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 전통 부정 ‘핵심작의’

영화 「기생충」, 지하인간은 무엇을 기다리는가? 이정진 문화평론가l승인2019.06.14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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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충」(봉준호 연출)을 한국의 계급적 현실에 대한 우화로 봐야 한다는 것은 명백하다. 영화 자체가 계속해서 그런 독법을 주문한다. 몇몇 인물들의 우화풍 이름 같은 양식적인 표식 말고도, 꽤나 자기지시적인 대사들이 영화 초반에 여러차례 등장한다. “참으로 상징적이로구나!”

이 영화는 매끈한 우화로서 명쾌하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성공한다. 그 메시지를 요약해주는 존재가 바로 굉장히 비현실적이고 또 그만큼 상징적이기도 해서 대번 우화적인 존재라고 할 수 있을 ‘지하인간’이다.

그런데 거의 결말에 이르러 이 영화의 우화적 메시지가 매듭지어지는 국면에서 이야기가 극적으로 방향을 튼다. 그 서사적 결절점에서 짧게 이어지는 이야기는 흥미롭게도 지하인간의 의미를 재정의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모순적인 서사의 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너무나 비관적인 이 영화의 메시지에 정직하게 대면할 필요가 있다. 영화의 메시지는 누구 말마따나 실로 명징하게 전달되고 있지만, 이를 좀 더 무난한 이야기로 고쳐 쓰는 반응들이 많은 듯하다. 이 영화에 담긴 메시지가 그만큼 우울하고 무겁다는 방증일 것이다.

지하인간은 우리의 운명

「기생충」의 관심은 가난한 인물들의 계급의식(sic!)을 극화하는 것으로 모아진다. 부자 가족과 가난한 가족과의 만남이라는 중심적인 극적 상황이 품고 있을 여러 서사의 가능성은 억제된다. 애초에 소위 케이퍼류 영화의 관습을 빌린, 부자 집안으로 가난한 가족이 침투하는 영화 초반의 설정은 거의 만화적이라 신빙성이 없지만 몰아치는 빠른 플롯 진행 때문에 그런 성격이 가려질 뿐이다.

그러나 그 작위적인 설정이 꼭 필요했다. 영화는 그 설정을 포석 삼아 (대다수 한국인들이 거의 인정하기에 다다른) ‘자연화된 계급질서’를 확인시켜주는 장면을 연출한다. 그러니까 간단히 말하면 영화는 가난한 가족을 원래 자리로 되돌려놓기 위해서 잠깐 동안 위로 올려놓았을 뿐이다.

폭우가 쏟아지던 날 밤 주인공 가족은 대저택에서 주인 행세를 하다가 갑자기 들이닥친 진짜 집주인 가족을 피해 자신들의 원래 거처인 반지하 방으로 돌아가게 된다. 영화 전체의 축이 되는, 강렬한 정서적·감각적 환기력을 발휘하는 그 압도적인 장면은 동시에 상징적 의미로 충만하다.

내려가고, 또 내려가고, 한없이 내려가는 여정이 이미 충분히 상징적이지만, 빠르게 흘러내리며 그들을 인도하는 물의 존재는 그들의 전락을 ‘자연의 질서’로 자리매김하는 것이다. 산수경석은 이런 ‘계급적 진실’과 대비되고, 또 그 ‘진실’을 부각하는 대구(對句)이다. 하필 자연을 조작한 물건을 계급상승의 (개)꿈을 자극하는 촉매로 삼음으로써 자연=계급 질서의 등식이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지하인간은 바로 영화 속 가난한 가족이 대면하게 되는 그 ‘진실’(=계급의식)을 앞서 육화하는 존재이다. 가난한 가족 일행이 저택에서 도망쳐 나오기 직전 그들은 자신들의 공작으로 쫓겨난 이전 가정부의 남편이 저택의 지하벙커에서 몰래 숨어 사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 인물은 적어도 한국의 서사전통에서는 유례를 찾기 힘들 만큼 기괴하기가 짝이 없다. 그는 가정부로 일하는 아내의 도움으로 부잣집의 음식을 축내며 생물학적인 생명만을 부지하고 있다.

말 그대로 영화의 제목이 지칭하는 벌레의 상태로 떨어진 것인데, 진짜로 기괴한 것은 이 인물이 자신의 상태를 긍정한다는 것이다. 그런 상태로 떨어지게 된 전사(前史)가 언급되지만 동시에 그 비판적 함의는 부정된다. 지금 상태가 그에게 자연이다. “나는 여기서 결혼도 한 것 같고, 여기서 태어난 것 같아.”

영화가 직접 묘사하는 그의 유일한 활동은 그의 세계관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매일 밤 자신의 존재도 모르는 ‘숙주’ 박사장에게 전등의 깜빡거림을 모스부호 삼아 경배를 바치는 일을 반복하는 것이다. 영화는 너무나 명쾌하게 수직적으로 분할된 이 세계에서 자신의 위치에 만족하는 이 기생충-좀비-지하인간을 지지한다.

자신들의 위치에서 벗어나려는 계획을 궁리하느라 용쓰는 반지하 가족이 맞닥뜨리게 되는 끔찍한 상황들은 그런 목적으로 고안되었다. 영화 막바지에 배치된 또 하나의 결정적 장면에서 처참한 파국의 광경은 직접적으로는 계급상승의 꿈에 의해 촉발된다. 물난리가 주는 교훈을 새기기 거부한 아들 캐릭터가 산수경석을 들고 지하벙커의 문을 열면서 종잡을 수 없는 괴이한 순서로 서로 죽고 죽이는 지옥도가 펼쳐지는 것이다.

한편 이 모자란 인물과 달리, 다른 가족성원들은 순순히 이 세계의 ‘진실’을 인정할 준비가 되었거나 이미 그 ‘진실’을 인식하고 있다. ‘충’숙이라는 흔치 않은 이름의 어머니 캐릭터는 이미 물난리를 겪기 전부터 자신들을 바퀴벌레에 비유하고, 실제로 이 가족은 갑자기 들이닥친 집주인을 피하는 과정에서 바퀴벌레로 변신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아버지와 자식들이 같은 글자 ‘기’(기택, 기우, 기정)를 돌려쓰는 나머지 가족들의 작명까지 고려하면 인물들의 이름이 이미 이 가족의 운명을 예고하고 있다.

민중주의 대신 ‘국개론’?

이 영화의 위악적인 시선이 이 정도이다. 나는 일종의 충격요법으로서 이 영화의 선택에 대체로 공감하는 편이다. 긴 설명이 필요하겠지만 질러 말하자면, 좀 더 표준적인 좌파 관점의 계급우화가 감상적인 신화가 되었다는 인식을 피할 수 없는 시대지 않은가. 너무나 설명적인 제목 선정부터 그런 류의 이야기에 대한 창작자의 강한 반발심을 읽을 수 있다.

보다시피 그 제목은 ‘낚시’였다. ‘이 체제에서 진짜 기생하는 존재는 누구인가’라는 좌파 계급우화의 고전적인 질문에 대해 표준적인 해답을 내놓으리라고 예상했던 나같이 안일한 관객은 한방 크게 맞았다.

대신 영화는 소위 애국우파나 일베의 행태가 연상되는 기괴한 인물유형을 창조하고, 보다시피 그 인물을 상징의 힘으로 가난한 자들을 대표하는 존재로 만들고 있다. 그러나 역시 이 영화는 과했다. 창작자 본인이 설계한 우화에서 자신이 의도한 구도를 비껴나는 요소들이 삐져나올 때 그것들을 처리하는 방식이 참으로 문제적인 것이다.

영화는 가난한 가족을 기생충으로 전락시키고 그들에게 자신들의 위치에 대해 승복을 받아내지만, 바로 그 지점으로부터 발생하는 연대의 가능성은 뭉갠다. 물난리 후에 지하인간 부부와의 공존을 모색하는 모녀의 스치듯 짧게 지나가는 대사를 보면 창작자 자신도 그 점을 의식하고 있었다.

지난밤 처음 대면했을 때 “불쌍한” 처지를 호소하던 지하인간 부부와 자신들을 구분 짓던 태도가 무너지면서 동질감이 생겨난 것이리라. 동시에 “어젯밤은 다들 너무 흥분해서” 놓친 두 가족의 공동의 이해관계에도 생각이 미쳤을 것이다. 두 가족은 서로의 비밀을 지켜주어야 자신들의 핵심이익을 지킬 수 있는 상황이다. (예컨대, 쫓겨난 가정부가 협박한 대로 가난한 가족의 정체를 박사장 가족에게 폭로하는 순간 자신의 남편도 지하의 거처를 잃을 것은 자명하다.)

그러나 한밤의 소동 속에서 충숙의 강력한 뒷발길질 한방에 진즉에 공존의 가능성은 날아가고, 더 나아가 그 우발적인 단발성의 폭력을 포석 삼아 그야말로 끔찍한 폭력의 난장이 펼쳐진다. 확실히 기존의 계급우화를 답습하지 않겠다는 창작자의 강한 의지가 거듭 확인된다.

나는 이 사회의 견고한 계급질서에 대한 냉정한 인식만큼이나 민중론으로 대변되는 과거의 낙관적인 진보적 전통에 대한 부정이 이 영화를 관통하는 핵심작의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조합은 쉽게 예상되듯이 상당히 위험하다. 그 생각을 밀어붙이면 소위 ‘국개론’ 비슷한 입장이 도출되는 것이다. 명민한 창작자는 당연히 자신이 창조한 이야기의 함의를 의식하고 있었다.

파국은 파국일 뿐

파국의 장면 또한 놀라움을 준다. 혼돈 자체를 즐기는 듯 한 장면이지만, 삶과 죽음을 가르는 논리를 찾아보자면 연대의 가능성을 품고 있던 딸이 죽고 멍청한 아들은 살았다. 이 파국의 장면에서 혁명의 희미한 그림자도 찾아서는 안 된다는 듯이. 그리고 폭력과 죽음이 난무하는 중에도 처음 만난 ‘숙주’에게 “리스펙트!”를 외치는 ‘지하인간-기생충’! 죽음의 고통으로 버둥거리는 그에게 다가가 살인도구인 바비큐 꼬챙이에 달린 소시지를 빼먹고 있는 강아지 무리의 모습은 어떠한가? 그 기괴한 광경은 좀 꼬아놓긴 했지만 잔인할 정도로 ‘국개론’에 대응하는 이미지 아닌가?

그런데 여기서 대반전이 일어난다. 가난한 가족의 가장이 박사장을 칼로 찔러 죽이는 것이다. 이 살인은 구조의 측면에서는 명백히 혁명으로 유비되고 있다. 자신이 아니라 지하인간의 냄새에 역함을 표시하는 박사장의 표정이 살인을 촉발시키니, 이 살인은 연대(=동일시)의 표현인 것이다. 이 살인의 심리적 동기를 설득하기 위해서 앞서 상당한 복선이 배치되어 있지만, 그러나 역시 이 살인은 부조리하고 영화는 그런 사실을 굳이 감추지 않는다. 자신이 보는 앞에서 딸을 죽인 자를 위해 복수하다니! 뉴스 보도에서 거의 코믹하게 재현되는 방식을 보면 이 살인은 혁명의 조잡한 패러디에 가깝다.

파국의 장면이 기이한 방식으로 종결되도록 설계된 것은 새로운 지하인간을 창조하기 위해서였다. 사실 살인자가 되어 지하로 도피하게 된 반지하 가족의 가장은 이미 선배 지하인간을 계승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는 “대만 카스테라”의 실패를 비롯해서 선배 지하인간과 (영화의 원제인) ‘데칼코마니’처럼 겹치는 삶의 역정을 거치면서 ‘무계획’의 철학에 도달한 터였다.

그러나 그는 선배 지하인간의 단순한 반복은 아니다. 그는 파국의 경험을 통해 모종의 각성이 보태진 지하인간이다. 지하인간이 된 후 가장 먼저 위험을 무릅쓰고 “예를 갖춰” 문광의 장례를 치른 것은 자신이 인간임을, 즉 기생충의 수준으로 떨어지지 않을 것임을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행위였을 것이다.

막연한 대로 연대의 가능성을 암시하는 듯 한 이런 장면을 통해 창작자는 영화 내내 그렇게 부정하려 애썼던 민중주의 전통을 서둘러 소환하는 것 같다. 그리고 퇴행성을 떨쳐버린 지하인간이라는 형상 자체가 정치적 함의가 적지 않다. 이때 지하인간 되기가 얼마간 자발적인 선택이었다는 암시가 중요하다. 영화는 아버지를 구조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아들의 절절한 내레이션으로 끝나지만, 부자가 되겠다는 아들의 계획이 개꿈일 뿐이라는 것을 모르는 이는 아들 자신뿐이다.

그러나 영화는 그런 시선을 벗어나는 지하인간의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지는 않고, 그럴 생각도 없다. 그저 절대적인 국외자/진실을 기록하는 견자 같은, 서구문학에서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인물유형과의 관련성을 유도하면서 이 인물을 체제 바깥의 존재로 자리매김하려는 제스처에서 멈추는 것이다. 이런 결말 구성은 앞선 이야기와 최소한의 균형을 맞추려는 시도일 텐데, 그저 알리바이로 도입된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도 든다.

이정진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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