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뿌리라는 작은 희망

[시민광장] 김현l승인2008.01.21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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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5월에 묘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주민참예산제가 처음 실시되었다고 하는 브라질 포르뚜알레그리라는 도시를 방문했을 때다. 포르뚜알레그리 주민참여예산은 시정부 전체 예산의 10~20%를 주민들 스스로 편성하는 시스템을 말하는데, 올해로 벌써 20년째를 맞이하고 있다.

연초부터 동네 단위마다 예비모임을 통해 예산편성을 도란도란 토론하는 것이 일종의 전통이 돼버렸는데, 운이 좋게도 필자가 방문했을 때가 관심 있는 주민들이 모두 모이는 ‘지역총회’가 진행되는 시기였다.

토요일 오후, 롬바도 피네이로라는 지역을 찾았다. 우리 식으로 하면 마을 체육관 비슷한 곳에서 지역총회가 열렸다. 접수를 받기 시작한 오후 3시쯤에는 다소 한산한 느낌이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자 큰 버스가 몇 대 도착하고, 삼삼오오 주민들이 모이면서 순식간에 난장과 같은 왁자지껄한 시골 장터의 분위기가 연출됐다.

정식으로 등록된 인원만 800명이 넘었고, 아이들과 청소년, 지역정치인들, 진행요원들을 모두 합치면 족히 1천명은 넘어 보였다. 동네 모임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는 것도 의외였지만 진행방식과 주민들의 태도에 묘한 흥분을 느끼기 시작했다. 혼돈 속의 정연한 질서라고 할까.

연단 앞 쪽으로 시장을 비롯한 공무원들과 주민대표들이 앉았고 1천여명의 주민들은 그들과 마주 앉아 있었다. 주어진 시간이 되자 주민들은 하나 둘 나와 농성장 연설을 방불케 하듯, 혼신으로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한다. 자신의 주장이 담긴 플랜카드를 휘날리고, 공감하는 발언이 나오면 주민들은 주저 없이 함성과 박수로 화답한다.

공무원의 사업설명이 있을 때는 야유와 비난을 퍼붓기도 한다. 앞쪽에 있던 공무원들은 주민들의 발언들을 진지하게 받아 적는다. 차기 주민 대의원과 평의원, 동네에서 해결해야 할 우선순위의 사업을 결정한 후, 3시간 내외의 ‘지역총회’는 막을 내렸다.

폭풍과 같은 풍경이 한 순간 지나가면서, ‘권력은 주민에게 있다’는 허구와 같은 진실을 직접 체험했다는 생각에 다소간 흥분을 가라앉힐 수 없었다. ‘주민참여예산’이라는 제도가 갖는 가능성보다 그것을 자유롭게 운용하는 주민들의 힘을 똑똑히 목격했기 때문이다. 풀뿌리의 저력은 정태적일 수 없다. 사회를 변화시키는 토대이자 힘이며 동력이다. 우리에게는 포르뚜알레그리와 같은 풀뿌리의 저력은 없는가.

물론 우리 주변에도 자랑스럽게 소개할만한 풀뿌리운동 사례는 많다. 철암이나 동대문, 도봉처럼 도서관에서 뛰노는 아이들과 삶의 터전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려는 노력들이 있고, 대전이나 과천처럼 품앗이를 통해 사람과의 관계 맺기를 이어나가고 있다.

동네마다 가난한 아이들이 공부하고 쉴 수 있는 공간을 시나브로 만들어나가는 강북구 주민들의 사례도 우리 마음을 여미게 만들고, 약자들의 정당한 권리를 찾아주는 천안이나 관악의 노력도 잔잔한 감동을 선사한다.

역사와 사회적 맥락은 조금씩 다르지만 그런 사례들에 주목하는 이유는 몇 사람의 영웅 리더십만으로 만들어지지 않았다는데 있다. 포르뚜알레그리도 그렇지만 일상적으로 대면하는 동네 주민들이 사회를 만들어가는 주인공이었다. 풀뿌리들의 집단적 리더십을 곰곰 되짚어보게 하는 순간이다.

사업과 활동은 넘치는데 운동이 없다는 얘기가 들린다. 우리가 가진 운동의 철학과 가치를 현실에서 어떻게 실현시킬 것인가가 중요한 화두가 되었다고도 한다. 누구도 풀뿌리만이 희망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정치권력이나 제도만이 희망이라고 외치는 이도 드물다. 쓰러지지 않는 자전거처럼 여러 요소들이 균형을 맞춰야 한다는 것에 부정하는 이는 없는 듯하다.

그러나 과거를 반추해보면 풀뿌리라는 토대를 키우려는 노력은 상대적으로 부족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이야기하는 운동의 철학과 가치가 허공 속에 당위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생활 속에 체감할 수 있어야 한다면 작은 풀뿌리 영웅들이 도처에 산재해 있어야 한다.

너무나 다행스러운 것은 우리 사회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풀뿌리가 희망을 만들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희망은 나와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내 삶과 밀착된 관계라는 것을 풀뿌리는 보여주고 있다. 저 멀리 지리산에서, 삭막한 도시의 작은 동네에서 풀뿌리의 수다는 조금씩 커지고 있다. 나는 이것이 우리 사회의 희망 중에 하나라고 믿고 있다.


김현 풀뿌리자치연구소 이음 연구위원

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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