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반은 없어야 한다

색깔있는 역사스케치 [26] 정창수l승인2008.01.28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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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양반은 없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조선시대의 양반은 세습계급이 아니었다. 적어도 조선 초기까지는 그랬다. 조선의 양반은 과거에 합격해야만 관리가 될 수 있고 양반신분도 유지할 수 있었다.

고려의 귀족사회에 비해 조선은 능력을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과거에 급제해서 재상이 된 맹사성 같은 사람도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벼슬에서 물러나면 농사를 짓고 살았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는 사회를 건강하게 하고 조선초기의 강성한 국가가 될 수 있는 토대였다.

물론 음서제에 의해 공신이나 종3품 이상의 고위관료의 자식, 사위가 관리가 될 수 있었으나 인정받지 못해서 그나마 하위직에 머무를 뿐이었다. 비록 빛과 그늘은 있지만 엄격한 관료제가 조선왕조 500년을 이끈 원동력이었다.

이렇게 해서 4대 조상까지 관리가 없으면 그 집안은 양반신분에서 탈락했다. 따라서 조선의 양반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과거에 합격해야만 했다. 가문의 사활이 걸린 문제이니 보통 25~30년을 준비해야 했다.

3년에 한번 과거를 통해 뽑힌 200명의 생원, 진사가 양반을 형성하고 최종 합격자 33명이 관료의 길로 접어들 수 있었다. 우리가 사극에서 보는 생원, 진사가 생각보다 우스운 사람들이 아니었다. 양반은 문반(文班) 무반(武班)의 관료를 이야기하는 양반(兩班)이었을 뿐이다.

그러던 것이 후기에는 과거를 볼 수 있는 신분으로 바뀌게 된다. 과거를 볼때 조상의 이름을 4대조까지 쓰게 되어 있었는데 이때 사실상의 검열작용으로 과거를 보아도 소용없게 만든 것이다.

조선후기 과거시험은 사회적 신분을 정하는 잣대였다. 따라서 부유하고 권력 있는 집안은 부정행위를 포함한 권력을 동원하거나 장기간의 사교육이 가능한 부유한 집안의 상징처럼 되어버렸다.

얼마전 부터 우리사회는 경제력이 지배하는 곳이 되어버렸다. 가난한 사람은 어려서 사교육을 못받아 좋은 대학을 가지 못하고, 대학 때에는 1천만원에 육박하는 등록금 때문에 아르바이트 하느라 공부할 시간이 없다. 그래서 견디다 못해 유흥업소까지 진출하기도 한다. 이러한 상황은 어렵게 공부를 해서 유학을 가도 마찬가지이다.

공부만 잘하면 기회가 보였던 시기가 있었다. 이제는 공부를 잘해도 소용없을 뿐만 아니라 공부를 잘할 수도 없는 시대가 되었다. 과거의 ‘과거’라 할 수 있는 것이 대학입시와 고시를 포함한 공무원시험이다.

하지만 이제 서울대에 합격생을 한명도 배출하지 못하는 자치단체가 허다하고 공무원시험은 시장논리로 무조건 줄이려고 한다. 변호사도 로스쿨제도로 개천에서 용이될 기회가 멀어져간다.

시험만으로 사회적 지위를 결정짓는 시스템도 문제이지만 그나마도 그러한 기회도 없는 상황으로 가면 어떻게 될까? 사람들은 가난한 것에 분노하는 것이 아니라 불공정한 것에 분노하는 법이다.

경쟁을 이야기하지만 그 결과 갈수록 경쟁을 어렵게 하는 사회시스템 속에서, 젊음들은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다. 미래가 암울해지고 있다. 일부 양반들만 제외하고.


정창수 역사기고가

정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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