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에게는 이름이 없다

철학여행까페[29]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l승인2008.04.21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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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희
에어프루트돔

노자를 보면 이런 말이 나온다. ‘도가도 비상도’(道可道 非常道). 도를 도라 하면 그건 이미 도가 아니다. 노자는 영구불변한 참된 도라고 하는 실체는 우리의 개념인 ‘도’ 라고 하는 말로 표현되지 않는다고 본다. 그것을 표현한 ‘도’는 이미 참다운 실체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노자처럼 서양의 중세에도 신에 대해 그런 말을 한 신학자가 있다. 신을 신이라 하면 그건 이미 신이 아니라고. 다시 말해 신은 규정할 수 없는 무한자이자 절대자인데, 그것을 ‘신’이라고 규정을 하는 순간, 그 ‘신’은 신이 아니라는 것이다.

노자와 비슷한 이런 생각을 했던 사람은 중세의 유명한 신학자이자 철학자였던 마이스터 에카하르트였다. 그는 ‘신’에 대한 규정이 불가능하다고 보고 ‘이성’을 통해 ‘신’을 인식하고자 했던 스콜라 철학에 반기를 들어 올렸다. 그는 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신비주의 신학자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신에게는 이름이 없다. 왜냐하면 아무도 신에 대해서는 어떠한 것도 말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언어나 개념 규정 없이 어떻게 우리는 신을 인식할 수 있는가? 그는 ‘이성’이 아니라 ‘신앙’이 갖는 신과 영혼의 통일에 대한 ‘신비한 체험’을 통해 신에 대한 인식이 가능함을 강조했다.

이렇게 신과의 신비한 체험을 강조함으로써 에크하르트는 중세 신학에서 신플라톤주의로부터 내려오는 중세의 신비주의 전통을 회복시킨다. 사실 신비주의적 전통은 아우구스티누스나 토마스 아퀴나스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신앙과 이성의 조화를 꾀했다면, 에크하르트는 이성을 초월한 신앙의 경지를 추구했다. 그러나 그의 ‘신비주의’는 ‘이성’과 ‘철학’을 배척한 것이 아니다. 그는 ‘이성’과 또 다른 ‘신앙’의 신비적인 면을 보여 준 것이다. 그는 그렇게 함으로써 합리주의적 신학과 철학적 신학으로부터 신앙의 힘을 분리하는데 성공했다.

에크하르트는 1260년경에 오늘날 독일 튀링켄 주에 있는 호크하임에서 기사가문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 시기는 초기 스콜라철학의 시대가 끝나가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유럽이 도입하여 스콜라철학의 전성기를 이루던 시기였다. 그는 어린 나이에 에어푸르트의 도미니크회에 들어 가 사제가 되기 위해 공부했다. 도미니크회가 어떤 수도회인가. 알베르투스 마그누스와 토마스 아퀴나스를 배출한 수도회가 아니었던가.

그는 에어푸르트를 떠나 슈트라스부르크와 쾰른에서도 공부했다. 쾰른에서는 알베르투스 마그누스(1200~1280)에게서 신학을 공부해 누구보다 아리스토텔레스철학과 스콜라 철학에 대해 잘 알았을 것이다. 또한 그곳에서 토마스 아퀴나스의 철학에 대해서도 배웠을 것이다. 스콜라 철학에 정통했던 만큼 그는 스콜라 철학이 보지 못했던 면을 일찌감치 보았을 수도 있다.

이동희
알베르투스 마그누스
이성 초월한 신앙의 경지


‘신비주의’라는 이미지와는 어울리지 않게 그는 세속적 업무에도 탁월했던 것 같다. 그의 이력을 보면 ‘초고속 승진’이라는 말이 딱 어울린다. 그는 34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에어푸르트의 도미니크 수도원 원장이자 튀링겐의 총 교구의 대리자가 되었다. 그는 이후 파리로 가 1302년에 신학 학위 마기스터(Magister)를 받고, 그곳에서 잠시 교수 생활을 한 뒤 돌아온다. 이 학위를 받은 데서 그를 ‘마이스터’로 부르기 시작했다. 그는 파리에서 돌아 온 후 새로 설립된 작센 지방의 교구장 (1303~1311)으로 곧 바로 임명되었다. 이 교구는 47개의 남자 수도회와 많은 수도원이 속해 있는 커다란 교구였다. 그는 또한 1307년에 보헤미아의 주교 대리가 되어 보헤미아에 있는 여러 수도원을 개혁하는 과제를 맡게 되었다. 1309년에는 독일 도미니크회 최고 지위에 올랐고, 1313년에는 슈트라스부르크에 있는 수도원 소속 대학의 학장직을 맡았고, 마지막으로 쾰른 대학에서 강의를 맡는다.

그러나 말년에 그는 이단 혐의에 시달리게 된다. 도미니크회와 경쟁관계에 있던 프란체스코 수도회 소속인 쾰른의 대주교 하인리히 비르네부르크가 그를 일반대중에게 위험한 교리를 유포하는 사람으로서 이단적 설교를 했다고 고소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종교재판이 열렸지만 에크하르트는 일단 무혐의로 풀려났다. 그러나 그에 대한 혐의는 계속되어 그는 생애 말기에 자신의 정통성을 변론하는 데 온 힘을 기울이다 사망한다. 그는 1328년에 세상을 떴는데, 그가 아비뇽에서 죽었는지 쾰른에서 죽었는지 알 수가 없고, 그의 묘지도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다.

그가 죽고 나서 교황 요한 22세는 교서를 통해 에크하르트의 저작 중 28개의 명제를 정죄하고, 그 중 15개를 이단적인 것으로 선포하며 나머지는 경솔하고 편협한 것으로 판결한다. 교서는 에크하르트에 대해 “자신이 마땅히 알아야 하는 것 이상을 알고자 하여 교회라는 밭에 엉겅퀴와 가시를 심은 사람”이라는 평가도 함께 내렸다.

이성을 초월한 또 다른 ‘신앙’의 신비한 차원을 역설했던 에크하르트가 이단으로 정죄된 것은 아이러니하다. 그러면 교황 요한 22세의 주장대로 그가 “자신이 마땅히 알아야 하는 것 이상을 알고자 했던 것”은 무엇인가? 그의 주장을 요약하면 대체로 이렇다.

첫째, 모든 세속적인 현실과 피조물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한다. 그렇게 해서 격정이나 욕망, 어리석은 일 등 온갖 잡다한 일에서 벗어나야 하다. 이렇게 외부세계로부터 자유로와지면 내면에 모든 힘을 집중해 진리에 접근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인간은 본질적으로 진리를 자기 안에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자기 자신을 버려야 한다. 자신에 대한 애착과 바람, 자기 의지까지도 모두 버려야 한다. 자기의 모든 것과 절연해 자기를 “내 맡김의 상태”에 두는 것이다. 이것은 “아무 것도 원하지 않고, 아무 것도 모르며 아무 것도 가지지 않는” 그러한 상태이다. 이러한 상태 속에서 비로소 인간에게 있는 본래적인 ‘영혼의 핵심’, ‘영혼의 근거’가 전면에 나타날 수 있다. 이를 통해 인간은 영혼의 밑바탕에서 신과의 직접적인 관련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동희
쾰른성당
셋째, 자기 자신을 버리는 그 지점에 신이 스며든다. 이렇게 인간은 영혼의 내면에서 보편적인 신과의 합일을 이루게 된다. 이 신과의 합일을 통해 인간은 신의 현재성과 그 무엇이라고 이름할 수 없는 무의 경지를 깨우치게 된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사상은 선불교의 방법을 연상시킨다. ‘깨우침’의 경지는 말로 설명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깨우침의 경지에 들어섰을 때에만 그것을 이해하게 된다. 석가가 연꽃을 들어 보였을 때 가섭이 그 참뜻을 깨닫고 미소를 지었던 것처럼. 어쩌면 염화시중의 미소는 마이스터 에크하르트가 표현하고자 했던 ‘신’에 대한 인식 방법이 아닐까 싶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모든 사물은 신 그 자체다”라는 범신론적인, 따라서 이단적으로 들리는 과감한 주장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주장은 존재하는 사물이 신과 동일하다는 뜻이 아니다. 모든 사물은 신에게서 나오며, 그것의 최후 근거가 신이라는 뜻이다. 그러기에 모든 사물의 본질은 신이며 모든 사물은 본질인 신을 향해 신에게로 되돌아가려 한다는 것이다.

신과의 합일이라고 하는 ‘신비주의적 체험’에 근거한 에크하르트의 사상은 당대에 이단으로 낙인찍혔으나, 그의 사상은 도미니크 수도회를 중심으로 많은 공감을 얻게 된다. 그의 수제자인 니콜라우스 쿠자누스에서 시작하여 야콥 뵈메, 바더의 프란츠에 의해 계승된다. 훗날 그는 종교개혁가 루터에게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그리고 그의 사상은 피히테의 후기 사상 그리고 셸링과 헤겔의 사상에 까지 영향을 미쳐 독일 관념론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후일 독일관념론에도 영향

‘신에 대한 체험’을 강조하며 ‘신’을 제 멋대로 해석하는 오늘날 영성체험자들에게 ‘신과의 합일’을 주장했던 신비주의 신학자 마이스터 에크하르트가 해 줄 수 있는 말은 이런 것일 것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도달할 수 있는 신에 대한 최고의 지식이란, 우리가 신에 대해 사유하고 있는 그 모든 것을 신은 초월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 \'구스타프 슈바브 그리스로마신화\' 역자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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