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의 이상국가를 보았는가

철학여행까페[15]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l승인2007.12.10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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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철학의 고향 아테네 (4)

이동희
사라쿠사 원형극장

소크라테스 말고도 아테네는 플라톤이라는 불멸의 철학자를 배출했다. 영국의 저명한 철학자 화이트헤드가 이제까지 서양철학은 플라톤의 주석에 다름 아니라는 말을 할 정도로 플라톤 철학은 서양철학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 사실 소크라테스도 플라톤이 없었더라면 철학적으로 존재할 수 없었다. 플라톤은 스승 소크라테스의 언행을 하나도 빠지지 않고 꼼꼼하게 기록했다. 자신이 아파서 스승의 마지막을 보지 못했지만 그는 주변사람들의 증언을 토대로 마치 곁에서 목격한 사람처럼 소크라테스의 최후를 생생하게 기록해 놓았다.

그는 나중에는 아예 스승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자신의 철학을 전개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사실 어디까지가 소크라테스의 철학이고, 플라톤의 철학인지 구별하기 쉽지 않다. 이런 점 때문에 현대의 학자들은 소크라테스가 플라톤에 의해 가공된 인물이라고 까지 주장하기도 한다.

나는 플라톤의 흔적을 찾기 위해 아카데미아의 유적지를 찾아 본 적 있다. 플라톤 아카데미아는 아테네 시의 입구에 있다. 표지판이 있기는 하지만 표지판이 엉성해서 찾기가 어려웠다. 플라톤 아카데미아는 주택가 안쪽에 있었다. 플라톤 아카데미아를 처음 보았을 때 큰 기대와는 다르게 너무나 실망했다. 그냥 동네에 있는 방치된 작은 공원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웬 놈의 개들이 그렇게 많이 돌아 다니던지.

공원 입구에 플라톤 아카데미아라고 써있는 표지판이 없었더라면 그곳을 아카데미아라고 짐작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근처에 있다던 울창한 아카데모스 숲도 없었다. 공원 안으로 들어 가보니 아카데미아가 있던 자리에 흔적만이 남아 있었다.

이동희
플라톤 아카데미

현재 플라톤 아카데미아는 발굴 중이라지만 방치된 느낌이었다. 아테네에 갈 때마다 아카데미아를 들렀는데 전혀 나아진 것이 없었다. 2년 전에 방문했을 때에는 입구의 표지판조차 사라져 버려 그리스정부의 무관심한 태도에 큰 실망을 했다. 나는 2000년도에 ‘사진으로 보는 서양철학기행 1’을 쓰면서 그때 엘긴스 마블을 돌려달라는 그리스 문화부의 캠페인을 자세하게 소개한 적이 있다. 그러나 방치된 아카데미아를 보고 나는 그리스 정부가 과연 영국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파르테논 조각품인 엘긴스 마블을 돌려 달라고 요구할 자격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스 정부의 무관심

플라톤은 아테네의 귀족가문에서 태어났다. 플라톤의 본명은 아리스토클레스이다. 플라톤은 넓은 어깨 때문에 붙여진 예명이었다. 아버지 쪽은 아테네의 마지막 왕 코드로스의 후손이고, 어머니 쪽의 조상은 위대한 정치가요 입법자인 솔론의 동생 드로피에스이다. 플라톤은 귀족 가문답게 어렸을 적부터 정치에 꿈이 있었다. 실제로 플라톤의 외삼촌인 카르미데스와 크리티아스는 막강한 독재 권력을 행사했던 30인 참주의 일원이었다. 그러나 플라톤은 외삼촌과 정치적 견해를 달리했고, 정치 보다 철학의 길을 걸었다. 플라톤이 그렇게 바뀌게 된 것은 소크라테스의 영향 때문이었다. 소크라테스를 만나기 전까지 플라톤은 시를 쓰며 언젠가 정치가로 나갈 꿈을 가진 청년이었다. 그러나 청년들과 토론을 벌이던 소크라테스와 만난 뒤로 그는 그때까지 썼던 시를 모두 불태워 버리고 그를 따르기로 시작했다.

그렇게 소크라테스에게 철학을 배우던 플라톤에게 스승 소크라테스의 처형은 날벼락이나 다름없는 사건이었다. 그는 소크라테스가 처형된 뒤 정치적 박해가 두려워 아테네를 떠나 10년 이상의 세월을 여행을 했다. 우선 그는 삼년 동안 아테네와 이웃도시인 메가라로 갔다. 그는 계속해서 키레네, 타렌트, 이집트 등을 여행했다. 그는 이 시기에 철학적 대화록을 작성하기 시작했고 그 속에서 소크라테스의 철학을 재현했다. 그는 소크라테스의 부당한 판결을 보고 당시의 모든 국가제도들을 비판하고, 철인이 통치하는 이상국가론을 쓰게 된다.

플라톤은 아테네에서 이탈리아 남부에 있는 시라쿠사이를 세 번이나 방문했다. 플라톤은 시라쿠사이를 방문해서 자신의 구상했던 이상 국가를 실현해 보려했다. 시라쿠사이를 방문하기 전에 이미 플라톤의 명성은 상당했던 것 같다. 그는 시라쿠사이에서 당시의 참주 디오니시오스 I세를 통해 이상적인 국가 건설을 하려고 꿈꾸었다. 그러나 디오니시오스 I세는 플라톤이 기대했던 그런 도덕적인 지배자가 아니었다. 환락에 취해 사는 전형적인 독재자였다. 플라톤이 디오니시오스 1세를 비판하자 그는 플라톤을 노예로 팔아 버린다. 마침 노예시장에서 키레네학파의 소크라테스주의자 아니케리스가 플라톤을 발견하고 그를 사서 해방시켜 준다. 플라톤은 아테네로 돌아온 후 아니케리스에게 그 돈을 갚으려 했다. 그러나 그가 받지 않자 결국 그 돈으로 아카데모스 신전 근처의 땅을 사서 기원전 387년에 아카데미아를 세웠다. 이 아카데미아는 거의 1천년간 존속되다가 서기 529년에 동로마 제국의 황제 유스티아누스에 의해 폐지되었다.

철인통치 이상국가를 꿈꾸다

플라톤은 디오니시오스 I세가 죽고 아들 디오니시오스 II세가 젊은 나이에 참주가 되었을 때 다시 한번 시라쿠사이를 방문했다. 플라톤의 지지자이자 친구였던 디온이 젊은 참주에게 철인 통치자의 사상을 심어 주도록 플라톤을 스승으로 모셔오도록 설득해 가게 된 것이다. 그러나 젊은 참주는 아버지와 별반 다를 것이 없었고, 플라톤의 철학에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젊은 참주는 외삼촌인 디온마저 국외추방시켜 버렸다. 플라톤은 디온을 도우려 했지만 제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아테네로 되돌아 와야만 했다. 젊은 참주는 삼단노의 전함을 보내 스승이 원하는 바를 들어주겠다며 다시 초청했다. 주변의 권유와 친구 디온 마저 권유하자 플라톤은 젊은 참주를 가르치기 위해 나이 66세에 또 다시 시라쿠사이를 방문했다. 그러나 그는 참주가 전혀 바뀌지 않은 모습에 실망해 아테네로 도망치듯 귀환했다.

이동희
플라톤 아카데미 입구

나도 플라톤의 여정을 따라 시라쿠사이를 방문한 적이 있다. 오늘날에도 시라쿠사이 방문은 쉽지 않다. 나는 아테네에서 시라쿠사이가 있는 시칠리아까지 가는 배편이 없어 우선 이탈리아 남부로 가서 시칠리아로 갔다. 하루가 넘게 걸리는 꽤나 먼 거리였다. 아테네에서 시라쿠사이까지 가는 여행은 당시로서는 장난이 아니었다. 플라톤은 죽음의 카립디스 소용돌이까지 넘어갔다고 하지 않은가.

플라톤이 목숨을 걸고 세 번에 걸쳐 시라쿠사이를 방문한 것은 자기의 이상국가론을 실현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플라톤은 자신의 저서에서 지구상에 완전한 국가가 실현될 수 있는 장소가 “아무 데도 없다”라고 말을 했다. 그러나 그가 꿈꾸었던 완전한 이상국가의 실현은 완전하고 정의로운 질서에 따른 공동체에 대한 인간의 염원을 대변한 것이었다.

1천년 이상 지속된 철학

플라톤은 여든한 살을 채우고 어떤 결혼식 연회장에서 숨을 거두었고, 영웅 아카데모스 숲에 묻혔다. 그러나 내가 아카데미아를 방문했을 때 플라톤의 묘는 찾을 수가 없었다. 비록 그의 묘도 이제는 찾을 수 없고, 그가 설립했던 아카데미아가 황폐하게 방치되었어도 그의 철학은 1천년이상이나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지금도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 \'구스타프 슈바브 그리스로마신화\' 역자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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