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용’의 의미와 평화경제

평화운동가 김승국의 ‘공동체의 평화'[4] 김승국l승인2008.01.28 10:33

크게

작게

메일

인쇄

신고

‘예기’의 ‘대동’과 묵자의 ‘안생생’은 매우 닮았다. 묵자에서 말하는 천하무인의 안생생 평화공동체와 예기의 대동사회가 유사하다는 말이다. 유사하므로 ‘묵자가 천하무인의 대동사회, (천하인민이 안락하고 평화로운 생을 영위하는) 안생생 평화공동체를 꿈꿨다’고 말할 수 있다.

이와 같은 평화공동체를 실현하기 위해 묵자는 비공-겸애-교리의 상호관계를 말하며 ‘절용’ ‘절장(節葬)’ ‘비락(非樂)’을 강조한다. 절용, 비락, 절장하는 평화공동체를 통해 평화경제가 이룩하자고 강조한다.

‘절용’은 절약이라는 의미와는 다른 것으로 노동의 결과물인 재화를 호화로운 장례나 음악으로 낭비하거나 전쟁으로 파괴하지 않고 재화 본래의 목적대로 절도 있게 소비하는 것을 말한다.(기세춘, 2006) 묵자는 전쟁과 음악도 경제적인 면에서 관찰한다. 즉 전쟁을 칼과 창 등의 소비행위로, 음악을 악기의 소비행위로 파악하는 것이다.(기세춘, 1995) 그는 재화의 본래 목적을 초과한 과시(過示)소비의 대표적인 사례로 전쟁을 든다.

시민사회신문 DB
재화의 본래 목적을 초과한 과시(過示)소비의 대표적인 사례는 전쟁이다. 사진은 지난해 6월 시민사회단체들의 파병반대 집회 모습.

묵자 당시의 전쟁은 생산수단인 농토와 농노를 더 많이 쟁탈하기 위한 것이었다. 전쟁은 오늘날 자본주의에서도 마찬가지로 잉여생산을 소비하는 행위이다. 지배계급은 착취한 노동생산물을 과시적 사치와 낭비로 소비하며 지배를 재창출하는데 사용한다. 그들은 더 많은 토지의 약탈과 노예를 획득하기 위하여 굶주린 인민을 전쟁으로 내몰고 그 비용을 지불하기 위하여 더욱 인민을 착취한다.

봉건제의 농노관계나 자본제의 임노동관계의 생산적 측면에서 착취의 ‘모습’은 찾을 수 있으나 착취의 ‘원인’을 찾기 어렵다. 그래서 묵자는 그 원인을 소비에서 찾아야 한다고 본다. 생산물의 소비가 생산물의 본래 목적인 인민의 생활을 위한 것이 아니고 인민을 억압하고 괴롭히는 목적으로 소비되는 데에 착취의 원인이 있다는 것이다. 환언하면 생산물의 본래의 목적을 벗어난 소비 즉 과시소비가 착취를 낳는 원인인 것이다. 그 과시소비의 가장 대표적인 예가 전쟁이다.(기세춘, 1995)

묵자가 보기에 전쟁이라는 과시소비를 중단하는 것이 평화경제의 지름길이다. 전쟁중단이 인민 상호간에 이익을 준다(交利). 이게 바로 의(義)이며 인민을 두루 사랑하는 겸애이다. 이와 같은 비공-교리-겸애의 삼각관계를 떠받쳐주는 평화경제의 최우선 과제는 ‘과시소비로서의 전쟁’을 중단하는 것이다. 전쟁이 인민의 노동력을 지나치게 소진하거나 착취하므로 전쟁에 반대하는 것이다.

묵자에 있어서 노동착취의 근본적인 원인은 전쟁이라는 ‘노동 목적 이외의 소비행위’이었다. 전쟁과 지배계급의 사치만 없다면 노동착취가 생기지 않는다.(묵자, 사과편)

묵자는 전쟁비용을 인민의 생활을 위해 쓰면 생산은 더욱 증대하고, 적국을 지원해주면 전쟁보다 더 이로울 것이며, 적국의 성곽이 무너졌으면 보수해주고, 곡식과 옷감이 부족하면 나누어 주며, 소국이 침략을 당하면 서로 협동하여 구해주라고 한다.(묵자, 비공 하편)

군비축소를 통해 절약된 전쟁비용(평화 배당금)을 민중의 생활증진에 쓰면 생산력 제고에 도움이 된다는 평화경제론을 묵자가 전개하고 있다.

몇 가지 문제 제기

지금까지 묵자의 평화공동체에 관하여 설명했으나 평화경제 부문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는데 부족함을 드러낸 것 같다. 이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 위한 추가적인 연구가 절실하며, 이러한 차원에서 몇 가지 문제와 과제를 제시한다;

묵자의 평화경제론을 남북한 사이에 적용하면 좋지 않을까? 남북한 사회가 각기 ‘비공-겸애-교리의 평화공동체’를 이루는 가운데 묵자의 평화경제론을 실행하면 평화통일의 그날이 앞당겨지지 않을까? 남북한 각각의 ‘비공-겸애-교리 평화공동체’를 합성한 ‘한반도의 안생생대동사회’를 이루면 평화통일이 촉진되지 않을까? 그리고 남북한의 ‘비공-겸애-교리 평화공동체’를 6·15 공동선언 제2항(국가연합과 낮은 단계의 연방제가 접합될 수 있다는 항목)에 적용하면 어떨까? 남북한이 묵자의 비공 정신에 따라 (일본, 코스타리카처럼) 평화헌법을 만들고 (북유럽 국가들처럼) 전수(專守)방위 정책을 구사하며 (스위스처럼) 중립국가를 표방하는 가운데 한반도의 비핵화, 비핵지대화-군축-평화협정 체결에 성공하여 ‘비공-겸애-교리 평화공동체’를 이루면 6·15 공동선언 제2항을 실현할 수 있는 길이 열리지 않을까.

묵자가 말하는 천하무인의 대동사회, 안생생의 대동사회는 노자, 장자의 원시 공동체, 예수의 평화 공동체, 초기 기독교의 평화 공동체, 마르크스의 ‘유적존재’(Gattungswesen)와 유사하므로 이와 관련된 연구가 필요하다.

노장(노자, 장자)은 수고로운 노동도 없고 국가도 없는 태호 복희씨와 염제 신농씨 시대의 원시 씨족사회의 무치(無治)를 소망했다. 이것은 예기에서 말하는 대동사회보다 더 원시적이다. 또한 묵자의 ‘안생생’ 대동사회는 우(禹)왕 시대에 기계를 쓰는 협업 공동체인 공산국가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정부와 기계를 거부하는 원시공산사회를 지향한 노자와는 차이가 있다.

그러나 묵자와 노자는 다 같이 공산사회를 지향했으므로 공동체를 파괴하는 과욕과 경쟁, 초과소비와 전쟁을 거부하고 협동과 절검, 평화를 강조한 점에서는 일치한다. 대체로 이러한 공동체 사회를 원시공산사회라고 말한다. 공동체 또는 공산사회는 누구도 소외되지 않는 사회이고 사적소유가 없는 무소유의 사회이며, 공공성과 개인성이 조화된 순진무구한 사람들의 사회를 말한다. 노장은 이를 무치, 무소유, 동심으로 표현했고, 마르크스는 공산사회를 무소외, 무소유, 유적본질이 구현된 사회로 표현했으나 모두 같은 맥락이다.(기세춘, 2006)

마르크스가 말하는 ‘자유인들의 연합’, 자본주의의 노동방식인 통합노동(combined labour)이 아닌 연대노동(associated labour)을 수행하는 ‘노동자의 자유로운 결사)’ 즉 ‘Assoziation’으로서의 ‘공산주의’는 세계적 규모로 실현될 수밖에 없다.

공산주의의 실현에 의하여 국가는 사멸하고 인간의 자기소외가 극복되어 땅(지상)에 평화가 깃든다. 그러므로 마르크스의 평화구상은 ‘(세계 공산주의) 혁명에 의한 평화’이며 ‘Assoziation’이 이러한 평화의 담지자이다.(김승국, 1996)

묵자는 300여 차례나 하느님에 대하여 말한다. 그 중에서 ‘법의’, ‘천지’, ‘겸애’, ‘비공’ 4편에서만 206번이나 하느님 말씀을 한다. 그런데 묵자가 말한 하느님은 약 500년 후에 예수와 그의 제자들의 하느님과 너무도 같다. 묵자와 예수는 모두 기층민중 편에 서서 인간해방을 설교하고 그것을 위해 투쟁하였으며 그 사상적 기초는 하느님의 사랑이었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다만 두 성자는 처한 상황에 따라 묵자는 현실투쟁을 중시했으며 예수는 우선 위로와 희망이 중요했던 것이다. 묵자에게는 목숨보다 귀중한 것이 의였으나 예수에게는 목숨보다 귀중한 것은 없었다. 그래서 묵자에게는 투쟁이 중요했고 예수에게는 인내가 더 중요했는지도 모른다. 묵자와 예수는 모두 전쟁과 폭력을 반대했지만 예수는 용서를, 묵자는 저항을 외친 것이다. 묵자와 예수의 하느님은 그 근본에서 닮았으며 그 뿌리는 채취경제의 원시시대에 형성된 수렵 기마민족인 동이족의 천민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의 하느님은 모세의 야훼와는 전혀 다르고 오히려 묵자의 하느님과 가깝다. 묵자의 천지, ‘겸애’, ‘법의’, ‘비공’ 편 등을 읽으면 예수의 산상수훈과 제자들의 편지를 읽는 것으로 착각할 정도로 비슷하다.(기세춘, 1994)

‘예기’의 ‘대동’과 묵자의 ‘안생생’

예기 ‘예운’편의 대동사회에 대한 기록과 묵자의 천하무인의 안생생 사회에 관한 어록을 비교해 보면 너무도 같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정치적으로 ‘민주· 평등사회’라는 점에서 같다. 예기의 대동사회는 大道之行也(대도가 행해지니) 天下爲公(천하가 만민의 것이 되었고) 選賢與能(어질고 유능한 자가 선출됨으로써) 講信修睦(모두가 신의를 중히 여기고 화목한 사회가 되었다)고 적고 있다.

묵자의 ‘안생생’ 사회는 ‘하느님이 처음 백성을 지으실 때는 지도자가 없었으며 백성들이 주권자였다. 그러나 백성이 각각 주권자이므로 서로 자기의 의(義)는 옳다 하고 남의 의는 비난하며 크게는 전쟁이 일어나고 작게는 다투게 되었다. 이에 천하의 의를 하나로 통일하고자 어질고 훌륭한 사람을 선출하여 천자로 삼았던 것이다’(상동 편)으로 적고 있다.

또 예기의 대동사회는 ‘故人不獨親其親 不獨子其子’(그러므로 사람들은 자기 부모만 사랑하지 않고 자기 자식만 자애하지 않고 모두가 한 가족같이 사랑하였다)고 기술한다.

묵자는 ‘천하 만민은 하느님의 평등한 신민(臣民)이다. 하느님은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고 이롭게 하기를 바라고 서로 미워하고 해치는 것을 싫어하신다’(법의 편), ‘남의 나라를 내 나라 보듯이 하고, 남의 집안 보기를 내 집같이 하고, 남의 몸을 내 몸같이 보라’(겸애 편), ‘ 천하에 남이란 없다’(天下無人, 대취 편)으로 적고 있다.

또 경제적으로 ‘완전고용의 복지사회’라는 점에서 같다. 예기의 대동사회는 使老有所終(그렇게 함으로써 늙은이는 수명을 다하고) 壯有所用 幼有所長(젊은이는 재능을 다하고 어린이는 무럭무럭 자랐으며) 鰥寡孤獨廢疾者(홀아비와 과부, 고아와 자식 없는 늙은이, 병자들도) 皆有所養 男有分女有歸(모두 편히 부양 받게 되었다) 男有分女有歸(남자는 모두 직분이 있고 여자는 모두 시집을 갈 수 있었다)고 적고 있다.

묵자는 ‘모든 노동자들로 하여금 각각 자기의 소질에 따라 일에 종사하도록 하며(완전 고용), 모든 백성들에게 필요한 대로 충분히 공급해 주고(필요공급), 그 이상의 낭비는 그쳐야 한다’(절용 편)으로 기술한다.

사회적으로는 ‘노동절용, 공유의 공생사회’라는 점에서 같다. 예기는 貨惡其棄於地也(재물을 땅에 버리는 낭비를 싫어하지만) 不必藏於己(결코 자기만을 위하여 소유하지 않으며) 力惡其不出於身也(몸소 노동하지 않는 것을 부끄러워했으나) 不必爲己(반드시 자기만을 위하지 않는다)고 적고 있다.

묵자는 ‘성왕은 정치를 함에 있어 영을 내려 사업을 일으키되 무기와 같은 실용이 아닌 것을 생산하지 않도록 했다. 그러므로 재물을 낭비하는 풍조가 사라지고 백성들은 피로하지 않고 크게 이롭게 했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군주들은 재화와 노동을 허비하여 사람의 생활에 긴요하지 않는 무용한 일에 사용한다. 그러므로 부하고 높은 사람은 사치하고 고아들과 과부들은 헐벗고 굶주린다’(사과 편)라고 기술한다.

김승국 평화만들기 대표

김승국  

<저작권자 © 시민사회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김승국의 다른기사 보기

인기기사



여백
시민사회신문 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08288 서울특별시 구로구 새말로 93, 신도림태영타운상가2동 B105  |  대표전화 : 02-3143-4161  |  팩스 : 02-6737-1115  |   ingopress@ingopress.com
등록번호 : 서울 다 10706  |  등록일자 : 2013년 8월 26일  |  회장·논설주간 : 강상헌  |  발행·편집인 : 설동본  |  편집국장 : 양병철
후원계좌 : 국민은행 7788-01-04-375819 (시민사회신문)  |  청소년보호책임자 : 설동본
Copyright © 2007 시민사회신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