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섬유’라 불리는 석면에 노출돼 숨진 노동자에 대한 손해배상 판결이 나왔다. 이번 판결은 석면 제조회사에 다녔던 노동자가 석면 노출로 인한 악성중피종으로 사망한 것과 관련해 사용자였던 제조사의 안전의무 소홀 책임을 물어 손해배상을 인정한 국내 첫 판결이다.

환경단체들은 재판부의 전향적인 판결을 환영하는 한편 “석면 질환의 잠복기가 10~40년에 이르는 만큼 향후 피해자가 급격히 늘어날 전망이어서 ‘석면대란’에 대한 역학조사와 대책이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석면회사 잘못 인정=대구지방법원은 지난 4일 석면 제조회사인 J화학에서 2년동안 근무하다 석면에 노출돼 악성 중피종으로 숨진 원점순(당시 46세) 씨와 그의 유가족이 회사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 “피고는 원고에게 1억6천만원을 배상하라”며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제조사가 석면의 위험성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음에도 작업장에 방진·집진 시설을 제대로 가동하지 않았고 방호장갑이나 방진마스크 등의 안전 장비를 제대로 지급하지 않았으며 석면 노출로 인한 안전교육을 실시하지 않는 등의 과실이 인정된다”고 판결했다.

지난 1976년 2월부터 2년동안 석면을 원료로 석면원단을 만드는 J화학 방적부에서 일했던 원씨는 2004년 7월 삼성서울병원에서 석면 노출에 의한 악성중피종 진단을 받고 산업재해 인정을 받았다. 2005년 5월 원씨와 그의 가족들은 회사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으나 지난해 10월 재판 도중 원씨는 사망했다.

◇1급 발암물질…내년부터 금지=세계보건기구(WHO) 국제암연구소(IARC)는 석면을 1급 발암물질로 규정하고 있다. 석면은 악성중피종, 진폐, 폐암 등을 유발해 매년 세계적으로 10만명이 사망하고 있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일본에서는 지난해 한해에만 3천여명이 석면으로 인한 악성중피종, 석면폐증, 폐암으로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구보타 파동’이 대표적이다. ‘구보타 파동’은 석면을 원료로 건축자재를 생산하는 일본 효고현의 구보타 회사가 1978년부터 2004년까지 전현직 직원과 하청업체 직원 등 석면 관련 질병으로 사망한 79명과 치료중인 18명, 악성중피종이 발생한 인근 주민 3명에 대해 2005년 6월 위로금을 지급한 사건이다.

‘악성중피종’은 발병후 6개월에서 1년사이 대부분 사망하며, 아직까지 치료법조차 없다. EU를 비롯 일본, 호주 등 40개국이 이미 석면 사용을 금지했다. 뒤늦게 우리나라도 내년부터 석면제품에 대한 제조·수입·사용을 단계적으로 금지했다.

◇우리나라 ‘석면 대란’ 시작=‘악성 중피종’은 10~40년에 이르는 긴 잠복기를 거쳐 나타나기 때문에 60~70년대 석면을 많이 쓴 나라에서는 지금부터 본격적으로 사망자가 나타날 것으로 예상된다. 그 대표적인 나라가 우리나라다.

지난 달 환경부 국정감사에서는 석면공장 노동자뿐만 아니라 인근주민들도 악성중피종 집단 발병 가능성이 있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단병호 민주노동당 의원이 부산대 의대 강동묵 교수와 함께 전국 46개 석면제조업체와 최근 10년간 악성중피종 발병 환자 2백여명을 대상으로한 조사에서 17.3%가 석면공장 반경 2km 이내에 거주했던 이들인 것으로 나타났다.

◇역학조사 등 대책 시급=지난 7월 정부는 ‘석면관리종합대책’을 내놨다. 하지만 정부는 “석면제조업체 인근 주민건강피해에 대해 내년부터 기초조사를 하고, 2009년부터 실태조사를 한다”며 역학조사 조차 차일피일 미루고 있는 실정이다. 주책임부서였던 노동부 역시 석면공장의 위치나 노동자들이 얼마나 근무했는지 그 수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노동부는 석면에 노출된 일부 노동자들에 한해서 석면수첩을 발급해 정기적인 건강검진을 받도록 하고 있다. 하지만 발급기준이 3년이상 근무한 이들로 정하고 있는데, 이는 2년동안 일한 원씨의 경우를 본다면 시정해야 할 부분으로 지목되고 있다.

최예용 시민환경연구소 연구위원은 “지난 7년간 석면으로 산업재해를 인정받은 사람은 46명 뿐이다. 석면으로 인한 질환이 결핵이나 늑막염과 같은 다른 질환으로 오진 가능성이 많다는 지적도 있다. 앞으로 석면피해가 환경성 피해의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산업보건분야의 체계적인 진단 절차를 마련해야 한다”고 밝혔다.

한편 환경운동연합과 원진노동환경건강연구소, 민주노총 등 환경단체와 노동단체는 지난 달 초 부산에서 열린 석면심포지엄에서 ‘석면추방전국네트워크’를 결성하고 석면추방운동을 펼치기로 했다. 이들 단체는 이번 판결을 계기로 석면피해자와의 가족모임을 제안하고 석면피해자 발굴과 국제단체들과 연대를 통해 아시아 차원의 석면피해 추방운동을 전개할 계획이다.

이향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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