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 시린 청춘의 흔적

내 인생의 첫 수업[27] 김성희l승인2007.12.17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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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삶을 지탱해 주는 ‘당신 삶에서 가장 빛나던 시절은 언제인가?’ 내 삶의 눈부시게 화창했던 봄날, 내 인생의 '화양연화(花樣年華)', 아련히 아름답던 또 돌이켜보면 안타까운 그리움으로 되돌아보는 그 때 그 시절…. 찌릿찌릿 전율이 느껴지던 한 때일 수도, 눈이 시리도록 슬픈 그 때일 수도 있다. 연애의 느낌이자, 삶의 박동 자체이다.

서두를 속임수로 시작한 듯 미안한 느낌도 든다. 삶을 향한 첫 연애의 감정을 갖게 된 때, 내게 그 시절은 고등학생 때다. 대학생이던 형이 친구들과 ‘동일방직 똥물사건’과 계속되는 강제철거 사건을 화제로 분을 터트리던 걸 살짝 끼어들어 듣곤 했던 70년대를 지나, 정말 큰 일이 생겼다는 걸 두런두런 나누는 말로 알게 된 80년도이다. “바람이 빵 봉지를 휙 날리던 날, 코트 깃을 세우고 손을 주머니에 푹 찌른 채 잔뜩 움츠리고 지나가는 사람”에게 소시민의 이름을 붙이곤 나의 미래를 대입하고 고개를 가로졌던 때다. 감상과 치기가 곁들여진 의식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했던 거다.

‘전논’(전환시대의 논리)과 ‘우이’(우상과 이성), ‘7억 인과의 대화’(6억으로 봤나 8억으로 봤나)와 함께 한국 근현대사나 중국사 관련 학술서와 계간지, 문학평론을 통해 세계관을 세웠던 형들을 가랑이 찢어지게 따라하려 했다. 버스 탈 돈 아껴가며 형들이 사 모은 책들을 마구 집어 펼치려다, 자칫 오독과 자만으로 그르칠까 싶어 주저앉히는 타이름 탓에 한번 바람난 지적 욕구를 당시 웬만한 집에는 다 있던 한국문학전집과 세계문학전집 섭렵으로 채우기도 했다.

개신교 집안 태생이라 착실히 교회를 다니던 때, 학생예배 마치고 집에 오는 길에 교복 입고 성경책 낀 채로 포장마차에서 잔술 한두 잔을 청해 마시며 뭔가 허전함을 달래던 치기와 낭만 그러면서도 나름대로 고민의 시기였다. 사회과학적 인식과 리더십이 두드러진 둘째 형과 사색적이고 논리적인 셋째 형 사이에서 둘 다 섞인 듯 여겨지던 나의 정체성을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에 빗대면서도 내내 ‘이도저도 아니다’라는 고민을 품고 있던 때였다.

이 고민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이리저리 모색하다 결국 20대 말에 공부를 선택했지만 또 노동운동과 끈을 놓지 않았다. 가까운 동료들과 모색해 왔던 ‘현장과 학문의 만남’이라는 미완의 과제는 고등학교 때 이래로 이어지는 개인사적 필생의 과제라고나 할까.(말하자면 그렇다는)

고2 때인 80년에는 군부집단이 광주에서 시민을 상대로 살육을 벌였던 때이자, 2학기 때에는 학원자율화(1차)라는 유화책을 펴던 시절이기도 하다. 알아도 알은 채 못하던 그 때 유화국면을 맞아 본격적으로 사회를 바라보는 눈을 갖고자 일을 벌여나갔다. 가까운 친구들과는 별 문제될 게 없는 소설을 읽고 토론하는 독서클럽을 만들었다. 윤흥길의 소설 제목을 따 ‘무제’(霧堤)라는 이름으로 시작해 몇 해 후배들까지 이어갔다. 동인천의 가톨릭회관이나 도원동의 청소년회관의 소회의실을 빌려 쓰곤 했는데, 당시 순수문학과 참여문학의 논쟁 구도에서 어느 한쪽에 쏠리지 않았던 거 같다.

80년 광주를 알고 분한 마음은 당시 대학생들이 주로 보던 사회과학 책을 같이 읽는 모임으로 이어졌다. 1년 선후배들과 같이 시작한 모임의 이름은 한 선배가 제안한 ‘춘추지대’이다(아직도 그 뜻은 잘 모르겠다). 고압송전탑 사이로 철쭉이 만발하던 철마산 골짜기에도 가고 인천 도시산업선교회에서도 가서 모임을 가졌다.

당시 ‘산선’에는 고 김동완 목사님과 조화순 목사님이 계셨다. 김 목사님은 뭔가 생각 있다고 자부하던 우리에게 ‘너희들에게서 유신교육의 낙숫물 냄새가 느껴진다’고 하셨는데,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당시 동일방직 관련 수배 중이던 하종강 선생도 우리 모임 선배들과 만난 적이 있으다. 당시 나의 유일한 동기는 노동자수련회에서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려다 한창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해를 생전 활동하던 십정동을 바라보는 철마산 자락에 뿌리며, 나는 여전히 찬 봄바람에 떨며 세미나 하던 반대편 골짜기를 떠올렸다. 고압선 밑에 철쭉이 만발했던 곳. 나의 첫 수업은 저 골짜기에서 시작된 게 아닌가.


김성희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소장

김성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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