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과 공동체의 대립

평화운동가 김승국의 ‘공동체의 평화'[1] 김승국l승인2008.01.07 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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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인 의미의 공동체(community)는 인간의 공동생활이 이루어지는 일정한 지역, 특히 인간의 모든 사회적 관계가 이루어지는 지역사회를 지칭한다. 긴밀한 인간적인 결합을 갖되 영리를 추구하지 않으며 상호연대하는 기초적인 집단을 가리킨다. 따라서 혈연·지연·우정·박애 중심의 지역성·공동체 감정이 중요한 가치로 통용된다.

공동체의 지평

그런데 경제적인 의미의 공동체는 자본주의적 생산에 선행하는 사회의 봉건성이 강한 지역단체를 가리킨다. 사적 소유권이 확립된 근대사회 이전에, ‘토지의 사적 소유와 공동체에 의한 소유가 병존하는 상태’ 아래의 토지의 공동소유 단체가 공동체이다. 생산력의 발전이 낮은 곳에서 개인이 독립하기 어려웠던 전근대 사회의 중요한 생산단위로서 각각의 인간들의 필요 충족·생활 유지라는 최소한의 생존조건을 보증한 공동조직이 공동체이다.

사적 소유와 공동소유의 관계 또는 양자의 비중은 여러 조건으로 규정되어 있는데, 마르크스가 지적한 아시아적 형태·고전 고대적(古典 古代的) 형태·게르만적 형태 등 몇 가지 형태로 구별된다.

이와 같은 공동체가 존립하고 공동체를 구성하는 각 개인의 생존을 평등하게 보증하기 위해서는 구성원 상호간의 연대성·평등성이 유지되지 않으면 안 된다. 상호원조 의무를 진 공동체의 구성원은 엄중한 규제에 복종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공동체의 존립조건이 생산력 발전·생산 활동의 공동영위라는 경제적 요인뿐만 아니다. 공동체의 방위를 위해 구성원의 희생을 요구할 수도 있다. 개인의 자유가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억제?희생될 수도 있다. 이 때 ‘개인이 우선인가 공동체가 우선인가’라고 물을 수 있다.

왕태영 기자
지난해 7월 참여연대를 비롯한 시민단체들이 주관한 '나쁜 기업에 맞선 착한 소비' 캠페인 현장. 캠페인에 참가한 학생들이 이랜드의 비정규직 불법 해고 등 탄압에 항의하는 뜻을 담은 유인물을 나눠주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명제를 제기했는데 이 명제는 두 가지 차원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각 개인이 독립하여 자족적이지 못할 때 폴리스(Polis)가 상위이므로 폴리스라는 공동체가 개인보다 우선한다는 차원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럼에도 개인이 폴리스의 전제가 될 수밖에 없으므로 개인이 우선이라는 차원을 생각할 수 있다. 폴리스의 시민인 개인의 정체성(Identity)이 우선이라는 말이다. 개인의 정체성에 관한 의식이 만개한 근대에 들어와서 개인을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해졌다.

근대는 개인의 자기의식이 극한까지 발달한 시대이다. 개인의 자유를 주창한 홉스(Hobbes)의 사회계약설을 원점으로 삼아 (평등에 역점을 둔) 루소(Rousseau)의 사회계약설이 태어났고, 이에 대치되는 것으로 헤겔(Hegel)의 국가 유기체(有機體)설이 다른 쪽의 극점(極點)을 만들어 냈다.

통치(Government)의 정당성을 근거로 한 권위(Authority)의 원리와 공리(Utility)의 원리를 내세운 아담 스미스(Smith)는 중용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렇게 ‘개인’과 ‘공동체’의 여러 조합이 각각의 근대를 만들어 냈다. 이러한 세계는 (세계의 세포를 이루는) 개인을 최소 단위로 다양한 조직 내지 공동체-가족·집단·결사·조합 또는 회사·교회·자치체·국가·국가연합 등-를 이루고, 그 신경 계통 또는 순환기 계통으로서의 ‘시장’이 위의 공동체들을 상호 연결시켜 준다. 이것들은 다양한 ‘공동체’(community)와 ‘협동체’(association)를 이룬다. 이에 대응하여 개인 역시 다양한 존재로 있으며, 시장도 한결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게 아니다.

이와 같이 다양한 공동체 속의 다양한 개인이 다양한 시장구조에 대응하며 살아가는 생활세계가 평화를 창출(Peacemaking)할 수 있는가 아닌가의 여부가 중요하다.

개인-시장-공동체의 3자관계를 어떻게 엮어내느냐에 따라 공동체의 평화가 결정된다. 개인과 공동체의 중간에 있는 시장이 평화를 보장하면 개인도 공동체도 평화 지향적이 될 수 있다.

제 아무리 개인이 평화를 지향해도 (개인을 에워싼) 공동체와 (공동체와 대면해 있는) 시장이 갈등관계에 있으면 개인적인 평온에 그친다. 공동체의 평화로 나아갈 수 없다. 그러므로 개인의 평화에 앞서 시장과 공동체가 평화를 이룰 수 있는지를 검증하는 게 선결과제이다.

시장과 공동체

시장이 옛 공동체를 파괴하고 나타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자체가 공동체이다. 시장 자체가 공동체이지만 가설(假設) 공동체일 뿐이다. ‘가족을 존속시키며 시장의 저변·주변에 사회복지?노동조합?공제(共濟)활동이 평화롭게 배치될 것’이라는 가설(假說) 아래 가설(假設)된 공동체가 시장이다. 그런데 시장의 폭력성 때문에 평화로운 배치가 불가능해져, 위와 같은 가설을 충족시켜주지 못하는 ‘미완의 공동체’로 전락했다. 그래서 미완의 공동체인 시장을 ‘완결성(평화의 완결성)을 갖는 공동체’로 바꾸기 위한 개혁·진보·혁명적인 대안들이 쏟아져 나왔다. 사회주의 공동체론·협동조합론·협동체(Association)론 등이 대표적인 대안이다.

그런데 이들 대안은 ‘시장의 자유가 개인의 자유를 억압한 끝에 공동체가 약화되는 모순’을 완전히 해소하는데 까지 이르지 못했다. 특히 시장의 자유를 만끽하는 신자유주의 사회가 낳은 ‘10대 90’의 사회에서, 90에 해당되는 개인의 자유가 매우 협소해졌다. 이에 따라 10의 상층(上層)과 90의 하층(下層)이 어울려 공동체를 이룰 수 없게 되었다.

신자유주의의 중심인 ‘시장’과 (시장의) 변두리로 밀려난 ‘공동체’의 2항 대립이 악화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장과 공동체의 2항 대립’ 속에서 공동체의 평화를 보장할 수 없는 신자유주의를, 공동체론으로 극복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거래’와 ‘관계’

사람들은 시장에서 개별적인 거래를 할 때만 관계를 맺으며, 이를 벗어나면 서로 무관계(無關係)·몰관계(沒關係)의 개체로 되어 버린다. 그래서 그 이전까지 존재했던 공동체는 거래관계에서 외재적(外在的)이 되어 마땅히 무시당하는 존재로 밀려난다.

그 반면에 상업세계도 공동체에 대하여 외재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그리하여 시장과 공동체를 2항 대립의 관계로 생각하는 전통이 생겨났으며, 근대 경제학은 이러한 전통과 밀착되어 있다. 근대 경제학이 이론의 전제로 삼는 경제인(經濟人) 모델은 종(種)으로서의 인간이 갖고 있는 여러 가지 특질을 모두 하나의 개체 차원으로 분할하여 개체의 특질 속에 해소시킨다. 시장의 차원, 구매하고 구매되고 팔고 팔리는 차원에서만, 사람들이 사회적인 인연을 맺게 되므로 공동체의 원만한 형성이 불가능하다.

이와 같은 ‘시장과 공동체의 2항 대립’이라는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타자의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 공동체’가 요청된다.

타자의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 공동체

다시금 아리스토텔레스의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는 명제를 분석적으로 고찰해 보자. 사회 안에서 산다는 것은 복수의 타자(他者)가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사회생활 안에서 산다는 것은 인간이 단순히 무리지어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각자는 그 어떤 방법으로든 복수의 타자와 직간접적으로 서로 교제하고 교류한다. 그러나 어떠한 교제인가, 원활한 교제인가, 아니면 장애물이 있는가.

인간의 본질은 ‘사회적 동물이다’라는 것으로 끝낼 수는 없으며, 타인과의 교제가 원활하게 진전된다고 예상할 수도 없다. 사회성이라고 하는 원사실(原事實)을 원리적으로 철저히 생각해 보지 않으면 안 된다.

사람들이 집단 속에서 살고 있다고 하는 원사실은 결코 평화적이 아니다. 그것은 원초적 폭력을 내포하고 있다. 어떤 개인이 실제로 ‘거기에’ 존재한다는 것을 원리상 배제하며, 또한 타자가 실제로 ‘거기에’ 있다는 것을 폭력적으로 배제할 가능성이 있다.

존재한다는 것 자체는 이와 같은 원초적 폭력을 내포하지 않을 수 없다. ‘나’의 현존재는 ‘타자’의 현존재를 배제한다. 사회생활의 근원에는 복수의 인간적 현존재가 원초적 폭력에 의해 서로 배척하는 관계가 보인다.

질서나 제도는 그저 있는 것이 아니라 원초적 폭력에 직면하여 그 원초적 폭력을 억제하는 과정에서 생겨나온 것이다. 복수의 인간이 생존하고 있는 상태란 상호적대 상태이다. 17세기 서구사상의 용어를 빌려서 말하자면 ‘전쟁 상태’이다.

이것은 이미 질서를 갖는 집단 사이의 전쟁 상태가 아니라 질서 이전의 개인들 사이의 전쟁 상태이다. 그러나 상호적대 상태가 영속적일 수는 없다. 적대 상태가 해소되기 위해서는 두 가지 길밖에 없다. 하나는 공멸로 끝나는 경우이다. 또 다른 하나는 적대 상태를 만들고 있는 폭력의 압력, 배제의 힘을 어딘가 다른 곳으로 향하게 해 공멸을 방지하는 것이다. 그리고 보통은 사실상 이 길이 선택되고 있다.

인간은 상호배제의 폭력을 임의의 타인에게 집중시킴으로써 자신들에게 향하고 있던 폭력을 회피한다. 임의의 누군가에게 집단적 폭력이 집중될 때, 질서 형성을 위한 배제의 메커니즘이 작용하기 시작한다. 차별화라고 하는 질서 체계는 임의의 타자(‘우리’와는 다른 제3항)에 대한 배제적 폭력 없이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제3항 배제가 사회관계의 문법(질서의 규칙) 형성을 움직인다는 것은 그러한 사태를 가리킨다. 배제되는 제3항은 말할 것도 없이 폭력의 희생자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사회관계의 질서를 만들고 중심을 지닌 ‘시민사회’를 만들어내는 것은 희생자 만들기를 그 안에 내포하고 있다는 말이 된다.

비록 교묘한 형태이긴 하지만 배제된 제3항으로서의 희생자가 다른 사람들과 무관해지는 것은 아니다. 무관하기는커녕 역으로 다른 사람들의 ‘시민적 관계’를 형성하는 요인이 된다. 사람들은 희생자와의 관계를 매개로 해서 ‘배제되지 않은 운좋은 사람’으로서 서로 승인하는 것이다. 사회 또는 공동체의 구성원이 서로 자기 확인을 하기 위해서는 희생자 만들기에 공동 참가한 표시를 필요로 한다.(이마무라, 1999, 193-198)

김승국 평화만들기 대표

김승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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