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내 인생의 첫 수업[31] 배병삼l승인2008.01.21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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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정치학을 공부해온 사람이다. 근 30년 동안 정치학도로서의 자의식을 놓지 않고 살아왔다.

몇 년 전 ‘논어’에 관한 주석서를 출간했을 때, 어느 언론은 “정치학을 가르치면서 동양고전을 주석한 독특한 이력을 가진 사람”으로 소개하였다. 정치학을 가르치는 짬짬이 여가활동으로 논어를 공부했다는 뉘앙스가 담긴 표현이었다. 틀린 말은 아니다. 여태 우리에게 정치학은 곧 서양학문의 대명사였기 때문이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그들의 가르침을 제대로 배우지도 실천하지도 못하였으니, 툭하면 스스로를 두고 ‘전근대적, 봉건적, 비과학적, 비합리적’이라는 조롱조의 표현을 자학적으로 내뱉곤 했던 터였다. 나 역시 그러하였다. 한데 어느 날 그 북극성을 기준으로 삼던 삶에 반전의 계기가 닥쳤다. 아니 ‘덮쳤다’고 표현하는 것이 옳으리라.

‘전복’으로 남은 광주의 기억

1980년 5월, 광주에서 일어난 살육 사태가 눈길을 내 발밑으로 돌리게 만들었다. 그 사태는 나에게 “미국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정부란 무엇이며, 민주주의란 무엇인가”와 같은 정치적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나아가 그것은 “나는 누구이며, 우리는 무엇인가” 또 “북극성을 바라보는 이 눈길은 어떠하며, 그걸 목표삼아 걷던 걸음은 옳은가”라는 방향성에 대한 의문들로 연쇄되었다. 당시 많은 젊은이들에게 그랬듯 나에게도 그것은 시(是)와 비(非)가 뒤집어지고, 호오(好惡)가 뒤바뀌고, 선악(善惡)의 기준이 흐트러지는 파천황의 계기였다.

학문적 맥락에서 보자면, 그것은 “이 땅에서 정치학이란 과연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곧 대학에서 배우던 서양 정치학과 시장통에서 통용되는 우리 현실정치 사이에 패인 골짜기에 주목하는 계기가 되었다. 내내 주눅 든 눈으로 선망하던 저 서반구에 뜬 북극성으로부터 눈길을 돌려 처음으로 나의 발밑을, 그리고 발걸음을 내려다보았던 것이다.

이 땅의 정치현상과 서구식 정치학 사이의 괴리가 나로 하여금 전통사상으로 이끌었다. 우선 한자와 한문을 배우는 것이 급선무였다.

하여 발을 딛게 된 곳이 유도회(儒道會) 한문연수원. 거기서 권우(卷宇) 홍찬유(洪贊裕) 선생(1914~2005)을 뵙고 유교경전을 배웠다. 선생님은 고전을 대함에 있어 “한 글자도 빠트리지 말고, 한 마디 말도 섞지 말라”는 가르침을 주셨다. 텍스트에 대한 정밀한 이해를 북돋고, 해석의 남발을 경계하게 하셨다. 한자를 낱낱이 헤아린 다음에야 문장을 해석하는 습관은 거기서 익힌 것이다.

고전을 보며 현실을 짚다

하나 배운 것은 글만이 아니었다. 실은 사람이 꽃보다 귀한 존재임을 몸소 보여주시던 태도에서 더 큰 배움을 얻었다. 자식보다 어린 학생들을 늘 손님처럼 대하던 몸짓이며, 선생님으로 인해 조촐하면서도 따뜻하던 서당의 주변은 ‘매력’이라는 힘의 요소를 깨닫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나아가 매력을 기초로 세계평화를 구상한 것이 유교사상임도 발견하게 되었다.

즉 근대서구 정치학의 기초인 권력과 폭력, 그리고 개인의 욕망을 기초로 건설된 자본주의 세계를 ‘넘어서는’ 비전을 선생님의 삶의 태도에서 보고 배울 수 있었다. 선생님께 배운 이 ‘태도’야말로 유교적 인본주의가 오늘날 창궐하는 자본주의 너머 새 세계를 건설할 정치철학적 토대가 되리라는 확신으로 이어졌다. 나는 지금도 이 확신을 바탕으로, 동양사상과 전통적 삶에 기초한 공동체의 꿈을 꾸고 또 글을 쓴다.

그러므로 몇 년 전 논어를 주석한 내가 정치학을 공부하면서 동양고전을 출간한 독특한 이력을 가진 사람일 수는 없다. 도리어 해방 이후 60년이 넘도록 이 땅의 수많은 정치학자들이 연구대상으로 삼지 않은 것이 이상한 사태일 따름이다.

정치학을 가르치면서 여가삼아 논어를 공부한 것이 아니라 마땅히 논어 속에서 우리 정치학의 틀을 헤아려 보아야 할 일을, 뒤늦게야 시도해 보았다는 표현이 옳으리라는 것이다. 홍찬유 선생님을 뵙고 배운 글과 삶의 태도가 내 삶을 바꾸었다.


배병삼 영산대 교수

배병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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