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과 이성의 조화

철학여행까페[28]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l승인2008.04.14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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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희
몬테 카시노의 수도원

토마스 아퀴나스는 중세 그리스도교를 지배한 대표적 신학자이자 스콜라 철학자이다. 죽고 나서 49년이 되는 해인 1323년에 그는 성인으로 추증되었다. 그가 죽고 나서도 그의 영향력이 줄어들지 않고 더욱 더 커져갔다는 사실은 그가 1567년에 공식적으로 교회박사의 칭호를 받았다는 데서도 확인할 수 있다. 교회박사(doctor ecclesiae)는 교의상(敎義上) 교회에 큰 기여를 한 학자에게 주는 영예로운 칭호다. 교회박사라는 칭호는 학덕만을 쌓아서는 받을 수 없다. 탁월한 학식을 갖추어야 하는 것은 기본이고, 생활에서도 성스러움을 갖추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면모를 교황이나 세계 공의회를 통해 인정받아야 한다.

교회박사 토마스 아퀴나스

이미 14세기 화가 프란세스코 트라이니는 아퀴나스의 영향력을 짐작케 하는 그림을 그린 적이 있다. 그림을 보면 아퀴나스가 한 가운데 서 있고,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이 책을 든 채 양 옆에 서서 그를 쳐다보고 있다. 그리고 그의 발밑에는 이교도인 듯한 자가 엎드려 누워 있다. 여기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고대 그리스철학의 도움을 받아 신학을 종합해, 이교도를 발아래 쓰러뜨린 승리자로 묘사된다. 루브르 박물관에도 이와 거의 유사한 그림이 걸려 있다. 이 그림에서 묘사한 대로 토마스의 가장 큰 업적은 고대 그리스 철학의 도움을 받아 신학을 정리한 ‘신학대전’과 이교도를 논박하기 위해 쓴 ‘이교도 반박 대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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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세스코 트라니, 피사,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승리
토마스가 쓴 책을 보면, 일반 독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책이 아니다. 그의 책들은 치밀한 논증과 논리가 체계적으로 구사된 책들이다. 그리고 분량도 상당해서 어지간한 집중력과 인내력을 갖지 않고서는 읽을 수 없는 책이다. 오죽하면 책 이름이 대전(大全)이겠는가. 교부 철학자 아우구스티누스가 뛰어난 문장력으로 자기 고백을 담아 흥미로운 책을 썼다면, 토마스 아퀴나스는 논증하는 방식으로 논문과 같은 글을 썼다.

그의 저작만을 보고 그의 인상을 떠올린다면 오로지 학문에만 몰두해 양 볼이 쑥 들어 간 삐쩍 마른 몸에 신경질적으로 생긴 학자를 연상하기 쉬울 것이다.

그러나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런 인상과는 달리 엄청난 체구를 지닌 학자였다고 한다. 지금도 전해 내려오는 그의 책상은 가운데가 둥글게 홈이 파져 있다고 한다. 이것은 비대한 체구를 지닌, 아마도 복부 비만으로 추정되는 토마스 아퀴나스가 책상에 앉아 편하게 작업할 수 있게 하기 위해 그렇게 만들었을 것이다. 자신의 엄청난 체구에 대해서 토마스 자신도 자조적으로 이야기 하곤 했다고 한다.

엄청난 체구를 지닌 토마스는 외모대로 우직한 성격이었고, 한번 마음먹은 일은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황소고집이었다. 그런 그가 도미니코회의 수도원의 탁발승이 될 수 있었던 것도 그의 이런 성격이 아니었더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가문은 아들이 탁발승이 되는 것을 그냥 지켜 볼 수 없는 대단한 집안이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로마와 나폴리(Napoli) 중간에 있는 로카세카(Roccasecca) 가족 성(城)에서 태어났다. 그는 아퀴노의 백작 란둘프(Landulph)와 어머니 테오도라(Theodora)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다섯 살이던 1230년경에 아버지는 그를 베네딕트 수도회의 모원(母院)인 몬테 카시노의 수도원학교에 보내 장차 훌륭하고 명망 있는 수도원의 원장이 되기를 기대했다. 그는 1239년까지 이곳에서 10년 동안 머물며 기초 공부를 하며 자란다. 이후 그는 나폴리대학에 입학하게 된다. 그는 나폴리 대학에서 철학에 눈을 뜨게 되고 아리스토텔레스 연구로 뛰어난 몇몇 교수들의 영향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 저작들을 접하였으며, 아리스토텔레스의 과학적이며 우주론적인 저술들을 소개받았다.

그 결과로 토마스는 이미 이 시절부터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해 상당히 깊이 이해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는 이 시기에 또한 막 세워진 탁발수도회인 도미니코 수도회를 접하게 되었다. 스페인 출신의 성 도미니코에 의해 창립된 도미니코 수도회는 프란체스코회와 더불어 13세기의 새로운 정신적 운동을 담당하고 있었다. 도미니코 수도회는 외적인 화려함 대신에 청빈이라는 이상을 내세웠다. 당시 급속히 발전하고 있었던 도미니코 수도회의 영향을 받은 토마스는 1244년에 이 탁발수도회의 수사가 되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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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그림
이단에 대한 투쟁


그러나 가족들은 이러한 그의 결심을 가문에 대한 먹칠이라고 생각했다. 형들은 그를 납치해 외딴 섬에 가두었다. 그들은 그곳에서 아우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여러 가지 시도를 했다. 여러 가지 시도 끝에 형들은 아름다운 젊은 여자를 아우에게 보내 관심을 돌리려고 했다. 부탁을 받은 아름다운 젊은 여자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방으로 갔다. 그녀는 방에 들어서자마자 놀라 기겁을 하였다. 몸집이 거대한 젊은 남자가 벽난로에서 방금 끄집어 낸 듯 한 불붙은 장작을 손에 들고 다가 왔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가족의 완강한 반대를 물리치고 도미니크회에 들어간 그는 파리를 거쳐 쾰른으로 건너가 당대 최고의 철학자이자 신학자인 알베르투스 마그누스의 지도를 받았다. 알베르투스 마그누스는 과묵한 거구의 청년 아퀴나스의 학문적 재능을 발견하고 그를 총애했다. 학생들은 말이 없으면서도 체구가 커다란 토마스 아퀴나스를 ‘벙어리 황소’라고 조롱했다. 그러나 스승 알베르투스 마그누스는 조롱하는 학생들에 대해 그를 이렇게 변호했다.

“너희들은 토마스를 벙어리 황소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나 너희들에게 말하건대 이 벙어리 황소가 한번 울부짖으면, 그 소리의 진동은 전 세계에 가득 울려 퍼질 것이다.”

알베르투스 마그누스는 27세의 젊은 토마스 아퀴나스를 파리 대학 교수의 후보자로 추천되었다. 파리 대학의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그가 1256년에 신학교수로 취임할 때는 수도회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청중들의 입장을 방해했고, 프랑스 당국에서는 만약의 폭력사태를 막기 위해 군대가 강연장까지 배치되어 삼엄한 경호를 펼쳤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스승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교수 취임강연에서 논적들을 보기 좋게 반박했다. 이후 파리 대학에서 활동하던 토마스 아퀴나스는 1259년말에서 1260년 초 사이에 후임자에게 교수 직책을 물려준 이후 파리를 떠났다. 그는 이탈리아에 머물면서 이교도 반박대전을 썼고, 또한 신학대전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파리로 돌아와 교수직을 이어 나갔다. 돌아 왔지만, 상황은 오히려 더욱 안 좋았다. 그는 이단과 적대자들에 대항해 계속해서 투쟁을 해야 했다.

이 시기에 그가 이단과 적대자들을 논박하기 위해 얼마나 신경을 썼는가를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프랑스 왕으로부터 식사 초대를 받은 자리에서도 토마스 아퀴나스는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러다가 느닷없이 모든 사람들이 놀랄 만큼 세게 식탁을 내려치며 "그래! 마니교도들을 논박할 방법을 찾았다"라고 큰소리로 외쳤다. 이런 행동은 왕에 대한 심각한 결례로 큰 벌을 받았겠지만 토마스 아퀴나스의 학구적 열의에 감동한 왕은 그의 결례를 그냥 용서해 주었다고 한다.

이렇게 이단과 적대자들에 대해 투쟁을 하면서도 그는 끊임없이 저술을 집필했다. 방대한 양의 저술을 집필하면서 그는 항상 수면부족으로 시달렸다. 그러면서도 그는 아리스토텔레스 주석서와 신학대전의 집필에 몰두 했다.

“신학과 철학은 방법이 다를뿐”

그는 파리를 떠나 다시 나폴리로 가면서도 또 다시 사도 바울의 서간문과 시편 주해 등 집필을 해 나갔다. 그러나 과도한 집필 작업으로 인한 수면부족은 말년에 거의 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그의 건강을 훼손하였다. 그래도 그는 쉬지 않았다. 그는 건강이 악화된 상태였지만 아픈 몸을 이끌고 리용 공의회에 참석하라는 교황의 명에 따라 리용으로 향하던 건강이 더욱 악화되어 포사누오바의 시토회 수도원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건강을 해치면서까지 몰두했던 학문적 작업은 무엇일까? 한 마디로 말한다면 신앙과 이성의 조화라고 할 수 있다. 그에 따르면 신앙과 이성은 둘 다 하나님에게서 나오기 때문에 모순될 수 없다. 그러므로 신학과 철학은 서로 다른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신학과 철학은 같은 진리를 추구하지만, 신학과 철학은 방법에서 다를 뿐이다.

“철학은 창조된 사물에서 출발하여 신에게로 이르지만, 신학은 신에게서 출발한다."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 \'구스타프 슈바브 그리스로마신화\' 역자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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