 사상최고의 부채증가"라며 “후손들에게 재산을 물려주기는커녕 거액의 빚만 물려줘서야 되겠느냐"고 말했다.
하지만 미국의 경험을 비춰본다면 감세를 강조하는 보수정치권의 공약은 오히려 현재 국가부채를 늘릴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감세를 지속적으로 추진한 레이건 행정부 시절 미국 국가채무는 급속히 증가했다. 경제성장률이 지속적으로 상승했음에도 미국 연방정부는 1992년 GDP의 4.9%에 이르는 적자를 냈다. 이는 1981년 연방정부의 GDP 대비 2.7% 적자에 비해 2배 가량 상승한 수치다. 이에 대해 미국의 신케인즈주의 경제학자들은 적자 확대는 조세 수입이 감소한 것에 기인한다고 분석한다.
결국 비판적인 경제학자들은 감세→경제성장→세수확보→사회안전망 확충 논리가 역사적으로 실증된 적이 없다는 입장이다. 오히려 감세가 부채규모를 증가시킬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80년대 미국과 영국은 감세를 통해 일정 정도 경제 성장률을 기록했지만 국가부채가 늘고 사회안전망이 급격히 축소돼 부의 편중이라는 후유증을 얻었다. 그럼에도 현재 우리나라 보수정치인들과 신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은 감세정책을 경제 성장과 사회 안정의 만능키로 내세우고 있는 것이다.
유종일 KDI국제정책대학원 교수는 최근 한 기고에서 “사실 정치인들에게 감세정책만큼 매력적인 게 없다. 재정적자로 말미암은 폐해는 매우 간접적이고 장기적으로 나타나지만 우선 당장 세금이 줄어드는 사람들은 신이 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겉으로는 정부를 축소하고 낭비를 없애서 재정지출을 줄이겠다고 내세우지만 실제 구현은 쉽지 않기에 감세정책은 대개 재정적자로 이어진다”고 지적했다.
심재훈 기자
심재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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