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회의한다, 고로 평온하다

철학여행까페[25]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l승인2008.03.24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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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희
피론이 태어난 엘리스지역에 있는 올림피아경기장

지난번까지 에피쿠로스학파와 스토아학파를 다루다 보니 로마 시대까지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전개되었다. 그런데 로마시대로 건너가기 전에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철학 학파가 있었다. 그 학파의 이름은 회의주의이다. 이 회의주의 학파의 시조는 피론(기원전 360~270년경)이다. 이 회의주의학파는 그의 이름을 따서 피론주의라고 불리기도 한다.

회의주의 철학자 피론

‘회의’, ‘의심’은 철학의 중요한 방법이다. 우리는 ‘의심하는 것’을 무척 좋지 않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사실 철학은 의심하는 데서부터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파르메니데스는 눈에 뻔히 보이는 현상들을 의심했고, 소크라테스는 진리를 외치던 소피스트들을 의심했다. 데카르트는 꿈뿐만 아니라 깨어 있는 현실조차 의심했다. ‘회의’를 통해 철학자들은 새로운 깨달음과 진리에로 나갔다.

이 ‘회의’를 철학의 모토로 삼았던 사람이 피론이다. 피론은 펠레폰네소스 반도의 서부 지역에 있는 엘리스에서 태어났다. 처음에 그는 무명의 화가였는데, 그림에 특출 난 재주는 없었다.

그림을 포기한 그는 철학으로 방향을 바꾸어 소크라테스 학파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받기도 하다가 나중에 데모크리토스 학파의 아낙사르코스의 제자가 되었다.

스승 아낙사르코스가 언젠가 연회석상에서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만난 일이 있었다. 그때 대왕은 그에게 그날 요리에 대해 물은 적이 있었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대왕이시여, 요리는 훌륭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사옵니다.”

“무엇이 부족한가?”

“그것은 페르시아의 참주 니코크레온의 머리입니다.”

이동희
올림피아 신전에는 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제우스 상이 있었다. 제우스 상의 손 위에 있었던 니케 여신상의 모습
그날 연회석상에는 참주 니코크레온도 있었다. 참주 니코크레온은 그날의 일에 대해 앙갚음 할 것을 마음 속에 새겼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죽고 나자 아낙사르코스는 참주 니코크레온에게 잡혀 키프로스 섬으로 끌려갔다. 니코크레온은 그를 커다란 절구통에 넣고, 쇠공이로 내리 찧으라고 명했다. 그런 다급한 상황에서도 아낙사르코스는 이렇게 외쳤다.

“아낙사르코스의 껍데기는 찧을 수 있을지 몰라도 아낙사르코스를 찧어 버릴 수는 없도다.”

이러한 면모를 지닌 스승에게서 피론은 깊은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그는 기원전 334년에 스승과 함께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동방 원정에 참여하여 10년 동안 동방의 여러 곳을 거쳐 인도까지 갔다 왔으니까.

부정도 긍정도 말라

그는 스승과 더불어 인도에서 나체수행자, 금욕적인 고행승, 철학자들의 무욕 평정한 생활태도를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던 것 같다. 그는 마흔 살의 나이로 고향으로 돌아 와, ‘회의주의’ 철학을 이따금 가르치며 조용하고 고독하게 살았다. 그래도 엘리스의 시민들은 그를 존경해 대사제에 임명하였고, 모든 철학자들에게 세금을 면제해 주었다고 한다.

피론의 가르침은 모든 것에 대한 판단을 유보하고 그것을 부정하지도 긍정하지도 말라는 것이다. 그는 ‘사물의 진실’은 우리가 ‘파악할 수 없는 것’이기에 사물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혹은 좋다 나쁘다 판단할 수 없으니 판단을 중지하라는 것이다. 판단을 한다는 것은 혼란과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한 논쟁만 가져 올 뿐이다.

그는 의심을 통해서 ‘판단하지 않는 마음의 상태’(에포케)와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마음의 상태’(아파시아) 그리고 ‘흐트러짐 없는 평온한 마음의 상태’(아타락시아)에 도달하고자 했다.

언젠가 피론은 이 아타락시아의 마음을 새끼 돼지의 마음에 비유한 적이 있었다. 한번은 그가 배를 타고 가다 폭풍우를 만난 적이 있었다. 사람들은 불안한 마음에 안절부절 어쩔 줄 몰랐다. 그때 그 배에서 아무런 동요도 없이 태연하게 무엇인가를 먹고 있는 새끼돼지가 있었다. 그는 사람들에게 그 새끼돼지를 가리키며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한다.

“현자가 되려면 이 새끼돼지처럼 마음이 평정한 상태를 유지하라!”

이동희
피론주의적 회의주의자로 알려진 몽테뉴
새끼 돼지와 같은 평정심

회의주의의 장점은 우리로 하여금 자신이 진리를 알고 있다고 믿는 독단론에서 벗어 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유명한 ‘수상록’을 쓴 몽테뉴는 그리스어로 판단을 삼간다라는 뜻의 ‘에페코’(ΕΠΕΧΩ) 라는 말을 메달로 새겨 무슨 일에나 가볍게 단정하지 않도록 스스로를 경계했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그는 마음의 평형을 잃지않고자 했다.

피론은 한권의 책도 쓰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티몬, 아이네시데모스, 누메니오스등의 제자들이 그의 말을 글로 남겼다. 섹스투스 엠피리쿠스는 ‘피론주의 개요’라는 책을 저술하기도 했다.

피론은 호메로스를 좋아해 그가 쓴 다음과 같은 시구를 자주 읊조렸다고 한다.

참으로 나뭇잎들의 세상이야말로
인간 세상의 모습과 다름이 없다.
때론 바람이 불어와서 나뭇잎을 땅에 떨어 뜨려 놓지만
또 한편에서는
숲 속의 나무들은 무성하게 잎이 돋아 나 봄철이 돌아 오곤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인간 세상도
한편에서 태어나고 또 한편에서
사라져 가는 것

어쩌면 이 시에서처럼 인간의 삶은 나뭇잎과 같은지도 모른다. 한 순간 피고 지는짧은 생애에 우리가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 \'구스타프 슈바브 그리스로마신화\' 역자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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