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이족 한자 때문에 중국 문맹자 많으니 어쩔 거요?

강상헌의 한자, 인간의 맛/글과 계(契)-계담설화 서(序) 강상헌 논설위원/우리글진흥원장l승인2019.04.01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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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천암의 글자 숲에 사는 대장장이 계담이 기억하는 오래전 이야기 즉 설화(說話)랍니다. 고천암(鼓天庵)은 북태평양의 동아시아지중해 가운데 흑산(黑山)과 거문(巨文) 사이 어느 신령한 바위 아래 자고로 인심 낙낙한 작은 마을이지요. 이 부근은 먼 바다도 지나는 여러 뱃길들이 엇갈려 농사와 어로(漁撈) 말고도 산업이 컸고, 이름처럼 유유(幽幽)한 풍류와 큰 학문으로 번창했습니다. 고인돌과 패총, 옹관묘 품은 큰 무덤들이 즐비했지요. 문명의 새벽, 그 여명이 보듬은 고천암과 바다는 기운이 넘치는군요.

▲ 화순 고인돌, 우주의 신비한 기운 감도는 고천암 일대는 자고로 고인돌 조개무덤 옹관고분이 즐비한 번화가였다.

문명은 문자가 여는 법, 인류 깨운 인문(人文)의 연모인 갑골문이 기지개를 켠 것은 이 바다 건너편 황톳빛 하(河)의 강변이었지요. 지중해의 이쪽 바닷가 고천암과 기운이 서로 통한 것이려니 싶은 증거들을 봅니다. 명상(冥想), 깊고도 너른 하늘의 이치를 엿보는 것이지요.

‘글’은 동이(東夷)겨레가 쓰는 어문(語文)의 이름입니다. 크다는 뜻 ‘한’을 덧대 한글이라고도 하지요. ‘꽃’을 ‘꽃’이라 하듯, 글을 가리키는 말로 글만큼 더 적절한 말이 있을까요? 말과 글은 겨레의 혼을 담는 신성한 그릇입니다. 우리의 본능일 터이지요. 글자가 없었던 때 사람이 뜻을 나타내려면 결승(結繩)이라고 하여 노끈을 묶거나, 동굴의 벽이나 흙바닥에 긋거나 그려야 했습니다. 바다 저쪽 신화 속 창힐(蒼頡) 선생도 이 대목을 많이 궁리하여 여러 글자를 빚었다는 얘기를 우리는 많이 듣지요.

쌀 세(三 삼) 가마니를 빌리고 나무막대(丨 곤)에 칼로 이를 새겼다니, 옳지 이렇게 그리면 되겠네요. 丰과 칼 그림(刀 도)을 붙이고, 사람 사이의 일(약속)이라는 뜻으로 사람 모양 大(대)를 아래에 놓읍시다... 처음에는 이렇게 契라는 글자와 비슷한 그림을 그렸겠습니다.

옛 사람들에게 하나, 둘의 다음(셋)은 많은 것이고 좋은 것이었습니다. 예쁠 봉(丰)이 곡식 무성하게 우거져 좋다는 뜻 가지게 된 계기이지 않았을까요? 돈의 상징이기도 한 금(金)이 셋 모이면 ‘기쁘다’는 흠(鑫)자가 됩니다. 옛 사람들 마냥 三을 예로 든 까닭입니다. 발해를 멸망케 한 거란을 契丹이라고 씁니다. 契는 거란을 의미하는 글자로도 쓰였는데 이때의 발음은 [글]이지요. 붉다는 단(丹)은 [란]으로도 읽습니다. 牧丹(목단)이 5월 영랑 시인의 꽃 ‘모란’인 것과 흡사합니다. ‘글란’이 契丹 즉 거란이네요.

‘글’이라는 그 발음이 한글의 글과 통한다고 하니 신통하지요? 우리말의 글에 걸맞은 문자(한자)로 그 그림글자 契가 생겼을 것으로 조심스레 짐작합니다. 契의 ‘글’ 발음이 어찌어찌하여 거란을 표기하는 문자로 활용됩니다. 가차(假借) 즉 빌려쓰기의 형식이군요. 역사의 흐름 속에서 이런 사실은 망각의 늪으로 가라앉았지요. 거란을 契丹이라고 표기한 기록이 없었다면 契가 글이라는 이런 사실마저도 찾을 수 없었겠네요. 그리하여 우리 겨레 언중(言衆)의 말글생활에는 ‘글’이란 발음(소리)과 그 뜻만 남게 되었습니다. 세종 큰 임금이 훈민정음을 지어 내기 전까지의 사정입니다.

한자의 바탕 또는 첫 한자인 갑골문의 그림(기호)에는 契의 아래에 大자가 없거나, 두 손으로 받드는 모양 廾(공) 또는 나무그림(木)이 있었답니다. 사람이 제 뜻을 칼을 써서 나무에 두 손으로 새긴 것은 거북 배딱지(甲 갑)의 갑골문보다 이른 시기였을 것입니다.

그 개념 또는 이미지의 우리 이름이나 발음은 ‘글’이었고, 내내 사람들 마음(뜻)을 적는 기호가 되었지요. ‘글’ 글자는 물론 발음을 그런 뜻으로 쓰는 것은 우리 겨레뿐입니다. 다만 잊고 있었지요. 契(계)가 우리글의 뜻과 함께 그 소리도 보듬고 있었다는 사실 말입니다. 동아지중해 문명의 증거의 하나일 契는 이 지중해의 역사 속에서 계약(契約) 약속의 뜻으로 쓰이고, 우리 사회에서는 ‘곗돈’ ‘곗날’처럼 금융시스템으로도 중요하게 이용되어 왔습니다.

상나라의 다른 이름은 은(殷)입니다. 황하의 지류였을 원하(洹河) 기슭의 은허(殷墟·중국 허난성 안양시)는 문자(文字)의 첫 역사를 품은 갑골문의 보금자리였습니다. 문자는 한자(漢字)의 원래 이름이지요. 고대의 황하, 등용문(登龍門) 하류의 평야지대에는 여러 겨레가 모여 살았습니다. 동이겨레도 그 중의 하나였겠지요. 3000년전 상(商)나라 역사, 갑골문 변천사에는 우리 선조로 추정되는 이(夷) 또는 동이의 명칭이 적지 않게 나옵니다. 상나라의 주류(主流)가 동이 계통이라는 학설도 예전에는 드물지 않았지요. 중국이 동북공정 등 ‘역사 정리 작전’을 펴기 전의 일입니다.

지금 고천암의 사람들은 동이입니다. 중국이나 베트남, 필리핀 등지에서 온 겨레도 함께 삽니다. 우리 마을의 엄마와 아내이기도 하고, 저마다의 조국에서 아름답게 살고자 열심히 일하는 장한 이웃이기도 하지요. 동아지중해에서 보는 인류애(人類愛)의 새 풍경입니다.

마음 열면 역사가 새로워집니다. 최제우 전봉준과 농민군들의 동학(東學)의 비전, 인내천(人乃天)의 개벽(開闢)을 펼칩니다. 글자 숲 대장장이 계담이 글(契)에서 본 세상의 본디, 계담설화의 서막(序幕)을 이렇게 감아올립니다.

▲ 한자의 바탕 또는 첫 한자인 갑골문의 그림(기호)에는 契의 아래에 大자가 없거나, 두 손으로 받드는 모양 廾(공) 또는 나무그림(木)이 있었다. 사람이 제 뜻을 칼을 써서 나무에 두 손으로 새긴 것은 거북 배딱지(甲 갑)의 갑골문보다 이른 시기였을 것이다.

토막새김

“우리말글, 한자를 만드는데 큰 영향”

‘동양평화론’은 웅장하다. 일본 정치거물 이등박문 총살 작전으로 체포된 대한민국독립군 안중근 장군이 사형 당할 때까지 감옥에서 썼던 글이다. 한중일(韓中日) 등의 공존과 번영을 위한 새로운 인식을 폈다. 유럽연합(EU)같은 아시아 지역의 경제문화공동체를 꿈꾼 것이다.

당시의 막강 일본이나 늙은 호랑이 중국을 다 합쳐도 찾을 수 없었던 크고 장쾌한, 품격 높은 사고(思考)의 신세계라고 김용운 선생은 최근 저서 ‘역사의 역습’에서 평가했다. 장군은 이 글을 마칠 때까지 사형 집행을 미뤄달라고 요구했으나 일본은 거절했다.

일본과 미국서 공부한 수학철학자로 동양문명을 명상해온 선생의 ‘큰 그릇 안중근 론’이다. 선생은 동아지중해 국가들의 공동체 운명을 내다본 장군의 혜안(慧眼)과 바른 정치의 힘을 오늘 난국(難局)의 해법으로 제시한다. 그 구체적 방법론은 한반도 중립국화(中立國化)다.

계(契)와 ‘글’의 인연과 관계는 갑골문 전문가이기도 했던 문자학자 故 진태하 박사 생전의 주장 등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다. 그는 우리 선조, 우리말글이 한자를 만드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고 가르쳤다. 갑골문 등 한자 형성의 주요 계기에 동이겨레도 함께 참여했다는 것이다.

“동이족이 까다로운 한자 지어 중국에 문맹자 많으니 이를 어쩔 거요?”

중국 문호 임어당(1895-1976)이 우리 문교장관 안효상에게 언급했다는 가벼운 힐난(詰難)투 얘기를 예로 들며, 진 박사는 한자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을 꾸짖었다. 임어당의 ‘생활의 발견(The Importance of Living)’은 70년대 ‘영어 좀 한다’는 학생들의 교본으로도 유명했다. ​

강상헌 논설위원/우리글진흥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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