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 속 ‘진리’의 근원을 찾아

철학여행까페[27]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l승인2008.04.07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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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희
부름 받는 아우구스티누스

유럽 문화를 떠받들고 있는 2개의 기둥은 그리스문화와 기독교 문화이다. 로마제국은 처음에 기독교를 탄압했으나 밑에서부터 불길처럼 번져가는 기독교 세력을 인정하고 콘스탄티누스 대제 때 신앙의 자유를 공표하였다.

기독교는 테오도시우스 황제 때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되어 교회와 성직자들은 각 방면에서 특권을 누렸다. 그러나 기독교가 이렇게 되기까지는 수많은 순교자가 피를 흘렸다. 그러나 순교자의 피 만으로 기독교가 세계의 종교로 자리 잡지 못했을 것이다. 기독교가 다른 종교들과의 경쟁에서 승리하고 또한 자신을 수호하기 위해서는 기독교 교리를 이론화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어야 했다. 초기 교회에서 그러한 역할을 수행했던 사람들은 교회의 아버지라 불리웠던 교부철학자들이었다.

교부철학자 아우구스티누스

교부철학자들 중 가장 유명한 철학자가 ‘고백록’을 쓴 아우구스티누스이다. 고백록은 로마의 한 지식인이 치열한 내면적 싸움을 통해 어떻게 종교인으로 변모해 가는가를 보여 준다. 아우구스티누스와 기독교의 만남은 초기 기독교 신학이 탄생하는 결정적 계기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철학의 역할을 바꾸어 놓은 사건이기도 했다. 아우구스티누스와 더불어 이제 철학은 유한한 인간, 차안과 피안의 관계, 역사 등의 문제를 기독교와의 연관 속에서 해명하는 학문이 되었다. 다시 말해 철학은 신학의 시녀가 된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오늘날 알제리인 북아프리카의 도시 타가스테의 하위직 로마 관원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기독교인으로 개종한 것은 어머니의 영향이 컸다. 그의 어머니는 남편 파트리찌우스를 세례 받게 할 정도로 열성 신도였다. 그녀는 남편 뿐만 아니라 아들을 기독교로 인도하려 무진 애를 썼다.

그녀의 열성에도 불구하고 아우구스티누스는 처음부터 기독교에 호감을 가지지 않았다. 오히려 아우구스티누스는 9년 동안이나 마니교에 빠져 세월을 보냈다. 마니교는 페르시아의 예언자 마니에 기초하고, 후기 로마제국에 있어 영향력 있는 추종자들을 가졌던 종교공동체이다.

마니교도들은 세계가 서로 싸우고 있는 다른 두 개의 원리, 즉 선과 악의 원리라고 하는 이원론에 의해 지배된다고 보았다. 그들은 세계를 선의 영역과 악의 영역과의 영원한 투쟁으로 이해하였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마니교에 이끌린 까닭은 마니교가 세상에 존재하는 악에 대해 설명하고, 고대철학에 대해 개방적인 자세를 보였기 때문이었다.

이동희
보티첼리, 아우구스티누스, 1480, 플로렌스
아우구스티누스가 마니교와 결별하게 된 계기는 밀라노 주교였던 암브로지우스와의 만남이었다. 마니교도들은 아우구스티누스에게 밀라노에 있는 황제의 거주지에 수사학교수 자리를 마련해서 그곳에 있던 암브로지우스를 상대하게 하였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는 오히려 암브로지우스에게 이끌려 기독교 믿음을 수용하는 쪽으로 돌아 선다.

독일 트리어 출신인 암브로지우스는 가장 유명했던 초기 기독교 교부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기독교 신앙을 철학적 논증들로 뒷받침함으로써 지식인 아우구스티누스를 설득시켰다. 암브로지우스는 기원후 3세기 철학자 플로티노스에 의해 대표되는 흐름인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을 받은 신학자이다.

철학의 역할을 바꾸다

지난 호에 언급한 것처럼, 플로티노스는 플라톤의 철학을 신비주의적 방향으로 더욱 발전시킨 철학 학파다. 신플라톤주의는 악에 대해 마니교도와는 완전히 다르게 설명을 했다. 신플라톤주의에 따르면 악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힘, 적극적인 힘이 아니라 결여이다. 악은 일자의 정신적 근본원리에서 멀리 떨어져 일자를 거의 포함하지 않은 것이다. 모든 물질적 사물들이 이에 해당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플라톤주의적 설명에 따라 기독교의 신을 이해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플로티노스의 글자 몇 마디만 바꾸면 완전히 기독교와 일치한다고 했는데, 이 말은 거꾸로 아우구스티누스가 얼마만큼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을 받고 있는가를 보여 준다. 어쨌든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이렇게 철학과 신학은 결합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개종은 그가 막 32살이 되던 때인 386년에 일어났다. 그는 고백록의 제 8권에서 개종의 순간을 드라마틱하게 묘사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영혼과의 치열한 투쟁을 하면서 “내면적 폭풍”에 사로잡혀 무화과 나무 아래에 엎드려 울었다. 그렇게 울고 있을 때, 그는 이웃집에서 어린 아이들이 부르는 노래 소리 “tolle lege”(집어서 읽어라)를 듣는다. 그 말을 들은 그는 계시라도 받은 것처럼 신약성서를 들어 펼쳐 보았다. 펼쳐진 성경의 말씀은 사도 바울이 쓴 로마서 13장 13절이었다.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성경의 이 말씀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자신의 세속적 생활을 포기하고 기독교로 개종하게 하는 결정적인 충격이었다. 개종은 그의 삶을 완전히 뒤바꾸었다. 잘 나가던 수사학 교수로서의 직업을 포기했고, 독신이라는 삶의 형식을 선택했다.

사실 아우구스티누스는 젊었을 때 결혼하지 않은 채 어떤 여인과 14년 동안이나 동거생활을 했었다. 그는 18살에 이 여인에게서 아들 하나를 얻었다고 한다. 그가 이 여인과 정식적인 결혼을 하지 않은 이유는 법적인 신분차이 때문이었다. 그는 이 여인과도 결별하고, 수도원의 삶을 선택했다.

그는 밀라노에서 개종 이후 2년 만에 북아프리카의 고향으로 돌아가 공동체에 헌신했다. 서품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히포 레기우스의 주교가 되었다. 고백록은 주교로서 처음 보냈던 시절인 397년과 401년 사이에 그가 쓴 작품이다. 그는 생애 말년에 ‘신국론’을 썼다.

이 책은 최초의 기독교적 역사철학서이자 정치철학책이다. 이 책에서 그는 역사를 하나님의 나라와 지상의 나라의 투쟁으로 파악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교회가 대표하며 지상의 나라는 국가가 대표하는데, 이 둘은 각각 다른 정신적 질서를 대변한다. 현실 역사에서 이 둘은 얽혀 있지만 종말에 이르면 이 둘은 분리되어 하나님의 나라가 승리자로 등장한다.

이동희
예수 이콘화, 아기야 소피아 성당, 이스탄불
430년 8월 28일에 죽기까지 아우구스티누스는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의 마지막 생애는 반달족의 침입으로 북아프리가 도시들이 유린되던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도시가 강탈되고 파괴되는 가운데서도 그의 서재만은 온전하게 보존되어 그가 쓴 작품들은 이후 서양의 정신사에 커다란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학뿐만 아니라 철학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그는 신에 대한 믿음을 강조하고 인간의 이성과 지식을 낮게 평가하지만, 그의 신학에는 이성과 지식이 밑바탕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신을 향한 질문들

그는 ‘믿음’을 강조하지만 집요하게 문제를 파고들고, 회의하며 끝까지 확실성에 도달하고자 한다. 이런 그의 회의주의는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를 앞선 것이다. 그는 고백록에서 자신의 경험을 반추하고 그 의미를 끝없이 물으면서 우리 내면 속에서 ‘진리’의 근원을 찾아 들어 가며 이렇게 말한다.
“그대는 밖으로 나가려 하지 말고, 그대 자신의 내면으로 되돌아가라. 진리는 인간의 내면에 깃들어 있는 것이다.”

그가 찾는 진리의 근원은 ‘신’이다. 그는 신에 대한 끊임없는 내적인 물음을 던지면서, 영원한 진리와 시간적 존재인 우리의 존재구조를 철저하게 분석하였다. 고백록 제 11장에서 행한 이 ‘시간 분석’은 앙리 베르그손와 에두문트 후설, 마틴 하이데거와 같은 철학자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 \'구스타프 슈바브 그리스로마신화\' 역자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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