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도시 히로시마를 주목한다

서울을 평화도시로[3] 김승국l승인2008.04.07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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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45년 8월 6일에 핵무기 세례를 받아 잿더미가 된 히로시마가 시민들의 투혼에 힘입어 평화의 도시로 거듭났다. 피폭자를 포함한 히로시마 시민들은 군사도시 히로시마를 땅에 묻고 평화도시 히로시마를 새로이 건설했다.

패전 때까지 히로시마가 일본 제국주의 군대(천황제 군대)의 사령부 역할을 해왔기 때문에 핵무기 투하의 첫 번째 과녁이 된 것이다. 따라서 천황제 군대의 잔재를 피폭의 유물(피폭으로 무너진 건물 등)과 함께 매장하지 않고는, 'No More Hiroshima! No More War!'의 새로운 세상을 만들 수 없었다.

피폭의 상흔을 입은 히로시마의 시민들은 이같은 기치 아래 맨 손으로 히로시마의 부흥사업에 전력투구한다. 이 부흥사업의 성과를 자랑하는 히로시마 시청, 관변 평화단체의 자료 속에는 시민들의 투혼이 잘 나타나 있지 않다. 그러나 당시 적수공권(赤手空拳)으로 새로운 삶의 터전을 일군 민초들의 고투(苦鬪)를 중심으로 취재하면, ‘관청은 부흥사업의 뒷바라지에 그쳤음’을 알 수 있다. 시민들이 앞장서고 관청에서 후원하는 부흥사업이 된 것이다. 이러한 부흥사업의 경과를 아래와 같이 요약한다.

피폭 후 생존한 시민들은 불타고 남은 집의 부스러기 자재를 모아 허름하기 짝이 없는 군대식 막사를 짓는다. 일단 우거(寓居)를 마련한 시민들은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부흥현장으로 달려간다. 피폭으로 아수라장이 된 히로시마의 도심을 정리하는 게 첫 번째 과업이었다. 시내 한 복판에 굴러다니는 피폭자의 유체를 수습하여 유가족에게 알리거나 무연고의 유체를 화장하는 일이 급선무였다. 피폭을 덜 당한 시민들이 자신들보다 피폭을 더 당한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해 불철주야 움직였다. 당시 버젓한 병원이 있을리 없으므로 여기저기 수소문한 끝에 임시 치료소로 부상자를 실어 날랐다.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는 시민들끼리 상부상조하는 공동체가 피폭의 지옥도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러한 공동체가 없었다면 피폭의 아비규환이 장기간 지속되어 히로시마 시민사회의 재건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시민사회 재건과정 속의 애환을 다룬 만화인 ‘맨발의 겐’을 보면 당시의 정황을 파악할 수 있다.

일단 시민들이 맨손으로 피폭의 잔재를 없앴으나 히로시마를 본격적으로 재건하는 사업은 행정당국, 국가의 몫이었다. 이에 히로시마 시청은 1946년 1월에 부흥국을 신설하고 2월에 히로시마시 부흥 심의회를 개최했다.

시민사회신문DB
전세계적인 평화도시 히로시마의 부흥은 한국전쟁 특수에 기반한 기묘한 역설을 담고 있다. 사진은 지난해 5월 한국에서 열린 반전반핵평화 동아시아국제회의 관련 집회의 일본인 참석자 모습.

회의를 거듭한 끝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부흥계획을 1946년 가을에 확정했다. 100미터 도로(100미터의 폭을 가진 ‘평화의 길’)를 포함한 24개의 도시계획 가로(街路), 평화공원을 포함한 세 개의 대공원, 32개의 소공원, 히로시마의 동부(785헥타르)와 서부(538헥타르)의 부흥토지구획 정리 등이다.

그런데 위와 같은 거대한 사업을 진행하기 위한 자금을 어디에서 어떻게 조달하느냐는 문제에 봉착했다. 당시 이 문제의 돌파구가 국가밖에 없음을 깨달은 히로시마 행정당국, 시민사회는 ‘부흥 국영 청원운동’을 전개한다. 부흥 국영 청원운동의 중점은, 일본군대가 사용했던 국유지 등을 불하하고 부흥사업을 고율(高率)로 보조하며 국영사업으로 실시하라는 것이었다. 이 운동은 여러 가지 우여곡절 끝에 1949년 5월 10일에 열린 일본 중의원으로 하여금 ‘히로시마 평화기념도시 건설법’(평화도시법)을 통과시키게 한다. 드디어 히로시마의 부흥사업이 국영사업으로 된 것이다. 국가가 책임지고 히로시마의 부흥사업을 지원함으로써 부흥사업이 본격화한 것이다. 이 본격화에 날개를 달아준 게 한국전쟁 특수(特需)이다.

1950년 한반도에서 일어난 전쟁의 특수에 힘입어 일본경제가 발전의 발판을 마련했다는 이야기는 이미 정설이 되었으므로 더 이상 강조하지 않는다. 그러나 한국전쟁의 특수에 힘입어 히로시마 부흥산업이 날개 단 듯 잘 되었다는 ‘기묘한 역설’(逆說)을 역설(力說)하고자 한다. 히로시마에도 한국전쟁 특수의 바람이 불어 차량, 차량부품, 목재 등을 중심으로 인견(人絹), 견직물, 바느질 바늘 등의 수출이 급증했다. 이어 조선을 비롯한 신철(伸鐵), 통조림의 생산도 활황을 이루었다. 히로시마 의회가 1950년 11월 24일, 맥아더 원수에게 ‘감사’하다고 결의할 정도로 한국전쟁은 기사회생의 묘약이었다. 이 묘약은 히로시마의 부흥을 위한 양약(良藥)이 되었으나, 한국전쟁에서 죽어간 남북한 민중들의 고혈(膏血)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전쟁의 늪지대에서 죽어간 남북한 민중의 고혈로 히로시마가 평화도시로 거듭난 것이다. 한국전쟁의 고혈이 히로시마에서 평화의 꽃을 피운 기묘한 역설. 이 역설을 중심으로 평화 도시 히로시마를 재조명하는 작업은 숙제로 남겨두고, 히로시마를 평화도시로 꾸민 과정을 설명한다.

평화도시법에 따른 국가의 지원과 한국전쟁의 특수에 힘입어 히로시마 부흥사업이 본 궤도에 올랐다. 부흥사업의 핵심 중 하나는 히로시마를 평화도시로 만드는 작업이었으며, 그 일환으로 평화기념 공원을 조성했다.

히로시마 시내에 평화기념 공원을 만들기 위해 몇 단계의 과정을 거쳤다. 공원계획의 결정, 용지확보, 공간구성의 결정, 건물의 정비, 건물 정비 이후의 부분적인 변경과 개축이라는 단계를 거쳐 평화공원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당초의 부흥도시 계획의 일부인 평화공원은 ‘나까지마 공원’이라고 불리는 비교적 규모가 큰 보통의 공원 중의 하나에 불과했다. 미국의 공원계획가, 히로시마에 진주한 영 연방군이 파견한 부흥고문 등이 ‘평화기념’이라는 개념을 만들었다. 이어 1949년에 공원설계 작품을 경쟁모집할 때 평화기념의 개념을 살린 ‘평화기념 공원’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1952년의 도시계획 속에 평화기념 공원이라고 위치 지워짐으로써 보통의 공원이 아닌 기념시설이 되었다.

예전의 번화가인 나까지마(中島) 지구의 경우 피폭 후에 재건된 민가를 이전시키는 일이 용이한 일이 아니어서 나까지마 지구에 평화기념 공원을 세우고 그 공원 안에 평화기념관, 자료관을 건설하는 작업이 원만하게 진행되지 않았다. 그러나 완성된 평화기념공원은 예상을 뛰어넘는 역할을 하면서 히로시마를 평화도시로 빛냈다. 냉전시대에 핵무기의 공포가 증대되면서 히로시마는 ‘No More Hiroshima! No More War'의 가치를 전 세계로 발신하는 평화도시로 정착했다.

이렇게 반핵평화의 메카가 된 히로시마에서는 연중무휴로 평화 관련 행사, 토론회가 열리고 있으며, 피폭일인 8월 6일 전후로 반핵평화 세계대회, 평화의 식전(式典)이 50년 이상 지속되고 있다. 이러한 지속성을 담보하기 위해 세운 각종 평화기관(히로시마 평화문화 센터 등), 평화교육 기관(히로시마 대학, 히로시마 평화교육 연구소 등), 평화연구 기관(히로시마 시립대학 부설 평화연구소 등), 피폭 관련 시설 및 단체(히로시마 적십자 원폭병원, 히로시마 원폭피해자 협의회 등), 평화운동 단체(원수폭, 세계평화연대도시 시장회의 등)가 평화도시 히로시마의 빛을 더욱 강하게 발산하고 있다.

냉전 이후 탈냉전 시대에 터진 북한 핵실험 등의 위기상황을 억제하는 최후의 보루는 ‘No More Hiroshima! No More War'의 가치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평화도시 히로시마가 북한 핵문제의 확산을 제어하는 제어봉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보아야할 것이다.

짚고 넘어갈 몇 가지 유감

죽은 이들을 추모하고 평화를 기원하는 신사, 기념비, 돌, 종, 분수, 사원으로 가득 찬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은 그야말로 하나의 순례지이다. 공원 안에 있는 상점에서는 열쇠고리, 볼펜, 티셔츠, 받침접시, 엽서, 책, 컵, 염주, 젓가락 등을 파는데 이 모든 것에는 빠짐없이 평화의 기도가 적혀 있다. 대부분의 기념품에는 오늘날 ‘원폭 돔’이라고 불리는, 당시 히로시마 현 산업진흥관의 다 타버린 골조 사진이 인쇄되어 있다.

그 진짜 잔해는 공원 한쪽 끝을 지나는 강 맞은편에 여기에서 자행된 악을 영원히 상시시키기 위해 보존되어 있다. 원폭 돔에서는 의식이 치러지고 강에는 죽은 자들의 혼을 상징하는 종이 등이 떠다닌다. 히로시마-여기서 말하는 것은 부유하지만 단조로운 일본 도시로서의 히로시마가 아니라 일종의 종교적 메카로서의 히로시마이다-에서 흥미로운 것은 그 보편화를 향한 야심과 일본인 희생자만을 위한 추모 장소라는 현실 사이의 긴장이다. 공원 바깥에는 원폭에 희생된 한국인들을 위한 기념비가 한 구석에 서 있다. 그들 중 대다수는 전쟁 중 강제노역자로 일본에 끌려간 사람들이었다. 1970년 일본의 남한 거류민단에 의해 건립된 이 기념비는 한국의 묘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처럼 커다란 돌거북 위에 세워져 있다. 돌거북은 여러 한국인 조직의 이름이 쓰여진 화환, 꽃, 종이학들로 덮여 있다. 묘석 옆에는 영어와 한국어로 된 게시판이 있는데 거기에는 원자폭탄이 그 ‘성스러운 생명’을 ‘갑자기 우리에게서 앗아간’ 2만 한국인들의 이야기가 적혀 있다. 그들을 위해서는 장례식도 위령제도 치러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의 혼은 하늘나라로 가지 못하고 긴 세월 동안 공중을 떠돌았다.’ 하나밖에 없는 위령탑에는 단 한 명의 한국인 이름도 적혀 있지 않았다. (이안 부르마, 2002)

평화기념관은 무엇보다도 핵무기의 폐기를 호소하고 있다. 평화운동에서 사용하는 말을 인용하면 핵무기는 ‘절대악’이고, 그 연장선상에는 전쟁 그것을 절대악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히로시마의 기념관은 전쟁을 일으킨 책임과 원폭을 투하한 책임을 물으려고 하지는 않는다. 주체와 행동의 책임을 묻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는 핵무기라고 하는 무기의 완전폐기와 전쟁의 소멸을 바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희생에 대한 기억이 다른 사례에서는 책임자의 사죄와 처벌 요구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지만 히로시마의 평화운동에서는 군사행동을 취한 상대방에게 사죄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무기의 폐기를 요구하고 있다. 이 독특한 성격은 ‘전쟁은 악이므로 전쟁에 반대한다’는 메시지를 빼고서는 설명할 수 없다. 전쟁을 절대악이라고 할 경우, 옳고 그름은 전쟁을 누가 일으켰느냐에 따라 결정되지 않는다. 그 자체가 나쁘기 때문에 전쟁 주체에 따라서 전쟁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처방도 침략전쟁을 일으킨 정부를 해체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이라는 행위를 막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무기를 없애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정당한 핵무기의 사용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정당한 전쟁’이라는 개념도 있을 수 없으며, 있다고 해도 전시동원을 위해 사람을 기만하는 선전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원폭투하로 일본에서 군국주의가 사라져 현재 평화롭게 되었다는 긍정적 판단은 결코 용납되지 않는다.(후지와라 기이치, 2003)

김승국 평화만들기 대표

김승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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