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은 미래의 과거형이다

오키나와 평화기행을 다녀와서 글=이시우l승인2008.03.17 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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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권주의 전쟁이 남긴 상흔 동아시아 공동의 기억
여정마다 던지는 질문 “유아시아 평화의 미래는?”


지난해 5월 약 2달에 걸쳐 남한 전역에서 진행됐던 ‘스톤워크 코리아2007’이 올해에는 ‘스톤워크’ 아닌 단순한 ‘피스워크’로 오키나와와 제주도에서 ‘오키나와-제주도 평화기행’이란 이름으로 각각 진행될 예정이다. 내후년 이어질 ‘베트남 스톤워크’의 중간다리인 셈인데, 유독 오키나와와 제주도를 평화기행 예정지로 정한 이유는 그만큼 이 두 섬이 지닌 강한 상징적이고 운동적인 역사성 때문이었다. 양 섬은 일제가 일본의 태평양 전쟁 패배와 함께 어떻게 미제로 전화(轉化)해갔는가, 그 ‘전화’가 양국과 동아시아의 근대화에 끼친 영향은 무엇인가와 관련해서 아직도 수많은 질문을 우리에게 던지고 있다.

그 중 지난 2월 중순 5박 6일 일정으로 치러진 ‘오키나와 평화기행’에 먼저 다녀왔다. 함께한 이들 가운데는 ‘스톤워크’ 프로그램의 한국 실행위원인 강제숙(평화시민연대 대표) 씨를 비롯해서 ‘제2의 히로시마’라 불리는 합천에서 온 원폭피해자 1세분들, 국가보안법으로 기소됐다가 얼마 전 1심 재판에서 무죄판결을 받은 평화사진작가 이시우 씨와 가족, 한일 양국을 ‘여전한 식민지’로서 사유해온 사진작가 이재갑 씨, 원폭 군대 등 ‘전쟁을 일상화하는’ 인프라들에 대해 꾸준히 작업해온 젊은 다큐멘터리 감독 김환태씨 등이 있었다.

각각 어깨에 오키나와 근현대사가 던지는 과제들을 잔뜩 짊어지고 돌아갈 각오를 하고 참가한 이들이었다. ‘원폭피해자협회’ 합천지부의 간부들은 시민사회의 힘으로 곧 합천에 지어질 ‘원폭자료관’ 건립을 추진해야할 분들이었고, 기타 사진 영상작가들 역시 근대 동아시아를 한데 엮어온 질긴 운명과도 같은 저 전쟁과 식민화의 매듭을 자신들의 작업을 통해 올해 안에 어느 정도는 풀어내야할 모양이었다.

평화기행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었다. 남부지역(한국인위령탑, 평화기념자료관, 하에바루문화센터, 도카시키섬)을 1945년 봄 섬주민의 1/4을 도륙낸 ‘철의 폭풍’ 오키나와 전쟁을 중심으로 둘러본 다음 중북부지역 미군기지 확장건설 반대 주민투쟁의 현장들(다카에, 헤노코, 후템마, 기노완 등)을 거쳐 미군 본토상륙이 맨 처음 이루어진 중남부 요미탄촌 유적들을 답사했다. 희생을 기리는 표식이 있든지 없든지, 일행이 가는 곳마다 희생자들의 무덤 아닌 곳이 없었다.

사진작업을 위해 작년 따로 오키나와를 방문하기도 했던 이시우 씨가 보내온 이번 오키나와 평화기행의 소감문을 전재한다. /김레베카 객원기자(성공회대 민주주의와사회운동 연구원)
평화기원공원의 평화탑

순간 이동하듯 비행기로 여행지에 도착하는 것은 편리한 만큼 건조하다. 오키나와 가는 첫 여정이 배안이었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인사를 나눌 수 있었고 서로의 생각을 헤아릴 수 있었다. 무엇을 볼 것인가에 앞서 누구와 볼 것인가를 선택하고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진 것이다. 새로운 것을 찾아나서는 여행길에 설레일 시간을 가져본다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설레임의 시간만큼, 기다림의 간절함만큼 우리는 여행을 통해 새로운 것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1박의 배 여행을 마련한 강제숙 선생님의 섬세한 배려가 고마웠다.

배가 도달할 육지와 함께 배가 떠 있는 바다에, 목적과 함께 수단에 대해 주목하는 것은 중요하다. 여행에서 얻을 교훈의 5할은 길 위에 있을 터이다. 더구나 그 길이 현해탄이라면 더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대마도해협은 유라시아질서재편의 마지막 절정기였던 20세기 초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이 이끄는 러시아함대와 도고제독의 일본함대가 격돌하여 하루 만에 승패가 결정 난 바다였다. 러시아를 앞세운 프랑스, 독일 등 대륙국가와 일본을 앞세운 영국, 미국등 해양국가의 충돌은 결국 러일전쟁으로 수렴되었다. 그러나 전장은 일본과 러시아가 아닌 한반도였다. 그 시작은 인천이었고 끝은 바로 이곳 현해탄이었다. 바다는 그저 물길이 아니라 역사의 충돌과 국가의 성패와 인간의 영욕이 기록된 서사시이다.

이 바다의 균형이 무너지자 수많은 조선인들이 바다 위에 눈물을 뿌려야 했고, 뱃길은 눈물길이 되었다. 우리는 20세기가 낳은 그 눈물길의 흔적을 찾아 지금 장도에 오른 것이다. 바다위에 드리운 밤하늘의 별들을 바라보며 우리 배는 무심히 현해탄을 건너고 있었다.

전쟁의 참상, 피아가 없다

이른 아침 배는 후쿠오카항에 태연한척 도착해 있었고, 구속기간 내내 나의 구명을 위해 일본에서 열심히 노력해준 오가타 선생과 통역을 맡으실 환갑의 청년 기무라 선생님을 비롯한 일본측 참가자들의 환대가 항구에 기다리고 있었다. 오키나와까지는 비행기편을 이용했다. 일본 참가자분들과 숨고르기 할 시간이 없었던 이 순식간의 이동으로, 그리고 오키나와에서의 빡빡한 답사일정으로 나는 숙제를 미루고 떠난 소풍처럼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다. 그렇다고 이미 굴러가는 자전거바퀴를 멈춰 세울 수는 없는 일이었다. 어쨌든 가보는 것이다.

오키나와에서의 첫 여행지였던 평화기원공원은 두 번째였다. 첫 방문 때 느끼지 못한 새로운 감상을 이번 방문에서 깨닫게 해주었던 사람은 재작년쯤인가에 만난 미국의 한 퀘이커교도였다. 그들은 이곳 평화기원공원에 다녀온 감상을 말하며 워싱턴의 베트남 전쟁기념공원과 비교했다.

워싱턴에는 베트남전에서 죽은 미군들의 이름만이 기록되어 있는 반면, 오키나와인들은 미군과 일본군과 그들에 의해 죽임당한 오키나와인과 조선인, 중국인등 모든 희생자들의 이름을 새겨놓은 것에 대해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말했다. 과연 그랬다. 가해자조차도 전쟁의 피해자라는 생각이 가해자에 대한 증오 대신 자리하고 있었다.

서울의 동작동 국립묘지와 부산의 유엔군묘지, 파주의 적군묘지에서 이런 평화사상과 문화를 만나기란 쉽지 않다. 더구나 민간인전쟁희생자들의 자리는 어디에도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전쟁의 기념이 또 다른 전쟁을 각오하게 하는 비장함과 엄숙주의의 재생산이 되지 않길 바란다면 전쟁의 죽음 앞에 적과 아의 구분도, 군인과 민간인의 구분도 있어서는 안될 일이다. 전쟁에 대해 분노하고 혐오하는 일에서부터 평화의 기원과 가능성을 찾고자 하는 것은 무모한 이상주의일까.

해노코 해상기지 건설을 반대하는 이토만시 서명운동 현장에서. 왼쪽이 이시우 씨

김현옥 선생님과의 만남은 충격이었다. 그를 통해 알게 된 오키나와주둔 일본군위안부 배봉기 할머니의 삶에서 슬픔과 연민을 떨칠 수 없었다. 그런 마음의 한구석에서도 내 머리를 떠나지 않는 단어는 전쟁포로였다. 위안부는 전쟁포로로 취급되었다는 것이었다.

1945년 일본의 항복은 무조건항복으로 알려져 있지만 미 국무부는 일본과의 마지막 물밑조정을 통해 천황제를 인정해줄 것과 전쟁포로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에 합의했다. 일본의 문화에서는 명예로운 자결만이 있을 뿐 포로가 된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일본군은 전쟁포로로 취급되지 않았는데 일본군에 강제 징용된 조선인은 포로취급을 했다는 것은 혹시 김현옥선생의 기억의 오류일까? 아니면 일본군과 달리 조선인이나 오키나와 인에 대해 미군은 이중차별을 부과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 답은 오키나와를 떠나는 날 범상치 않은 인상을 준 요미탄촌의 치바나 선생으로부터 들을 수 있었다.

그의 답은 전자가 아닌 후자였다. 미군이 일본국을 적국이라고 규정하면서도 유연한 정책을 편 것에 비하면, 조선인민을 적국민이 아닌 해방된 국민이라고 규정하면서도 일본보다 훨씬 가혹한 정책을 편 것은 언뜻 모순처럼 느껴진다. 적과 아의 구별보다 서구와 비서구의 구별이 미군점령정책의 문명적 토대가 아니었을까 나는 의문을 던져본다.

한반도의 운명과 오키나와

카데나 공군기지를 지나며 우리는 카데나 기지사령부 건물에 게양된 일장기와 성조기와 유엔기를 볼 수 있었고, 그것은 유엔사에 대해 어떤 복잡한 설명도 필요 없게 만드는 강렬한 상징이었다. 오키나와와 한국평화운동의 관계는 현대역사를 뒤돌아보면 연대가 아닌 연합의 관계를 요구한다는 생각이다.

조선인 강제징용자가 많았던 요미탄 지역에서 2006년에 세워진 한의비. 조각가 긴조 마루 씨의 작품
1945년 8월 스틸웰을 대신하여 갑작스런 조선으로의 전보발령을 받은 카데나 기지의 하지장군은 선단을 이루어 야밤에 출항을 명령한다. 그리고 이들 야간항행 함정들은 등화관제를 실시했다. 아직 일본의 항복을 연락받지 못했거나, 이에 불응하는 일본군 잔당의 습격을 염려해서였다. 하에바루 문화센타에서 나는 미군의 점령에 저항한 오키나와인들의 투쟁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만약 미군뿐 아니라 일본군에 대해서도 저항했던 오키나와의 저항세력이 1945년 8월 1주일 정도만 더 견고한 투쟁을 하며 버텨주었더라면 한반도의 운명은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미국기밀해제문서를 통해 밝혀진 수많은 기록 중에 미국이 한반도에 지정학적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었다는 내용은 전혀 찾기 힘들다. 맥아더사령관은 오키나와가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심지어 일본본토조차 군사적 관심에서 벗어나 있었다. 미국의 한국에 대한 점령은 소련군이 빠른 속도로 진주하는데 대한 위기의식과 일본의 항복이 너무 빨랐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시간분초를 다투는 상황에서 8월 중순경에 이미 소련군은 서울에 도착해 있었고 부산까지 내려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소련이 더 이상 남진할 의사가 없을 수도 있었지만, 오키나와에서의 일주일정도의 출발지연은 하지의 인천도착을 불가능한 것으로 만들 가능성이 있었다. 이때처럼 오키나와와 한국의 역사가 숨 막히도록 긴밀하게 전개된 적은 없을 것이다.

또한 1995년 도리시마의 열화우라늄탄오발사고와 1997년의 연천군열화우라늄탄 오폭사고, 그리고 수원청주오산비행장과 나란히 카데나에 보관되어 있는 열화우라늄탄 저장문제, 한미연합군사연습마다 참여하는 핵잠수함의 운항노선이 로스앤젤레스-괌-오키나와캠프화이트비치-진해라는 사실 등은 오키나와와 한국 사이에 존재하는 국경이 미군에겐 무의미하며, 그저 하나의 전장일 뿐임을 증명한다.

이와 더불어 결정적인 한-일-오키나와 관계의 고리는 유엔사이다. 1951년 9월 8일 일미방위조약과 함께 체결된 요시다-애치슨 교환공문에 의하면 ‘일본정부는 한국에서의 유엔군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모든 시설과 역무를 제공한다’라고 되어있다. 이에 의해 요코스카 미해군기지, 요코타 미공군기지, 캠프자마, 캠프 사세보 미해군기지, 그리고 오키나와의 캠프 카데나 미공군기지, 캠프 후템마 미해병대기지, 캠프 화이트비치가 유엔사후방기지이며 이는 유사시 유엔군사령관이 주한미군사령관의 범위를 넘어 한일주둔 미군 전체를 통제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같은 야전사령관이면서도 주일미군사령관이 3성 장군인데 비해 주한미군사령관이 4성장군인 것은 유사시 한일미군에 대한 지휘통제의 필요성 때문이다. 일본정부와 유엔사간 행정협정에 의하면 유엔사 해체시 일본의 미군은 유엔사 후방기지로부터 90일 이내에 철수해야 한다. 유엔사문제에서 특히 한-일-오키나와의 운동이 연대를 넘어 연합으로 발전되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이재갑 씨의 사진집 식민지의 잔영을 보는 후쿠오카 지역 활동가 이토 간지 씨(오른쪽)와 강제숙 씨(평화시민연대 대표)

이번 여행에서 끝내 풀지 못한 숙제는 1945년 이후 오키나와 미군정의 실태였다. 미군정과 관련된 야전교범은 1940년대 이탈리아와 아프리카북부 점령지역에서 최초로 만들어지고 오키나와에서 실험되었으며 남한에서 완성되었다. 항복-종전-점령-군정-민정-선거실시-민간정부수립이라는 일련의 과정에서 오키나와와 제주도와 토라보라계곡과 팔루자 마을의 학살이 초래되었다.

미군정의 일반화된 점령정책

미군정이란 어디서나 보편성을 보인다. 군정기간동안 저항세력의 탄압과 통제에 부분적인 성공만을 이루었을 때 선거를 통한 민간정부수립이 저항에 직면하게 되고 이들 저항에 대한 대대적인 반격으로, 통치력이 미치지 않는 변방의 한 지역에 저항세력이 집결하게 되고, 이들에 대한 무자비한 폭력과 살상에 기초하여 총선거가 실시된다.

친미정부수립의 배후에는 군정교범과 학살이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미군 군정교범의 내용이며, 그 교범이 발전, 완성되어 온 역사이다. 한반도 전쟁시나리오에서 북의 점령이나 붕괴 뒤에 진행될 과정도 이들 군정교범에 기초해 있다. 미군정교범의 태반노릇을 했던 오키나와 미군정의 경험을 소상히 들을 기회는 결국 갖지 못하고 말았다.

오키나와와 제주의 역사에서 직감하게 되는 공통성이 비단 과거형이 아닌 준비된 미래형이란 생각에 이르면 오키나와-제주평화 여행이 그저 범상한 기억의 여행이 아님을 발견하게 된다. 기억은 미래의 과거형이다. 우리의 기억이 시간이 흐를수록 생생해지는 것은 기억하고자 하는 근거가 미래에 있기 때문이다. 유아시아평화의 미래를 찾는 자 있다면 오키나와를 볼일이다. 그리고 제주도를 볼 일이다.

사진=김레베카 객원기자

글=이시우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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