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CTV와 싸울일 아니다

[시민운동 2.0] 김민혜정l승인2008.04.07 11:55

크게

작게

메일

인쇄

신고

아동성폭력 문제로 온 나라가 들썩인다. 성폭력 문제를 현장에서 다루고, 피해자를 지원하고 있는 나로서 여러 생각과 감정으로 뉴스들을 접했다. 이에 대한 입장도 하루에 수차례씩 요구받는다. “아동성폭력 대책은 무엇입니까?” “재범률을 낮추는 방안은 무엇입니까?” “처벌 수위를 높여야 한다고 한 말씀 해주십시오” “부모나 아이들은 무엇을 조심해야 하나요?”

분명히 내가 해야 할 일이 맞는 것 같으므로 그 자리에 일단 서지만, 여러 생각들이 교차하여 말문을 막아선다. 온 나라를 휩쓴 ‘공포’나 ‘두려움’은 나에게도 매우 익숙한 감정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이렇게 온 인터넷과 방송 라디오에서 떠들어대는 속에서는 그 고갱이가 변질되는 느낌이다. 경악, 대책마련, 심각성, 실태, 대통령의 특별지시가 난무하는 성폭력의 범람 속에서 내가 겪었던 성폭력의 과정들은 소외되어 있다. 왜 그럴까?

성폭력은 매우 다양한 장면으로 각지에서 존재한다. 타인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 것이 광의의 성폭력이라고 하고, 이것을 규제하고 처벌할 수 있는 법이 이미 우리 곁에 존재한다. 그러나 무엇이 성폭력인지에 대한 논란은 끊임이 없다. 아동성폭력이 터졌을 때 ‘대책이 뭐냐’ ‘처벌 수위를 높여야 하지 않냐’고 질문을 받았다면, 성인 여성이 피해자이거나, 그 피해 내용이 가벼운 접촉이나 언어적인 것이었다면 ‘그게 정말 성폭력이 맞냐’ ‘왜 그렇게까지 따져야 하느냐’는 질문과 의심이 쏟아진다.

누구에게 성적 자기결정권이 있느냐,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느냐, 내가 타인의 피해를 끼쳤느냐는 매우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일이지만 그 내용과 수위를 결정하고 있는 건 남성중심사회의 시선이다. 어린이가 겪은 성폭력에 대해 경악하지만 피해자인 어린이의 성적 자기결정권, 어린이에게 고유하게 존재하는 인권에 대해선 생각하는 것 같지 않다. 당사자의 목소리를 듣고, 어린이 당사자들에게 이러한 일이 벌어지는 현실에 대해 안내하고, 자신을 위한 힘과 시각을 키울 수 있는 기회와 정보를 제공하고 있는가?

그 어린이가 성폭력이 주변 사람으로부터 발생한다는 뉴스를 읽고,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아빠와 친척 남자어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고, 그들이 나누는 음담패설에, 그들이 TV를 보며 나누는 여자연예인 품평 잡담에 또렷하게 문제제기한다면 어떻겠는가? 버르장머리없고 되바라졌다는 소리를 듣지 않으면 다행이다. 보호와 통제 일변도의 대책은 향후 이 어린이들이 살아갈 규범의 세계를 보여준다. 물론 여자어린이들에게 적용되는 바람이고 걱정이다.

성폭력을 조심하라고, 집에 일찍 들어오라고, 옷차림을 조심하라고, 어떤 남자도 믿지 말라고 단단히 교육받으며 자라가지만 이 아이들은 곧 보호과 통제를 받는 동시에 성적인 대상이 되기 시작한다. 교복과 미성년의 신체가 ‘야동’의 모티브가 되고, 그 야동의 소비자는 안양 사건의 범인뿐이 아니다. 원조교제의 구매자는 일상에서 흔히 만나는 평범한 남성들이며 10대 성폭력 피해의 30%를 차지하는 친족 성폭력의 가해자도, 아시아 10대 여성 성매매의 최대 구매자인 한국 관광객들도 그저 평범한 남성들에 지나지 않는다.

‘정조에 관한 죄’가 변화한 ‘성폭력’ 법은 보호하고 있는 법익이 부녀자의 보호자인 남성에서 개개인의 성적 자기결정권으로 변화하였지만 이를 당연한 인권의 지침이자, 상식이자, 법적인 근거로 삼아 자기 경험을 성폭력이라고 문제제기한 여성들에게 어떻게 반응할지도 사실 성폭력을 둘러싼 ‘공포’와 ‘두려움’이 된다.

재미와 친근함으로 했을 뿐인 성희롱에 발끈하는 여자, 쳐다봐주고 관심받는 게 좋으면서 싫다고 하는 여자, 한번 말하면 알아들어야지 계속 따지고 자기 의견을 주장해서 피곤하게 하는 여자, 이러한 여자들이 ‘폭력을 자처’한다는 이 사회의 깊은 믿음과 공감대….

한국사회, 그리고 우리 일상 곳곳에 만연해 있는 성차별과 남성중심의 성담론, 성문화는 현재 벌어지고 있는 ‘극악무도한’ 성폭력의 주범이자 배경이다. 특별지시를 내린 이명박 대통령도 그렇다면 공모자의 반열에 오를 것이며, 뉴스를 보면서 분노한 많은 이들도 자유롭지 않을 것 같다. 애꿎은 CCTV과 사형제를 거론하지 말자. 우리가 정작 싸워야 할 것이 그것이 아니니.


김민혜정 한국성폭력상담소 활동가

김민혜정  

<저작권자 © 시민사회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김민혜정의 다른기사 보기

인기기사


여백
시민사회신문 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08288 서울특별시 구로구 새말로 93, 신도림태영타운상가2동 B105  |  대표전화 : 02-3143-4161  |  팩스 : 02-6737-1115  |   ingopress@ingopress.com
등록번호 : 서울 다 10706  |  등록일자 : 2013년 8월 26일  |  회장·논설주간 : 강상헌  |  발행·편집인 : 설동본  |  편집국장 : 양병철
후원계좌 : 국민은행 7788-01-04-375819 (시민사회신문)  |  청소년보호책임자 : 설동본
Copyright © 2007 시민사회신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