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모는 의리가 없어야 한다

이재영_독설의 역설 [29] 이재영l승인2008.01.07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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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쯤 전이던가, 어떤 이로부터 청년운동단체 이름이 새겨진 명함을 건네받았다. 그가 청년운동을 떠나 낙선 정치인의 비서 일을 한 지 오래되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요즘 진짜 하는 일은 뭐예요”라고 물었다. “생수 장사해요.” 순진한 나는 물이나 몇 통 팔아줄까 고민했었다.

몇 년 후 노무현은 청와대로 갔고, 안희정은 감옥으로 갔다. 안희정이 삼성에서 받은 돈을 노무현에게 전달했는지 아닌지는 별 관심이 없다. 당시 내게 들었던 생각이나 느낌은 안희정이 대신 감옥에 갔다는 것이었고, 일본에서 국회의원의 비리가 들통 났을 때 그 보좌관이 자살하곤 하는 일이 떠올랐다.

노무현도, 안희정도 그런 구닥다리 속물로 보이지 않았으므로 적잖게 실망스러웠다. 대통령과 그 가신들의 전근대적인 서로 감싸주기에 온 국민이 죽어난 것이 지난 5년이다.

학교에서는 ‘의장님’으로 무등을 타고 다니고, 정계에 나가서는 보스 뒤꽁무니에 딸랑거리는 386 국회의원들이 참 맘에 안 든다. 식사 후에 얼른 쫓아나가 다선 의원들 구두 챙겨주고, 등산길에 권노갑이나 한화갑 등산화 끈 묶어주는 꼴을 보고 있자면 구역질이 난다. 그런 자들이 국민의 잘 보살폈을 리 만무하다.

이명박 당선자의 핵심 보좌역이 정두언, 박형준 의원이라는 풍문에 그나마 안심한다. 그들이 관료 출신이라거나 학자 출신이라는 점도 다행이지만, 전형적인 386 학생운동권이 아니라는 점이 가장 다행스럽다.

하지만 아무리 정두언, 박형준이 있어봤자 한나라당은 한나라당일 테니, 우리를 실망시키지는 않을 것이다. 형님, 아우 따지고 두목, 부하 줄 세우는 건 민족주의 학생운동보다는 극우세력이 몇 수 위일 테니 말이다.

박정희 소장 이래의 군기, 더 거슬러 올라가자면 일제 군대의 상명하복 문화가 오늘의 한나라당에까지 면면히 흐르고 있으니, 앞으로 5년 동안 우리 국민은 이명박이 까라면 까야지 별 수 있겠는가.

나는 권영길의 참모들이 장기 설계를 잘못했다고 생각한다. 대선 후보도 좋고, 다음 국회의원 자리도 좋지만, 권영길에게는 권영길만이 할 수 있는 멋진 일이 있었다.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의 창립자로서, 존경받는 사회원로로서의 권력을 창출하고 관리하는 것이었다.

현실 정치를 모르는 말이라 반박하겠지만, 골프 치며 내뱉는 김종필의 한 마디가 정치권을 뒤흔드는 것은 그가 현실 권력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다. 80년대의 김수환 이후 누가 그 역할을 하고 있는가? 권영길은 그에 가장 근접한 사람이었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이지만 권영길의 참모들은 이제 그에게 세배 올 사람이 몇이나 남았을까를 따져보아야 하고, 뼈저리게 책임져야 한다. 권력은 제도나 지위에서도 나오지만, 제도나 지위는 권위나 존경으로부터 형성된다. 권영길의 참모들은 권영길로부터 그것을 빼앗았다.

어리석기는 노회찬, 심상정의 참모들 역시 마찬가지다. 생길지 안 생길지도 모르는 정체 불명의 진보신당에게 노회찬과 심상정의 다음 번 국회의원 자리를 내맡기는 것이 지극히 비합리적인 것처럼 보일 테지만, 지지자들이 빠져 나간 민주노동당에서 노회찬은 노회찬이 아니고, 심상정은 심상정일 수 없다.

다음 번 총선에서 꼭 당선되어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민주노동당에 연연하는 것이라면, 민주노동당을 왜 만들었는지 되새겨 보길 바란다. 현직 국회의원인 노회찬과 심상정에게는 국회의원직의 유지가 ‘정치’이겠지만, 앞으로도 꽤 오래 권력의 유지가 아닌 권력의 창출이 진보정당의 ‘정치’일 수밖에 없다.

권영길의 다음 번 국회의원 자리가 대선에서의 성공을 대체할 수 없음에도 대체하려 했던 것이 권영길의 실패 원인이다. 그리고 지금 노회찬과 심상정이 걷는 길은 권영길의 실패한 노선을 답습하는 것이다.

국회의원이 국회의원의 자리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걸 막을 도리는 없다. 하지만 노회찬과 심상정의 참모들은 국회의원 비서로 채용된 것이 아니라, 진보정치운동의 활동가로 파견된 사람들이니 당연히 이해 충돌이 있어야 하고 이견이 노출되어 마땅할 텐데, 진보신당에 관련된 국회 쪽 소식은 오직 침묵 뿐이다.

참모는 참모여야지 본인 스스로 국회의원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 국회의원과의 의리 때문에 말을 삼가고 있다면 굳이 민주노동당에 남아 있을 필요도 없다. 국회에는 2천개 가까운 비서 일자리가 있잖은가.

‘민족 전통의 미풍양속’이라는 어른 공경도 좋고 관우, 장비의 의리도 좋지만, 현대 정치의 장에 수장에 대한 의리를 끌어들이는 것은 패덕이다. 수장이 아니라 인민을 섬기라는 민주주의가 성립된 이래 정치하는 사람끼리의 의리라는 것은 가벼이 여기면 가벼이 여길수록 훌륭한 일이다.


이재영 레디앙 기획위원

이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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