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 아는 것이 모르는 것인가

철학여행까페[30]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l승인2008.04.28 1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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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희
하이델베르크 대학 전경

독일의 모젤 지역은TV나 벽지 광고 이름으로 많이 등장해 우리에게도 친숙하다. 모젤 지역은 TV나 벽지가 아니라 백포도주 생산지로 유명한 곳이다. 포도가 무르익는 매년 가을에는 모젤 강을 따라 조그만 동네마다 포도주 축제가 열리곤 한다. 그때 많은 사람들이 포도주를 마시기 위해 바인스트라세(포도주의 길)을 순례한다. 꼭 포도주를 마시지 않더라도 가을의 정취와 아름다운 풍광을 볼 수 있으니 한 번 방문해 보라고 권하고 싶다.

독일의 철학자 니콜라우스 쿠자누스

그러나 모젤은 포도주 산지로 유명한 것만이 아니다. 모젤은 철학사에 유명한 철학자를 2명이나 배출한 지역이기도 하다. 그 한 명이 모젤강변에 위치한 트리어라는 도시에 태어 난 칼 맑스이다.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중세 때 유명한 신학자이자 철학자이며 교회정치가였던 니콜라우스 쿠자누스다. 쿠자누스라는 이름도 모젤 강변의 쿠스지역에서 출생한 사람이란 뜻을 나타낸다.

니콜라우스 쿠자누스는 보기 드물게 이론에서 뿐만 아니라 현실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던 사람이다. 소박한 어부의 아들로 태어나 교황의 직무 대행자리까지 올랐으며, 교회의 혼란한 정치의 와중에서도 철학적으로 그리고 신학적으로 중요한 저서들을 집필했다.

그는 1401년에 쿠스에서 모젤강의 어부이자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귀족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가난한 집안도 아니었다. 그의 어린 시절 일화를 보면, 고집이 꽤나 셌던 성격이었던 것 같다. 그가 언젠가 아버지와 다투었을 때, 화가 난 아버지가 그를 배에서 물속으로 집어 던졌다고 하니까. 하여튼 그 일로 해서 그는 집을 가출했다고 하는데, 가출기간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는 1413년 네덜란드의 데펜터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고, 주목을 받았다. 1416년 이후 하이델베르크대학교에서 법학과 인문학 공부를 했다. 그리고 이탈리아의 파도바대학교에서 22세의 나이로 박사 학위를 취득해 고향으로 돌아 와서 변호사로 활동했다.

그러나 변호사 생활은 오래 가지 않았다. 그가 자신 있게 맡았던 첫 번째 소송에서 패했던 것이다. 그는 그 일로 법조계에서 손을 떼고 루뱅 대학교의 교회법 교수직 제의도 거절한 채 성직자가 되기로 결심을 한다. 그러나 법조인으로서 그의 능력은 교회정치에서 빛을 발하게 된다.

그는 성직자가 되어 처음에는 교황에 맞서 바젤공의회(公議會)에 가입했다. 그러나 공의회가 교회의 통일성을 유지하는 일에도, 필요한 개혁 입법을 제정하는 것에도 실패하자 입장을 바꾸어 열성적인 교황지지파가 되었다. 그는 분쟁을 조절하고 협상을 진행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보인다.

이동희
니콜라우스 쿠자누스 , 1493년 목판화
분쟁 조절의 탁월한 역할


그는 교황과 바젤의 종교 회의 사이의 반목을 중재하고자 했고, 트리어 대주교의 임명권을 둘러 싼 분쟁과 보헤미아의 후스 교회와 로마 교회를 화해시키는 데에도 관여를 했다. 얼마 가지 않아 교회 밖의 일인 바이에른 지방의 귀족들의 불화, 스페인과 영국의 분쟁까지 조정할 정도로 그의 조정역할은 대단한 인정을 받았다.

심지어는 귀족들의 결혼 중재도 위임 맡을 정도였다. 그는 동방교회와 로마교회 사이의 화해를 이루기 위해 교황의 특별사절단으로 콘스탄티노플도 방문했다. 그는 콘스탄티노플을 방문하고 돌아오는 길에 무한한 바다를 보면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철학적 발견을 한다. ‘무한한 바다’와 같은 ‘신’을 인간의 유한한 인식은 알 수가 없다. 그러한 철학적 발견을 그는 유명한 저서 <아는 무지 De docta ignorantia>(1440)에 담았다.

니콜라우스 쿠자누스에 의하면 인간은 신적 본질의 무한성에 합리적 인식으로 도달할 수 없다. 오히려 그는 ‘파악할 수 없는 신’에 도달하는 길은 ‘아는 무지’를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사실 ‘무지의 지’ 또는 ‘아는 무지’ 또는 더 정확하게 말해 ‘알게 된 무지’로 번역되는 ‘docta ignornatia’는 이전에 아우구스티누스의 서한에서도 보인다. 알게 된 무지는 신을 인식하기 위해 이성적 지식을 구하는 것을 포기하는 것을 뜻한다. 앎을 포기하고, 우리의 무지를 깨닫는데서 부터 신에 대한 인식이 시작한다. 이 얼마나 역설적인가! 그는 무지의 지에 대해 이렇게 말을 한다.

알려고 하는 욕망

“아리스토텔레스는 제일 철학에서 주장하기를, 우리가 본질적으로 가장 명확한 것들을 접할 때 겪는 어려움은 밤의 올빼미가 태양을 볼 때 겪는 어려움과 같다고 한다. 이 모든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 속에 있는 알려고 하는 욕망은 헛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분명히 우리가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알려고 하는 욕망이다.

만일 우리가 이것에 완전하게 이를 수 있다면, 우리는 아는 무지에 이를 것이다. 아는 데 아무리 열심인 사람일지라도 원래 자신의 것인 무지 속에서 가장 잘 알았음을 확인하는 것보다 더 완전한 일은 인간에게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더 많이 알면 알수록, 우리는 우리가 무지하다는 것을 그만큼 더 알게 된다.”

그는 콘스탄티노플에서 돌아 온 후에도 독일제국의회에서 교황의 직무를 대행하며 교회의 개혁을 위해 노력했다. 당시 독일의 수많은 수도원들은 방종한 여자들과 주연이 벌어지고 매춘부들과의 음란, 수도원과 수녀원 사이에 사악한 교제가 만연해 있었다.

그는 교황의 명을 받아 한 치의 타협도 없이 독일 교회를 개혁하고자 애썼다. 그는 개혁을 위해서라면 개혁에 반대하는 신부를 라인 강에 빠뜨려 죽이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이후 교황에 의해 브릭센의 주교로 임명되어 수많은 교회개혁을 단행하였다.

그는 로마로 돌아와 교황이 없는 동안 교황의 직무를 대행했다. 이 시기에도 그는 이탈리아의 작은 도시들의 분쟁을 처리하고,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터키인에 대항하기 위한 십자군 파병준비에 관여하는 등 교회정치가로서 분주한 나날을 보냈다. 그는 십자군 원정 전함의 출범을 재촉하려 가는 도중에 1464년 63세의 나이로 죽는다. 그의 유해는 로마의 빈콜리에 있는 성베드로 성당에 안치되었다.

그는 일생동안 교회정치가로서 분주한 나날을 보냈다. 그런 와중에서도 그는 수많은 책들을 저술했다. 그러나 그는 저술활동에만 그친 것이 아니다. 오랜 세월이 흘러 뉴턴과 라이프니츠에 의해 비로소 완전하게 정리가 되는 미적분을 그때 이미 그는 ‘무한성’과 관련하여 연구를 했다.

그는 중세에서 근세로 넘어가는 르네상스의 시기의 사람답게 자연과학적 실험을 통한 지식을 강조했다. 식물의 성장에 관한 연구를 통해 식물이 대기로부터 영양분을 흡수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리고 공기가 무게를 갖는다는 사실을 최초로 증명하기도 하였다.

또한 천문학자 코페르니쿠스보다 앞서서 지구가 태양계의 중심이 아니라는 것과 지구가 돈다는 사실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주장하였다. 그가 쓴 논문 중 가장 흥미로운 것은 ‘안경에 대하여’라는 논문이다. 당시의 안경은 두 개의 알을 맞추어서 사물을 보는 것이었다. 그는 안경을 예지와 하나님의 지혜를 상징하는 것으로 여겼다. 그가 그의 책 <아는 무지>에서 신을 ‘모든 대립의 소멸’로 파악했듯이, 두 개의 안경알도 일치하면 그 속에서 ‘대립의 해소’가 일어나 더 사물을 잘 보여 주기 때문이다.

이동희
콘라트 폰 조에스트, 안경, 1403 제단화
신에 대한 인식의 탐구


그러나 안경을 쓴다고 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더 잘 보고 인식할 수 있을까? 그는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처럼 신비주의적 방식을 통해서나 철학적 사유를 통해서 무한한 신을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본다. 그렇다면 신에 대해 정말 우리는 인식할 수 없다는 말인가? 신을 인식할 수 없다면, 신학은 불가능한 것이 아닌가.

그는 우리 인간 측에서 신을 알려고 하는 모든 시도는 실패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에 의하면, 신을 인식할 수 있는 유일한 한 가지 방법이 있다. 그것은 신 측에서 인간에게 관여해 오는 것이다. 그는 인간이 신과 접촉할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은 신의 가장 고유한 계시로부터 생겨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신은 그 모든 현자들의 눈에는 가려지고 숨겨져 있지만, 그가 은총을 하사하고 있는 가장 겸손한 자에는 나타난다.”

이렇게 그는 신에 대한 철학적 물음을 끝까지 밀고 나가 궁극적으로 신앙으로 넘어갔다. 그러나 그가 신에 대한 인식의 탐구에서 보여주었던 과정은 이후 죠르다노 브루노, 셸링, 헤겔의 변증법까지 많은 철학자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 \'구스타프 슈바브 그리스로마신화\' 역자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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