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의 생태 생명 평화 공동체

평화운동가 김승국의 '공동체의 평화' 김승국l승인2008.03.10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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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체를 국가로 상정하는 경향이 강하다. 국가가 평화를 보장해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국가는 폭력을 독점한 집단이므로, 원론적으로 평화를 보장하기 어렵다. 오히려 시민사회의 평화공동체를 위협하는 경우도 있다. 시민 스스로 아래로부터 풀뿌리 평화 공동체를 이룩하려고 노력하지 않고 모든 것을 국가에 맡기면, 국가라는 리바이어던(Leviathan)이 강권(强權)을 행사하며 전쟁 지향적, 비(非)평화적으로 나아갈 수도 있다. 이렇게 국가의 강권이 폭력 전쟁 지향성을 띠는 것을 제어하려면, 지역의 풀뿌리 민중들이 평화의 주체로 나서야 한다.

국가 중심으로 짜여 있는 평화의 공간을 지역으로 재편하는 주인공은 풀뿌리 민주주의의 담지자인 풀뿌리 민중들이다. 이들의 생활터전인 지역을 중심으로 생태, 생명, 평화 공동체를 이룰 때 비로소 국가의 폭력 전쟁 지향성을 억제할 수 있다. 풀뿌리 차원에서 마을의 평화가 이룩되어야 국가의 평화도 보장된다. 마을이 평화롭지 않은데 국가가 평화로울 리 없다.

마을이 평화의 기본단위라는 관점에서 간디의 스와라지(Swaraj) 운동을 재평가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지역의 생태, 생명 공동체를 역설하는 김지하 선생, 김종철 교수, 나카무라 히사시(中村尙司) 교수의 글을 숙독할 필요가 있다. 이 밖에 많은 학자?논객들의 글을 종합하면서 풀뿌리 평화 공동체의 논리적 근거를 발견하고자 한다.

1. 김종철 교수-민중의 자치와 평화(‘녹색평론’ 2003년 9~10월호)

평화의 문제를 생각하는 자리에서 좀 더 근원적으로 이 문제를 들여다보려면 우리는 불가피하게 오늘날 평화, 무엇보다도 민중의 평화를 어지럽히는 가장 큰 원인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보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서 특히 민중의 평화를 운위하는 것은 평화의 문제를 논의하는 데 결코 빠트려서는 안 될 차원을 주목하기 위해서이다.

그것은 간단히 말해서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풀뿌리 민중의 일상생활 자체가 전쟁과 같은 상황에 놓여있다는 기본적 사실이다. 그리고 민중의 평화라는 개념이 중요한 또 다른 이유는, 지금 국가와 국가, 민족과 민족, 집단과 집단 사이에 일어나는 군사적 충돌이나, 침략이 본질적으로는 지배자들 사이의 갈등과 충돌이지 결코 민중과 민중 사이의 대결일 수는 없다는 가장 근본적이되 흔히 간과되고 있는 사실을 좀 더 명확히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지배자들의 관심이 늘 ‘평화유지’에 있어왔다면, 풀뿌리 민중은 언제나 “평화로이 내버려두어져 있기를” 염원하면서 살아왔다는 점을 (이반 일리치는) 강조한 바 있다. 민중이 이해하는 평화와 지배층이 생각하는 평화는 그 내포가 전혀 다른 것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땅에 뿌리박고 사는 풀뿌리 민중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하루하루의 생존이며, 가족과 이웃들과 어울려 삶의 기쁨을 향유하면서 서로 돕고 보살피면서 다음 세대를 위하여 준비하여 가는 생활이다.

민중생활이 근본적으로 겨냥하는 것은 생존의 순환적인 지속이다. 따라서 그들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들 자신의 개인적, 집단적 생존을 가능하게 하는 땅의 보존과 오랫동안 땅을 돌보아온 공동체의 지혜, 이웃들과의 협동적 관계와 상부상조, 보살핌과 환대, 고통을 견디는 기술, 그리고 자립적 생존을 위한 토대 중의 토대인 이러한 여러 공동자산(commons)이 훼손 없이 보존되는 것이다.

민중에게는 땅이 보존되고 이웃들과의 관계가 살아있는 한 자급, 자치의 근본적으로 평화로운 삶이 가능했고, 국가와 교회의 존재는 그들의 삶에서 부차적, 외면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다. 민중의 자급, 자치, 자율적인 생존의 지속이라는 입장에서 본다면, 노골적인 군사적 공격 못지않게 혹은 좀 더 근원적인 차원에서 더욱 위협적인 것은 이른바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생존의 토대의 파괴일 것이다.(6~9쪽)

2. 김지하 선생-풀뿌리 민주주의와 생명 공동체(‘김지하 전집 2’)

우리의 민주화운동은 생명의 원리에 알맞은, 사람의 생태적 삶의 역사와 조건에 알맞은 정치적 생명공동체 건설, 즉 지방자치제의 보다 높은, 보다 창조적인 단계의 실천으로 향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것을 저는 정치적인 생명공동체 운동이라고 부릅니다. 경제적인 운동이나 노동운동에 있어서도 농민들의 협업적인 유기농 공동체, 지역 농산물 유통공동체, 지역 농산물 가공공동체 운동이 계속 확대되고 발전되어야 할 것입니다.(86~87쪽)

시민사회신문 DB
생명의 원리에 알맞은, 사람의 생태적 삶의 역사와 조건에 알맞은 정치적 생명공동체의 상은 무엇일까. 사진은 개발과 오염으로 홍역을 겪은 시화호 매립지 전경.

이것들이 모두가 생명의 개별성과 전체성이라는 기본 원리,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화엄사상의 원리와도 통하며 수운 선생이 이야기하는 ‘밝고 밝은 운수를 각각 자기 나름대로 밝혀 실현한다’(明明其運 各各明) 또는 ‘한 세상 사람이 옮길 수 없음을 각각 안다’(一世之人 各知不移)로서의 동귀일체(同歸一體)의 기본 정신과 일치하는 생명사상이라고 생각됩니다.(88쪽)

이러한 생명공동체의 건설에 있어서 우리가 바탕을 두어야 할 기본 사상은 사인여천(事人如天)의 정신입니다. 타인에게도 무궁한 한울님, 우주생명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인정함으로써 상호공경하는 정신 위에서 생활공동체, 생명공동체 운동이 진행되어야 할 것이며, 문화운동은 바로 이 정신에 따라 생명공동체 건설운동으로 나아가는 정신적 내용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90쪽)

생명운동으로서의 민주개혁운동은 국민국가가 아니라 개인의 인격실현, 소공동체적 평등과 친교의 성취, 지역자치와 지방정부의 자유로운 복합그물 보따리로서의 주민자치 공동체연합, 곧 풀뿌리 민주주의 개혁에 의해 새로운 지역적 사회생활 양식을 창조함으로써만 비로소 가능하다. 모든 중간경향이 국민국가, 국민의회의 집중과 수렴의 틀 안에서 집권을 기도하는 한 결코 대안이 될 수 없으며 오히려 매우 위태롭다. 결국 생명가치 실현을 목표로 하는 풀뿌리 민주주의 개혁 방향밖에는 없다. 그리고 이젠 시민 자신이 개혁운동에 나설 수밖에 없다.(171~173쪽)

풀뿌리 민주주의의 틀 안에서 생명가치를 중심으로 한 경제가치의 질의 변화와 평등한 분배, 빈부 차이, 노사 갈등, 경영과 생산의 차별을 원천적으로 해소시킴으로써 현존하는 국민경제적 시장질서에서의 평등 실현에 강력한 촉매와 저울과 모델을 창조해야 한다. 그리고 이 공동체는 계약이나 결합이 아니라 공동의 원리, 공생의 원리, 나아가 상호공경의 원리를 바탕으로 우애에 가득 찬 협의체계를 지향해야 한다. 자주관리 소(小)공동체와 공동체 그물로서의 주민운동은 철저히 생산과 생활 전면에서 중층적, 복수적 공동체들의 살아 생동하는 영성적이고 생태적인 공생 네트워크여야 할 것이다.(174쪽)

19세기 말 우리의 동학은 개인 내면의 무궁하고 신령한 우주적 생명의 공경과 개성적 자기실현, 곧 시천주(侍天主)로부터 출발해 인간과 사회와 자연에 있어서의 무궁하고 신령한 우주생명의 자각적인 실현운동이며 영적인 생명가치 존중과 그 실현운동이었다. 동학의 제1의 모토인 지상신선(地上神仙)이 바로 그것이다. 이 지상신선이라는 사회적 생명운동과 당시 국가와의 관계는 어떠했을까?

그 관계는 보국안민(輔國安民)이라는 제2의 모토 안에 함축되어 있다. 보(輔)는 보(保)가 아니다. 국가를 ‘지킴’이 아니라 국가를 ‘도움’이다. 근왕(勤王)과는 전혀 다르다. 지상신선(地上神仙)은 신령한 생명의 개인 및 사회적 실현이지 국가가 아니며 용화세계나 천년왕국과 같은 유토피아가 아니다. 지상신선과 포덕천하(布德天下), 보국안민의 민중적 도덕정치 운동의 산 양식, 신령한 생명가치 실현의 대중적, 지역적 사회운동 양식이 동학의 어디에 있을까? 바로 포접제(包接制)이다.(175~178쪽)

동학의 포접(包接)

동학의 포접은 최치원의 옛 풍류도에 관한 글에서 나온 것이다. 그것은 ‘포함삼교 접화군생’(包含三敎 接化群生)이다. 삼교는 유(儒)의 강기(綱紀), 불(佛)의 견성(見性), 선(仙)의 연생(練生)의 세 가르침이다. 동학은 이 셋을 기독교의 섬기는 사랑과 함께 쌓은 도덕의 보따리다. 견성이 자기발견의 우주적 영성이라면 연생은 생명의 보전과 향상이요, 강기가 사회윤리라면 섬기는 사랑은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간의 상호공경일 것이다. 동학의 포(包)는 다종교적 도덕의 공존을 개인 내면과 생명, 공동체, 사회 자연의 관계에서 가능하게 한다.

동학의 포덕(布德)의 역사에서 포(包)는 접(接)이 한 마을 등의 가족, 친척, 친지, 계, 두레 등의 생산, 생활, 혈연적 바탕을 가진 개방 확산적 영적인 공생공동체였는데 비해 숱한 이질적인 다양한 특성을 가진 ‘접’들을 겹쳐 싸는 산 그물 보따리로서 당시의 마을 주민과 주민 사이의 생동하는 삶의 접촉관계인 상권(商圈), 즉 통혼권(通婚圈)을 따라 싸가면서 퍼져나갔다. 그래서 접을 ‘처남, 매부 포덕’의 보따리라고 부른다.

요즘 말로 하면 지역과 지역 사이의 지장적(地場的)인 산 연관을 이미 함축한 자치단위이다. ‘포’는 접과 마찬가지로 완전한 주체성, 독자성을 가지고 있었다. 다만 그것은 개방적 주체성이었고 도소(都所)의 경통(敬通)이나 다른 포나 접의 ‘사발통문’, 즉 가르침이나 깨우침, 영적 정보라는 질(質) 또는 신령한 메시지에 대해서 자기 자신의 영성을 통해서지만 언제나 개방되어 있고 순명(順命)하는 영적인 소통그물이다.

즉 분산, 수평적, 개성적인 정보, 교양 네트워크이기도 하다. 그러면 접은 무엇인가? 최치원은 ‘접화군생’(接化群生)이라 했다. 군생(群生)은 인간과 동식물, 무기물 전체를 가리키는 중생(衆生)이다.

그러나 또한 인간의 갖가지 생산활동과 소비, 문화, 영적 생활 등 뭇 삶의 양태들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러한 다양한 생명과정의 삶에 동학의 영적 생명사상, 생명가치를 가르쳐 나름 나름으로 제 삶의 근원생명을 회복하며 서로 공경하고 친교하며 공생공산하는 생산적 삶의 열린 관계망이다.

접은 개방적인 소공동체이다. 정신문화적 친교와 생산의 나눔과 평등한 경제관계, 인격적 관계 등이 모두 공경으로 보장되는 예컨대 우리의 ‘자주관리 생산공동체’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주민자립 경제나 자치, 주민 생명문화 운동의 소공동체를 접으로 부르는 것이 좋을 것이다. 포와 포, 접과 접, 포와 접들 사이, 그리고 계속 움직이고 있는 도소(都所)와의 확산하는 그물 같은 소통망이 ‘사발통문’인데 이것은 구심보다 원심력 중심의 질적인 무궁확산 진화와 여러 쌍의 상호통신의 그 이중성의 무한 복잡화, 그리고 끝없이 확산하는 중층적 차원 변화의 탁월한 네트워크의 특징을 드러내고 있어 현대 정보소통망의 새로운 틀로서 매우 빼어나다.

김승국 평화만들기 대표

김승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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