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창과 꼰대-언어의 인지장애

‘꽃대 아우들’ 섬기는 ‘꼰대 선배’가 되자 강상헌 기자l승인2019.07.11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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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들이 우리말의 총명성을 해치는 언사(言事)로 입길에 오르내린다. 한 이는 ‘달빛창문’으로 알았다고 했다. 또 한 이는 현실 논리에 맞지 않는 아들 자랑 끝에 관중석 여대생들에게 “내가 꼰대처럼 보입니까?”라고 질문한 것이 어지러운 이야기꽃으로 이어졌다.

(공격) 대상을 ‘달빛창녀단’이라고 욕하고는, ‘달창이 그런 뜻인지 몰랐다’고 했다는 것이다. 또는 ‘닳거나 해진 (신발의) 밑창’이라는 사전의 ‘달창’뜻을 들어 보이며 ‘그런 뜻’이 아니었다고 강변하는 얘기도 들린다. 하릴없이 시민들은 바보가 됐다. 그는 제 정신인가?

▲ 꽃을 지탱하는 자루(花柄 화병) 또는 축(花軸 화축)이 꽃대다. 다음 시기를 마련하는, 식물 세계의 귀한 상징이다. 어리석은 꼰대가 꽃대를 표방하면 ‘미래’가 없다.

입에 올리기도 끔찍하고, 불결하다. 달은 월(月), 영어로 문(moon)이다. 속뜻을 적시(摘示)하기 위한 부득이한 이런 설명을 양해해 주시기 바란다. 거리에서 태극기 흔드는 이들이 ‘문빠’와 함께 들먹이는 요즘 비속어(卑俗語)가 ‘달창’이다.

‘달빛기사단’의 패러디다. 문재인 대통령과 그 지지자들을 모욕하고자 하는 저열한 언어다. 그러고는, 고소했을까? 요즘 말로 그 ‘개인취향’을 알 수도 있겠다.

같은 한국어를 말하는 이들 모두의 상식과 인격에 모욕의 도끼질을 가한 것으로 본다. 이런 견해에 논리적인 설명은 필요하지 않을 터다. “내가 언제 그랬니?”하는 투로 딴청 부리는 억지는 마냥 역겹다. 기껏 그게 정치인가.

달빛창녀단도, 해진 밑창도 문제다. 정말, 그래선 안 된다. 만에 하나 ‘달빛창문’으로 이해해야 한다면, 그 ‘정치’의 소비자인 우리 납세자들의 비참함은 더 크다. 심각한 언어적 인지장애로 본다. 저 정도 변명 밖에 못 내놓은 상상력 빈곤은, 차라리 ‘예의 없음’으로 보고 싶다.

말엔 의도(意圖)가 있다. 표어 ‘바르고 고운 말’은 의도가 착해야 한다는 뜻이다. 심성(心性)의 문제다. 정치도 법률도 이 심성이 바탕이어야 한다. 아니면, 인간성을 말살하는 반(反)문명의 테크닉에 불과할 터다.

상대에게 자기 말의 정당성을 강요하기 위해 개연성(蓋然性)을 강조하거나 거짓말을 한 것은 패착(敗着)이다. “(아들의) 스펙과 점수를 낮춰 말한 것도 거짓말이냐?”는 발언은 상식인의 발언인지, 믿어지지 않는다. 자신만의 생각을 전체의 생각으로 늘 착각하는, 딴 세상 사람이려니.

정말 저렇게 생각하나? ‘대학도 나오고 벼슬도 한 사람이니 뭔가 일리는 있겠다’하는 청중의 혼란을 부르고자 한 것일까? 그 질문은 자신이 꼰대가 아니라는 ‘자기 생각’을 대상에게 강조하고 강요하는 행태다. 자신을 ‘꽃대’라고 여기는 것이리라.

역설적으로, ‘꼰대’관련 담론(談論)은 후배 세대를 이해하고 지지하고 응원하는 선배들의 낙낙한 덕성이 바탕이겠다. 스스로를 꼰대로 부르고, 아우들 후세들을 꽃대(화축 花軸·floral axis)로 섬기며, 몸과 마음으로 절제의 모범을 행동하는 마음 자세를 말한다.

세월만큼의 덕성 갖춘 이런 꼰대 선배들은 꽃대의 자격이 있다. 이 자격에는 후배를 꾸중하여 지도하는 의무도 따른다. 무릇 선배들의 좋은 쓸모는 청년 아우들에게 ‘실패도 멋지다’는 용기를 주는 데 있다. 자기 성찰과 끊임없는 공부 없인 이룰 수 없는 통찰(洞察)이겠다.

‘달빛 창문’도, ‘내가 꼰대냐’는 질문도 성찰 없음의 한 반영으로 본다. 내 세금이 기껏 저런 치졸한 막말로 변용돼 세상을 더럽히는 것을 본다. 무지한 의도를 위해 말의 뜻을 혼미(昏迷)하게 하는 행태, 저들은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모른다. 언어적으로도 인지장애 수준이다.

세상아. 청년아. 두 눈으로, 마음의 창(窓)으로 우주 너머까지를 직관(直觀)하자. 인터넷 검색과 스마트폰의 조각 지식만으로는 세상을 결코 열 수 없다. 다음 세대에 부끄럽지 않도록 ‘나’를 명상하라.

토/막/새/김

무례(無禮) 극치 이른 우리 언어

‘차이(差異 difference)’는 사물의 개념과 이름을 짓는 데 중요한 요소다. 대동소이(大同小異) 숙어 속의 ‘작은 다름’小異가 여럿 중 하나인 ‘그 것’의 본질을 구성한다는 것이다.

해체주의 철학자 데리다(J. Derrida)나 구조주의 언어학자 소쉬르(F. Saussure)의 정체성(正體性) 인식에 기댄 설명이다. 그들은 A와 B를 대비(對比)하는 것으로 바탕을 찾고자 한다.

‘유전무죄 무전유죄’ ‘군자 화이부동(和而不同) 소인 동이불화(同而不和)’등의 대구(對句)에 오래 익숙한 우리로선 서양 학문의 저런 시도가 되레 상식적이다. 그 차이의 인식과 존중은, 평화에 이르는 길이기도 하다. 오래 붙들어야 할 화두(話頭)다. ‘대충 그러려니’하는 개연성에 기댄 생각, 다 저 같은 줄 아는 편견은 사물의 본디를 이해하는 데 방해가 된다. 달빛 창녀단과 달빛 창문, 꼰대와 꽃대의 ‘차이’를 무시하거나 무지한 채 매번 말로 세상의 뜻을 왜곡한다면 곧 우리는 사전(辭典)을 버려야 할 것이다.

문득, 어쩌다 우리의 언어가 이토록 무례(無禮)의 극치에 이르렀나 하는 부끄러운 생각이 든다. 자괴감(自愧感)이다. 다만, 너무 늦지 않았기를 기대한다.

강상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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