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책이 있어 맑은 얼굴

책으로 보는 눈 [34] 최종규l승인2008.01.28 11:39

크게

작게

메일

인쇄

신고

1932년에 광주에서 태어나 시를 쓰며 살았지만, 번듯한 시모음을 굳이 내지 않고 살아온 강태열이라는 할아버지가 있습니다. 당신이 살아가는 모습이 고스란히 시요, 품고 있는 생각을 펼치며 꾸리는 삶이 시모음 하나라고 말씀하시니 그 뜻을 알겠습니다.

지난 2007년 12월 29일 낮, 인천 배다리 골목길 한켠에‘아벨서점’ 아주머니 두 분이 애써 마련한 ‘시 다락방’에서 강태열 할아버지가 ‘시읽는 잔치’를 열었습니다. 시모음도 따로 내지 않았으니 ‘시읽는 잔치’도 이날이 처음. 1952년 겨울에 쓰셨다는 ‘기러기’라는 작품을 읊습니다.

“전쟁을 알 리 없는 / 눈이 내리다가. // 눈 개인 / 하늘이 빈다. // 장독대엔 / 흰 옷 입는 옹기들뿐. // 끼륵끼륵 끼륵끼륵 / 하늘 나는 기러기…. // 빈 장독대도 / 기러기 소릴 낸다. // 전쟁을 알 리 없는 눈이 / 싸인다.”

겨울답지 않게 눈이 없다고 투덜투덜대며 지낸 탓은 아닐 테지만, 요 며칠 사이 큰 눈이 내리며 제법 쌓이기도 하고 날씨도 퍽 추워집니다. 아침에 머리 감으며 빨래를 해서 햇볕 바른 마당에 내놓으면 금세 얼어붙습니다.

방에서도 옷을 세 벌씩 껴입으며 지냅니다. 방바닥에는 늘 이불이 깔려 있습니다. 방에서 글을 쓰다가 호오 하고 입김을 불고는 두 손을 마주잡고 쓱쓱 비빕니다.

낮에 잠깐 할아버지 헌책방에 나들이를 다녀왔습니다. 할아버지는 내도록 길거리를 내다보고 계셨습니다. “사람들이 길거리에 다니지 않아.” 날이 추워서 덜 다니는지 모르지만, 먹고 마시고 돈쓰고 버리는 번쩍번쩍 유흥거리와는 좀 동떨어진 길거리인데다가 헌책방골목이니 사람들 발길이 뜸합니다.

이웃한 아주머니 헌책방에 들어가 봅니다. “저번에 받은 그릇 돌려드려야 하는데.” 하면서 양배추 하나를 그릇에 담아서 건네십니다. 코 한쪽이 헐어서 무척 아파 보이는 아주머니인데 얼굴은 맑습니다. 쌀쌀한 바깥과 달리 따뜻한 안쪽이라 그럴 수 있지만, 그보다는 헌책방 일꾼인 당신이 느끼기에 좋은 책들에 가득 둘러싸인 데에서 일하기 때문이 아니랴 싶습니다.

두 군데 들러서 고른 책을 가방에 담아 집으로 돌아옵니다. 옆지기가 식빵이 먹고 싶다고 합니다. 천으로 된 장바구니를 들고 동인천으로 나가서 빵집에 들릅니다. 가게 일꾼은 비닐봉지에 식빵을 담으려고 합니다. “봉지에 안 담으셔도 돼요. 가방 있어요” 하고는 장바구니에 담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동네 구멍가게에 들러 보리술 한 병 삽니다. 구멍가게 할배는 “방에 가 보면 사진을 쫙 붙여놓았어. 다음에 한번 보러 와” 하십니다. 저번에는 꽃 구경 하러 오라시고, 이번에는 사진 구경 하러 오라십니다.

그런데 빵집 할머니가 더는 일을 못하게 되면, 그리고 헌책방 할배와 아주머니가 더는 일을 못하게 되면, 그리고 구멍가게 할배와 할매가 더는 일을 못하게 되면, 그 자리는 어찌 될는지.


최종규 우리 말과 헌책방 지킴이

최종규  @

<저작권자 © 시민사회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최종규의 다른기사 보기

인기기사


여백
시민사회신문 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08288 서울특별시 구로구 새말로 93, 신도림태영타운상가2동 B105  |  대표전화 : 02-3143-4161  |  팩스 : 02-6737-1115  |   ingopress@ingopress.com
등록번호 : 서울 다 10706  |  등록일자 : 2013년 8월 26일  |  회장·논설주간 : 강상헌  |  발행·편집인 : 설동본  |  편집국장 : 양병철
후원계좌 : 국민은행 7788-01-04-375819 (시민사회신문)  |  청소년보호책임자 : 설동본
Copyright © 2007 시민사회신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