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픔이 있었다

내 인생의 첫 수업[36] 이호l승인2008.03.10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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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 중반에서도 후반으로 접어드는 나이의 누구라도 그 인생에 있어 다치고 아파하고 고민하고 좌절한 우여곡절이 없을 수 없겠다. 그러한 상처들은 오늘의 나를 있게 한 중요한 과정이기에 내 인생의 중요한 수업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단순히 수업이라 치부하기 힘든 것은 때때로 잊은 듯 했던 상처들이 다시 돋아나곤 하기 때문이다.

얼마 전 FTA 반대 집회 도중 한 사람이 분신을 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막연한 안타까움이 들었다. 그런데 분신한 사람의 이름이 어딘지 많이 익숙했다. 내가 잘 아는 사람이었다. 1990년대 초반 봉천동 철거지역에서 함께 철거투쟁을 했던 주민이었다. 그 지역의 철거가 끝난 얼마 후에 나는 그 지역을 떠났고, 가끔 그 지역에 일이 있어 갈 때마다 그 분을 만났었다. 그 때마다 항상 웃으며 내 손을 꼭 잡고 “고맙다”는 인사를 하곤 했다. 자신들의 철거투쟁을 조직하고 지원해 준 것이 고마웠다는 뜻이다.

주민조직화의 환상

과연 그 분이 그 철거투쟁을 통해 우리 사회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처음 하게 되었는지, 그 전부터 그러할 생각과 활동을 하고 있었는지 잘 알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진심으로 후자이기를 바랐다. 내가 그 분의 죽음에 조그마한 영향이라도 끼쳤다는 사실을 지금도 받아들이기 어렵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내가 해왔던 사회운동에 대한 회의를 가졌던 적이 몇 번 있었다. 그것은 내가 해왔던 주민 조직화 활동이 정작 그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를 생각하면서였다. 장장 6개월이란 시간 동안 주민조직화의 경험이 풍부한 선배들로부터 조직화에 대한 훈련을 받았고, 그래서 처음 빈민지역에 간단한 이삿짐 챙겨서 들어갔을 땐 자신감이 차있었다. 그것이 내 실수의 시작이었다.

내가 뭔가를 잘 할 수 있다는 착각! 실상 주민조직화는 내가 잘해야 하는 것이 아니고, 주민들이 스스로 뭔가를 잘 하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뭔가를 잘 하려는 욕심이 나를 부추겼다.

어느 날 길거리에서 몇 년 전에 서초동 비닐하우스촌에서 함께 철거투쟁을 하던 주민을 우연히 보았다. 반가운 마음에 그 사람에게 손을 흔들며 다가서는데, 그 사람은 내 반대쪽으로 황급히 걸어가 버렸다. 나를 못 봤는가? 분명히 나를 본 것 같았는데…. 철거가 끝난 후 임대아파트에 입주한 주민들을 오랜만에 만나 함께 식사도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낸 적이 있었다. 그 때 합석한 한 아주머니, 철거투쟁 당시 주민조직의 부위원장이었다. 당시 투쟁으로 많은 고소고발 등의 복잡한 문제가 얽혀있었는데, 이 투쟁이 끝난 지 어언 1년이 다 가도록 이 분은 당시 문제로 법원에 오가고 있었다. 그 뿐만이 아니라 당시 입은 부상으로 아직도 병원에 다니고 있다고 했다.

희생과 참여의 의미

이와 유사한 사례를 몇 번 더 겪으면서 그간의 활동에 대한 말할 수 없는 회의가 닥쳐왔다. 아마 내가 유혹했던 그 길을 가는 것이 그리 큰 희생을 거쳐야 하는 것임을 그 주민들이 사전에 알았다면 결코 내 유혹에 빠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러한 희생이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고도 주민들을 그 과정으로 유혹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었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어떤 사회운동의 명분이나 활동의 필요성도 정작 당사자들의 희생을 전제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이제 우리가 만들어 가야 할 세상과 사회는 가난하고 힘 없는 서민들의 희생을 통해서가 아니라, 이들이 기쁘고 즐거운 일에 참여할 때 만들어 진다는 것을.

*이 글이 지금도 힘겨운 투쟁으로 내몰릴 수밖에 없는 이들을 비하하거나 그 용기를 무시하는 듯이 읽혀졌다면 사과를 드립니다. 그들에게 사회적 연대를 표하는 것이야 말로 같은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으로서의 당연한 예의이자 자세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개인적 경험에 의한 개인적 교훈의 내용으로 받아들여주시기 바랍니다.


이호 풀뿌리자치연구소 ‘이음’ 소장

이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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