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를 위한 수업’… 학생·교수 따라가기 급급

영어교육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다. 영어를 모국어처럼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요구까지 나오고 있다. 최근 대통령직 인수위원회가 영어몰입교육을 주요 교육정책으로 내세운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다.

영어학습에 대한 열기도 대단하다. 국제중학교, 국제고등학교, 외국어 고등학교의 인기는 날이 갈수록 상승한다. 인기 있는 영어학원은 몇 달 전에 예약하지 않으면 아예 수강자체가 불가능하다. 대학가도 마찬가지다. 대학 영어강의의 허와 실을 진단한다. /편집자

대학가에서도 영어교육 강화 노력이 활발하다. 외국인 교수를 초빙하고, 점점 더 많은 학생들을 교환학생으로 보낸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영어강의 확충이다.

고려대의 영어강의 비율은 33.55%(2007년 2학기 기준)에 이른다. 또 04학번부터 영어강의를 5개 이상 수강해야 졸업을 할 수 있도록 규정했다. 서강대의 경우도 06학번은 3과목 이상, 07학번은 4과목 이상, 08학번은 5과목 이상의 영어전공강의를 수강해야 한다.

연세대도 영어강의 비율이 25.17%로 매학기 그 비율이 높아지고 있다. 경희대는 07학번부터 전공강의를 모두 영어로 수강하게 했다. 카이스트는 07학번부터 시작해 2010년까지100% 영어수업을 하는 것이 주요 목표 중 하나다. 포항공대도 ‘vision2020’을 통해 영어강의를 활성화시키겠다는 목표를 발표했다.

늘어나는 영어강의 그러나…

대학들이 영어강의를 활성화시키고자 하는 것은 국제화 흐름에 발맞추려면 영어가 필수적이란 생각 때문이다. 국제어인 영어를 모르고는 세계적으로 활동할 수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다.

특히 대학 평가도 영어강의 강화에 한몫하고 있다. 영국의 더 타임스나 한국의 중앙일보 등 국내외 언론사들은 외국인 교수비율, 외국인 학생비율, 그리고 영어강의 비율을 대학 평가의 주요 지표로 삼고 있다. 해가 갈수록 국제화 지표에 대한 가중치는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현재 대학에서 진행되고 있는 영어강의가 효율적인지는 의문이다. 많은 학생들은 대학측이 좀 더 높은 대학순위를 받기 위해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일방적으로 영어강의를 강요한다고 비판한다.

고려대 통계학과 3학년 김 모 군은 수강신청을 할 때마다 한숨이 절로 나온다. 매학기 거의 모든 전공과목이 영어강의로 개설되기 때문이다. 그는 “수강신청을 신청할 때마다 처음 전공기초과목을 영어로 들을 때의 악몽이 다시 떠오르는 것 같다”며 몸서리를 친다.

김은솔 인턴기자

대학평가 등을 위한 준비없는 영어강의 확대가 학생·교수들의 불만을 사고 있다. (위 사진은 특정사실과 관계없음)

전공에 대한 기초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모국어가 아닌 외국어로 수업을 하게 되니 아무리 공부를 열심히 해도 영어를 잘하는 학생들보다 이해도가 떨어진다는 것. 조금이라도 이해하려면 영어공부를 먼저 해야만 했다. 한 학기 동안 전공공부를 하는 것이 아니라 영어공부를 하는 것만 같았다. 기초적인 전공지식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해 학년이 올라가서도 이러한 상황이 계속될까봐 걱정이 앞섰다. 앞으로도 계속 영어강의만 들어야한다는 생각이 그를 더욱 괴롭게 하는 것이다.

영어강의 기피 학생들 이유는?

실제로 교수들은 학생들의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중요한 부분은 한국어로 강의하거나 한국어 보강시간을 따로 만들어 실시하는 경우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학생들은 영어강의를 기피하고 있다. 듣고 싶은 내용의 수업이라도 그것이 영어강의라면 신청을 꺼리는 학생들이 많다. 학생들에게 ‘전쟁’이라고 불리는 수강신청 기간에도 많은 수의 영어강의는 자리가 남는다. 대학에서 졸업요건으로 일정 개수 이상의 영어전공 강의 수강을 요구하게 되면서 시간표를 짤 때 관심 있는 과목이 아닌 영어강의여부를 보고 선택해야 하는 일도 발생한다.

김 군은 “같은 시간에 한국어로 수업을 들었다면 더욱 심도 있는 내용이 오갔을 것”이라며 “학생들이 전공수업에 필수적인 지식들을 습득한 후에 영어강의를 하는 것도 늦지 않으므로 기초과목은 한국어강의로 하거나 영어강의와 한국어강의 모두를 개설해 선택할 수 있도록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영어강의의 질에 대한 비판도 제기된다. 포항공대 화학공학과 3학년 황 모 군은 영어강의에 대해 회의적이다. 그는 여태까지 2개의 영어강의를 들었지만 만족도는 그리 높지 않았다. 같은 말이라도 영어와 한글의 미묘한 차이가 있는데, 영어강의로는 학습도를 높이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담당 교수가 유학생활을 해 영어강의 자체에는 별 문제가 없었지만 학생들이 잘 알아듣지 못하니 같은 말을 계속 반복해야했다. 자연히 강의의 질도 한국어로 수업할 때보다 떨어졌다. 그는 강의내용과 별개로 수업내용을 거의 독학하다시피 했다며 “상당히 비합리적”이라고 밝혔다.

학생들은 수업내용을 이해하기 위해 영어강의에서 제공되는 원서대신 한글 번역판을 구해 돌려봤고, 시험시간에 조교에게 영어로 출제된 시험문제를 해석해 달라고 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뿐만 아니라 내용은 모두 아는데 특정단어의 영문명을 알지 못해 시험문제를 틀리는 학생까지 생겨났다.

연세대 전기전자공학과 2학년 김 모 군은 “처음에는 의욕을 갖고 들으려고 하다가도 따라가기가 힘들다”며 불만을 토로했다.

한원희 경희대 총학생회 학사사무국장은 “저학년, 고학년 모두 영어전용강좌에 대해 부담스러워한다”며 “학생들이 부담을 갖고 잘 적응하지 못하는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눈에 보이는 학업성취도 저하

영어를 잘하는 학생들도 문제를 제기한다. 연세대 신문방송학과 3학년 박 모 양은 국제학교를 다닌 학생이다. 그는 “영어를 잘하는 학생들과 못하는 학생들의 편차가 심하다”며 “학점을 받기는 상대적으로 쉬울지 모르나 가끔은 답답하기도 하다”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이영숙 경희대 영어학부 교수는 “아무리 설명해도 학생들이 이해하지 못해서 강의 후 학생들을 따로 모아서 한국말로 다시 설명해주기도 했다”며 “영어강의 실시에만 신경 쓸 것이 아니라 학생들의 수준에 따른 분반이나 한국어 강의 확충 등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학생들의 영어실력만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학교에서 영어강의를 장려하는 차원을 넘어 아예 의무화하다 보니 교수들의 부담이 크다.

현재 연세대에서는 신임교수를 대상으로 2학기동안 영어로 수업을 진행하게 한다. 고려대도 신임 교수들에게 모든 강의를 영어(원어)로 진행시킨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영어강의를 진행할 실력이 되지 않는 교수들마저 울며 겨자 먹기로 영어강의를 하고 있다.

연세대 신문방송학과 4학년 이 모 군은 지난 학기 영어강의를 들었던 경험을 생각하면 쓴 웃음만 나온다. 그는 전공 지식도 배우고 영어실력도 향상시키고자 지난 학기 영어강의를 신청했다. 그러나 교수의 영어실력은 만족스럽지 못했다. 과거 그 수업을 들었던 선배들에게 물어보니 외국인 학생들이 수강신청을 하지 않았을 경우에는 영어강의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어로 강의를 하기도 한다고 했다.

때문에 한국어를 직역한 수준에 불과한 영어로 강의를 듣는 것은 매우 힘들었다고 토로한다. 영어 실력의 향상은 기대할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과목 이해도도 떨어졌다. 두 마리 토끼를 모두 놓친 셈이다.

경희대 경영학과 2학년 이 모 양은 1학년 때 모든 전공수업을 영어로 들어야만 했다. 이 양은 영어강의에 대해 상당히 부정적이다. 영어수업의 부담감이 큰 것도 이유지만 모든 전공 교수가 영어로 수업을 진행할 만한 실력을 갖고 있는지에 문제를 제기한다. 그가 들은 수업들의 교수들은 영어로 수업을 원활하게 이끌어 나갈 만큼의 실력이 되지 못했다.

경희대 경제학과 4학년 김 모 군도 비슷한 문제를 제기한다. 그는 “교수와 학생이 모두 영어실력이 좋은 경우 영어강의는 권장할 만하다. 그러나 많은 경우 영어로 수업을 진행하다보면 한국어로 강의할 때보다 그 깊이가 얕은 것이 사실”이라며 안타까움을 표했다.

실제로 학생들이 주요 학교 강의평가 게시판에 올려놓은 글을 보면 “교수의 영어 발음이 좋지 않고 원어민이 쓰는 영어와는 많은 차이가 있다”는 비판이 많다.

교수 수업 수준도 문제

연세대 교육개발지원센터 관계자는 “자체적으로 학생들에게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50%가 넘는 학생들이 영어강의보다 한국어강의 수준이 더 만족스럽다고 응답했다”며 영어강의의 질을 높이기 위한 노력을 강조했다.

박거용 한국대학교육연구소 소장은 “교수들이 원어민이 아닌 이상 영어로 한국어 보다 더 잘 표현할 수는 없으므로 결국에는 수박 겉핥기식의 수업이 될 것”이라며 영어강의에 대한 우려를 표명했다.

연세대 교육개발지원센터에서는 이러한 문제를 인식하고 영어강의 컨설팅을 진행하고 있다. 영어강의 컨설팅을 신청한 교수의 강의를 촬영한 뒤 원어민 교수와 교수법 전문가의 상담을 통해 강의의 질을 개선시킨다는 계획이다.

하지만 한 학기에 2~3명이 참여하는 정도로 참여율은 낮은 편이다. 교육개발지원센터 관계자는 “대부분의 교수들은 자신의 강의를 녹화하는 것에 부담을 느끼며, 연로한 교수들은 부끄러워하는 경향도 있다”며 아쉬움을 표현했다.

한원희 경희대 총학생회 학사사무국장은 “강의평가를 공개해 낮은 수준의 영어강의를 개선시키고 수업진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학생들을 위해 ‘강의다시보기’ 서비스를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그는 강의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 교수에게 적극적으로 질문하고 노력하는 학생들의 자세도 주문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영어를 위한 수업’이 돼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박거용 소장은 “영어영문학과 등의 일부학과를 제외하고는 영어사용이 전공수업에 필수적이지 않다”며 “학문을 진정한 우리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우리말로 다듬는 노력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익명을 요구한 경희대 교수는 “현재 대부분의 영어강의는 주객전도가 된 상태”라며 “영어로 인해 수업 내용이 빈약해 지는 상황은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고려대 사회학과 3학년 이 모 군은 “어떤 강의를 영어강의로 할지 말지를 결정할 때 학생들의 영어실력 향상이 될지 안 될지가 지표가 될 수는 없다”며 “강의를 들으면서 영어실력이 높아지면 좋겠지만 그 강의의 내용을 잘 전달하여 학생들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우선”이라고 강조했다.

김은솔 인턴기자

김은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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