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의 정점에 오른 철학자의 파멸

철학여행까페[22]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l승인2008.03.03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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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희
로마시대 영지 하드리아누스 빌라

스토아학파는 그리스 시대부터 로마 시대 초기까지 이르면서 노예부터 귀족, 황제에 이르기 까지 출신도 다양했다. 대표적인 후기 스토아 철학자들로서는 네로의 스승인 세네카(Seneca, 4 B.C.~A.D. 65)가 있고, 노예 출신으로서 자유민이 된 에픽테토스(Epictetos, A.D. 60~120)와 황제인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Antonius, A.D. 121~180)가 있다.

스토아 웅변가 세네카

오늘 소개할 철학자는 스토아 철학자이자 웅변가로 유명한 귀족 출신의 세네카이다. 세네카의 웅변술은 황제 칼리쿨라가 질투를 할 정도였다. 세네카의 일생을 보면, 권력에 따라 영욕과 부침이 심해 스토아 철학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는 고대 로마제국 에스파냐 코르도바에서 출생했다. 어려서 부모를 따라 로마로 와서 자라면서 변론술과 철학을 배웠다. 그는 법률을 배우고 변호사 생활을 얼마 동안 한 다음 국가재무관이 되었다.

잘 나가던 그는 황후 메살리나의 미움을 사서 41년 코르시카섬으로 추방되는 비운을 겪는다. 그가 추방된 이유는 이렇다. 황제 칼리쿨라가 암살되고 그의 숙부 클라우디우스가 황위에 올랐는데, 클라우디우스는 칼리쿨라 황제의 누이동생인 유리와 아그리파나를 로마도 불러들였다. 유리아는 재색을 겸비한 여인으로 황후인 메살리나에게 질투를 샀다. 왕후는 유리아가 간통했다고 무고했고, 그 상대자로 세네카를 지목했던 것이다.

어이없는 황후의 무고로 45세의 세네카는 코르시카 섬에서 달과 벗하며 8년 동안 이나 외로운 시간을 보내야 했다. 이 외로운 시기가 세네카에게는 철학에 몰두할 수 있었던 시기였다. 그는 이 시기에 그리스 비극을 모방한 많은 비극을 썼다.

황후가 정부 카이우스 실리우스와 짜고 황제를 음해하려다 들통이 나 사형을 당하고 난 뒤에야 세네카는 로마에 돌아 올 수 있었다.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새 황후가 된 여성은 유리아의 자매인 아그리피나였다. 그녀는 세네카의 복권을 서둘렀고, 그렇게 귀향에서 돌아 온 세네카는 푸라에토르라는 고급관리직에 임명되었다.

이동희
세네카 두상, 로마시대 모조품
또한11살의 어린 네로를 가르치는 일을 맡게 되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귀향 생활에서 세네카는 당당히 권력의 중심에 다시 복귀하게 된 것이다. 세네카는 몇 년 지나 새로운 황제의 섭정이 된다. 아그리피나는 자신의 아들을 황제로 만들기 위해 황제를 독살했고, 17살의 어린 나이에 아들 네로를 황제에 즉위시켰다. 그녀는 세네카를 붓루스와 함께 어린 황제의 섭정을 맡게 했다.

황제 네로가 생모인 어머니를 독살하고 친정을 폈을 때도 세네카는 권력을 그대로 유지했다. 네로는 자신과 가신의 아내였던 포파에아의 결혼에 생모가 반대하자 포파에아의 사주로 생모를 죽였다. 그는 생모를 독살한 네로가 원로원에서 자신을 변명할 때 사용했던 변론문을 기초해 네로에게서 더욱 신임을 얻었다.

“악의 깊은 맛”

이제 황제의 두터운 신임을 받은 세네카는 엄청난 부와 호화로운 생활을 누렸다. 그러나 세네카는 권력의 정점에서 이제 남은 것은 파멸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동료 붓루스의 독살을 계기로 황제 네로에게 은퇴를 청해 낙향했다. 그는 낙향해서 한가로운 생활을 즐기며 철학적인 사색과 저술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생활은 오래 가지 못하였다. 네로 황제는 세네카에게 피소의 역적모의에 가담했다는 혐의를 씌워 자살을 명했다. 세네카는 로마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빌라에서 후처와 친구들과 함께 지내다 황제가 보낸 전령을 맞았다. 그는 그러한 일을 예견한 듯이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죽음을 준비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면서 친구들이 탄식하며 슬퍼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여러분은 이제까지 배운 철학을 잊었는가? 어미를 죽이고, 아우를 처 죽인 자가 이제 스승을 죽이는 것에 외에 무엇이 남아 있겠는가?”

이동희
페터 파울 루벤스, 세네카의 죽음, 스페인, 프라도 미술관 1615년 경
그렇게 말을 하고 나서 세네카는 팔의 동맥을 끊었지만 메마른 늙은 몸에서는 피가 좀처럼 흘러나오지 않았다. 그러자 그는 다시 발목의 동맥을 끊었다. 그러나 고통만 클 뿐 피가 별로 나오지 않았다. 그는 친구에게 죽음을 재촉하기 위해 준비해 두었던 독약을 청해 마셨다. 그러나 이미 피가 모자라 독이 퍼지지 않았다. 결국 그는 노예에게 부탁해 뜨거운 욕탕 속에 들어 가 그곳에서 죽음을 맞았다.

세네카의 죽음은 다비드나 페터 루벤스 같은 여러 화가들이 묘사했다. 세네카의 죽음은 매우 스토아적인 것이었다. 그는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고, 죽는 순간 까지도 태연하게 노예에게 자신의 생각을 받아 적도록 했다.

그러나 세네카의 삶은 그렇게 스토아적이지 않았다. 그는 엄청난 규모의 장원과 영지를 가지고 있었고, 호화로운 생활을 즐겼다. 그는 돈 버는 데에도 악착같았다. 타키투스는 기원 후 61년에 영국이 로마에 대해 일으킨 반란의 원인을 세네카 때문이라고 까발린다. 세네카가 영국 섬사람들에게 높은 이자를 기대하고 빌려 주었던 4천만 세스테르티우라는 엄청난 돈을 한꺼번에 그것도 억지로 거둬들였기 때문에 반란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그러나 세네카는 자신의 호화로운 생활에 대해 사람들이 비난을 하면 이렇게 변명을 했다고 한다.
“나로 말하자면 악의 깊은 맛 속에 사는 것이다.”

세네카는 스스로 세속이라는 악의 깊은 맛에 빠져 살면서도 끝내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는 것은 인간이 올바른 이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며, 유일의 선(善)인 덕(德)을 목적으로 행동하기 때문이라는 스토아주의를 역설했다. 그러나 그는 호화로운 생활을 하면서도 불평과 불안에 찬 생애를 보냈다.

인간의 나약함과 철학

그가 쓴 주요 작품으로는 은퇴 후 친구인 루킬리우스에 대해 스토아 철학을 말한 124통의 ‘도덕서한’(道德書翰)이 있다. 그리고 코르시카 섬으로 추방되었을 때 썼던 ‘섭리(攝理)에 대하여’, ‘노여움에 대하여’, 그 뒤에 쓴 ‘인생의 짧음에 대하여’, ‘은혜에 대하여’, ‘행복한 생활에 대하여’, ‘한가(閑暇)에 대하여’, ‘영혼의 평정(平靜)에 대하여’, ‘자연학의 문제점’ 등이 있다. 그리스 비극을 모방해 그가 쓴 비극 9편은 셰익스피어 등 후세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

악의 깊은 맛과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나약한 인간이면서도 죽음에는 초연했던 세네카는 진정한 ‘행복한 삶’이 어디에 있는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배부르게 먹고
잔을 모두 비우는 데 목적을 두지 않고
다만 배고픔과 목마름을 달래는 데 목적을 둔다.
나는 친구를 보호할 것이다.
적에게는 너그럽게 대할 것이다.
용서해 달라는 부탁을 받기 전에 먼저 용서하고
고귀한 요구는 기꺼이 들어 줄 것이다.
모든 세계가 내 조국이며,
세계의 통치자는 신이며,
신이 우리 위에 존재하면서
우리의 말과 행동을 심판한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자연이 내 생명을 내놓으라고 요구하거나
이성이 내 생명을 끊어 버릴 때,
나는 나의 바른 양심과 노력을 사랑했었노라고
다른 사람의 자유를 해치거나
내 자신의 자유를 해친 적이 결코 없었노라고 증언하면서
이 세상을 떠날 것이다.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 \'구스타프 슈바브 그리스로마신화\' 역자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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