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의 평화를 위한 이론

평화운동가 김승국의 ‘공동체의 평화'[2] 김승국l승인2008.01.14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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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 계열의 학자들이 고안한 공동체론에서 많은 시사점을 얻을 수 있다. 초기 사회주의자들(푸리에, 오엔, 푸르동, 크로포트킨, 페이비안 사회주의자)이 다양한 공동체 유토피아론을 제기했다. 이어 마르크스·엥겔스는 코뮌(Commune),협동체(Assoziation), ‘유적존재’(類的存在; Gattungswesen)를 통해 공동체의 평화를 창출할 수 있다고 역설했다. 마르크스의 주안점인 ‘공동점유에 입각한 개인적 소유의 재건’에 의해 평화 공동체의 가능성을 탐색할 수 있다.

사회주의 계열의 이론

초기 사회주의자들의 이론엔 공동체론의 요소가 비교적 강하지만 마르크스·엥겔스의 이론에는 공동체론의 요소가 상대적으로 약하므로 사회주의 이론 전반에서 공동체론을 추출해내기는 어렵다. 이러한 관점에 따라 사회주의 이론에 내재된 공동체론적인 요소를 설명하면서 평화 공동체의 가능성을 타진한다.

마르크스의 저작 곳곳에 산재해 있는 ‘Assoziation'이라는 말은 그 문맥에 따라 협동하는 일, 협동조합, 협동생활, 협동단체, 협동관계, 공동조합, 공동적 결합, 공동사회, 결합, 결합 사회, 결합체, 집단결합, 연합, 연합사회, 연합체, 결사, 협회, 조합, 연대, 단체를 뜻한다.

위의 20개의 뜻은 거의 모두 공동체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으므로 ‘Assoziation'론에서 공동체의 평화를 내올 수 있겠다.

시민사회신문 DB
지난 여름 레바논 파병을 반대하는 집회에서

마르크스의 Assoziation은 자유인의 연합, 자본주의의 노동방식인 통합노동(combined labour)이 아닌 연대노동(associated labour)을 수행하는 ‘노동자의 자유로운 결사’를 지칭한다.

Assoziation에서 자유롭게 결사하는 노동자의 ‘노동’은 'labour'가 아닌 ‘work'이다. 장시간 노동, 저임금 노동 등 좋지 않은 조건 밑에서 자본가의 착취에 그대로 복종하며 반노예적 상태로 하는 노동이 ‘labour'인데 반하여, 제작, 창작, 창조활동 내지 유희의 뉘앙스를 포함한 노동이 ‘work'이다. 따라서 labour에서 work로 탈바꿈하는 사회변혁이 없으면 (노동자가 대다수인) 공동체의 평화를 누릴 수 없다. 사회주의적 공동체의 평화를 보장하려면 필요노동의 극소화와 자유시간의 극대화 즉 labour의 극소화와 work의 극대화를 이룩해야한다고 마르스크는 강조한다.

공동점유에 입각한 개인적 소유

마르크스의 이론에 따르면, 자본주의의 본원적 축적의 폭력에 의하여 개인적 소유를 수탈당한 독립생산자는 끝내 노동력 밖에 갖고 있지 않은 프롤레타리아로 전락하고 빈곤의 축적을 가져온다. 그러나 폭력에 의하여 프롤레타리아에게 빈곤의 축적을 강요한 자본가 계급의 생산방식은 스스로 질곡에 빠짐과 동시에 노동자 계급의 반항을 불러일으켜 전쟁(혁명)의 계기를 유발한다. 전쟁의 계기를 유발한 자본가 계급의 자본축적은 프롤레타리아 해방의 계기를 가져온다.

이제 수탈당할 자는 독립적인 노동자가 아니라 자본가 즉 임노동자의 두목이다. 자본주의적 소유의 최후의 종(鐘)이 울린다. 본원적 축적에 의하여 개인적 소유를 부정 당하는 제1차의 부정이 끝나고 ‘수탈자(자본가)를 수탈’하는 제2차의 부정(부정의 부정)이 시작된다. 이 부정의 부정은 노동자의 개인적 소유를 재건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시대의 획득물, 즉 협업 및 토지를 포함한 모든 생산수단의 공동점유에 입각한 노동자의 개인적 소유를 재건하는 것이다.

이처럼 부정의 부정 단계를 거쳐 ‘모든 생산수단의 공동점유에 입각한 노동자의 개인적 소유를 재건’하면 공동체의 평화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Subsistence

‘Subsistence’는 원래 식량을 비롯한 생활용 기본물자를 가리키는 일반 용어이다.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 등의 경제학에서 ‘생활자료’로 번역되었다. 또 기층 노동자가 받는 ‘겨우 생존할 만큼의 임금 수준’을 말하기도 한다. 인류학 등의 분야에서 시장경제에 편입되지 않은 원주민족의 한계적인 자급경제 또는 그 생업을 나타내는 경우도 많다.

빈곤한 생활의 이미지를 띤 이 용어를 수정하여 심화한 사람은 폴라니(Karl Polanyi)라는 경제인류학자이다. 그가 1944년에 펴낸 ‘대전환’에서 ‘원래 상품으로 산출되지 않은 자연환경·인간·인간의 사회제도가 각기 토지·노동·화폐로 상품화되어 있는 근대사회의 특유한 허구(擬制)를 지적했다. 이것들이 상품으로서 시장 메커니즘에 종속됨으로써 자연이 오염·파괴되어 악덕·범죄 등의 혼란이 일어난다. 이러한 혼란 때문에 인간사회의 멸망을 걱정하게 된다. 그러므로 시장경제를 인간사회의 통제 아래에 두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폴라니는 역설한다. 이러한 주장의 전제가 되는 자연-인간의 관계(자연환경) 및 인간상호의 사회관계야말로 Subsistence의 기본요소에 다름 아니다.

폴라니의 영향을 강하에 받은 일리치(Ivan Illich)는 ‘그림자 노동’(1981)에서 시장경제에 의존하지 않고 토지에 뿌리를 둔‘인간생활의 자립, 자존’이 Subsistence라며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한다. 그리고 발전=개발(development)을 ‘Subsistence에 싸움을 거는 전쟁’이라며 비판한다.

일리치와 대화를 거듭하며 그의 비판자가 된 베르호프(Claudia von Werlhof), 톰젠(Veronika Bennholdt-Thomsen), 미즈(Maria Mies) 등의 독일인 페미니스트(Feminist)들도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의 ‘자본 축적론’(1913년)등에서 배운 ‘여성노동(가사)으로서의 Subsistence 생산노동’에 눈을 돌린다. 이들은 자본주의적인 가부장제에 바탕을 둔 세계화 경제의 대안으로 ‘Subsistence 전망'를 내걸었다.

폭력의 극복을 겨냥하는 평화학의 관점에서도 Subsistence는 중요한 개념이다. 필자 등은 생명의 존속, 재생산을 지탱하는 생명 유지계통(시스템)으로서의 Subsistence를 ‘개인과 집단이 그 본래성(잠재적 실현 가능성)을 다하고, 더 나아가 인류로서 영속하기 위한 조건 전체’라고 정의했다.

이와 같이 개발주의, 근대세계 시스템을 반문하는 페미니즘(Feminism), 생태(ecology)운동, 평화학과 연관을 맺고 있는 Subsistence는, 지구환경의 지속가능성 파괴, 세계화에 대한 대항개념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Subsistence의 가치를 지향하는 가운데 생태평화의 공동체를 만들어 낼 수 있다.

공동체의 경제학

‘공동체의 경제학’을 주창하는 주종환 교수는 다음과 같은 견해를 밝힌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며 사회 내지 공동체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는 본질을 갖고 있다. 고립된 개인이란 실제로 존재할 수 없고 반드시 어떤 공동체에 소속되어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고전학파 이론에서는 사유재산 제도가 절대적이고 개인이 마치 독자적 독립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 같이 가정하고 있다. 또한 마르크스의 경제학 체계도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전사회적으로 지배하고 있다는 가정 아래서 완전경쟁을 전제로 한 시장가격형성의 원리를 탐구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신고전학파와 맞닿는 면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현실의 경제는 가족공동체, 계급공동체, 지역공동체, 민족공동체 등 각종 공동체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그것을 무시할 경우에는 공동체에 의한 제제를 받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우리 경제의 현실이다.”

“마르크스의 노동가치 학설이나 한계효용 학설이나 모두 지극히 추상적 전제를 깔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마르크스의 노동가치 학설은 사회 전체가 자본주의화 되어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 이론이다. 그러나 현실의 경제사회에는 자본주의 생산양식과 전자본주의 생산양식이 혼재된 상태로 존재한다. 또한 자본가와 노동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농민과 자영업자가 있는가하면, 예속된 상태 아래 놓여 있는 사람들도 있으며, 독점자본가와 중소기업자가 혼재해 있다. 한편 한계효용학설에 있어서도 모든 소비자가 자기의 물질적 욕망의 극대화를 위해서만 행동하는 ‘경제인’을 가정하고 있지만, 이것 역시 지극히 비현실적 인간유형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인간은 효용의 극대화만을 추구하는 피도 눈물도 없는 존재가 아니다. 이웃을 돌보기 위해서 자기희생적으로 봉사하는 인간도 수없이 많다. 더욱이 이 두 개의 이론에 공통된 점은, 인간이 모두 어떤 공동체에 소속되어 있고 공동체를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독자적 독립적으로 행동하는 존재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현실적으로 개인은 결코 독립적 독자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어떤 민족공동체 또는 지역공동체에 소속되어 있는 가족공동체 안에서 태어나고, 그영향권을 벗어날 수 없다.”

“자본주의 사회의 기본적 계급관계는 ‘노동자 공동체’와 ‘자본가 공동체’의 대립관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 계급사회에서의 계급대립도 보다 상위의 보다 큰 ‘민족 공동체’라는 관점에서 보면, 같은 민족 공동체 안에서의 공동체 상호간의 대립이므로 그것은 결코 절대적, 비타협적으로 굳어진 관계라고 할 수 없다. 이 때문에 상이한 민족 공동체 상호간의 대립이 첨예화할 경우에는, 민족 공동체를 구성하는 하위의 계급 공동체 상호간에 일종의 융합과 협력의 관계가 형성되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 이르러 가족 공동체 안에서도 개인의 상대적 독립성과 독자성이 강화되고 있지만, 각 개인은 여전히 가족공동체의 제약에서 벗어난 존재가 아니다. 공동체는 가족 공동체, 계급 공동체, 기업 공동체, 촌락 공동체, 지역 공동체, 민족 공동체, 인류 공동체 등 순서에 따라 상위로 올라간다. 각급 공동체 내부에서는 공동체 상호간에 상극과 대립이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보다 상위의 공동체의 구성원이라는 점에서, 이들 사이에는 이익공동체 내지 운명공동체로서의 동족의식과 ‘공감’(sympathy) 내지 사랑의 원리가 지배한다. 그 밑바닥에는 ‘증여’의 원리가 자리하고 있다. ‘증여’를 주고받는 한, 공동체 상호간에는 평화와 사랑에 입각하는 공동체 원리가 지배한다. 인류학자들의 연구 성과들은, 상품의 교환관계가 ‘증여’의 발전된 형태이며 공동체 상호간에 평화와 사랑의 존재를 확인시켜 주는 요체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공동체적 교환(communal exchange)'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러나 평화와 상호증여의 원리가 결정적으로 훼손 받았을 때에는 상극과 대립이 발생하고, 심할 경우 사생결단의 싸움으로 번진다.”

“공동체의 경제학은 이제까지의 경제학의 이론적 유산을 소중히 계승하면서 그것들이 가지고 있는 약점과 그것들이 미처 보지 못하고 지나쳐버린 문제들, 특히 사회의 공동체적 성격과 그 공공성에 관한 인식을 바탕으로 한 사랑과 자비 그리고 ‘인간중심의 경제학’체계라고 할 수 있다. 이 새로운 ‘인간중심의 경제학체계’는 시장을 적대시 하는 것이 아니라 시장의 역할을 그런대로 인정하면서 시장이 어떠한 조건 아래서 공동체적 정의를 확립할 수 있고, 전체 공동체와 각 가족공동체 안에서 시장이 인간생활을 보다 풍부하게 할 수 있는 조건과 가능성을 탐구하는 이론체계여야만 한다.”



김승국 평화만들기 대표

김승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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