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의 푸념

[시민기자석] 한석현l승인2008.04.30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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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이 이룩된 나라라면 고희나 산수의 고령 노인이 왕성하게 현역에서 활동하는 예는 흔하다. 그렇듯 노소가 어우르고 하모니를 이룸으로써 세련미 넘치고 가다듬어진 문명국의 약여한 면모를 과시한다. 불혹의 나이만 돼도 퇴물 단지 취급을 당해 설자리를 잃는 한국적 현실과는 동떨어져 부럽기까지 하다.

한국에서처럼 은퇴시기를 앞당기는 사회 풍조는 해방 후 기틀을 잡은 핵가족 제도와 무관하지 않을 듯하다. 황금율의 법칙에 빗대어 보더라도 이 같은 한국적 현실은 조로(早老)를 앞당기고 삶에서 열매를 아서 가는 결과를 빚는다는 의미에서 젊은 세대 스스로를 위해서도 은혜가 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역지사지해 보라. 천신만고 끝에 세운 금자탑을 서둘러 허무는 일의 쑥스러움을….

이 같은 풍조로 노인들은 크게 상실감을 느끼는 것 같다. 그로인해 형성된 세대간 간극, 그 메우기 어려운 갭을 정말 어쩔 참인가. 하긴 ‘장유유서’(長幼有序)를 표방하는 유불문화권 질서에 길들여온 노인들로서는 곰방대를 틀어 물고 “에헴” 헛기침만 해도 권위를 인정받던 해방 이전 시기, 곧 식민지나 왕조시대에 향수를 느끼는 것은 당연지사일지도 모른다.

구상유취(口尙有臭)라 했던가. 그런 사회 풍조를 반영했는지 몰라도 빌딩가 어느 조직체에 들어가 보면 젖비린내가 진동을 한다. 위로는 사장으로부터 아래로 청소부에 이르기까지 온통 20~30대 일색으로 진용이 짜여져 있는 것이다.

조직체의 유기적인 발전 역량을 축적하려함에 있어서 연령이나 세대별 구분이 차지하는 비중이 어느 정도인지는 조직체가 처한 여건이나 직종 여하에 따라 각기 다를 수 있다. 가령 경찰이나 교도관처럼 업무의 특성 상 건강과 신속, 기민성이 채용 조건으로 돼있는 조직체도 있긴 하다.

문제는 경륜을 필요로 하며 국가의 명운이나 사활 관건이 걸린 대사 등 외교관을 임명함에 있어 과거 권위주의 통치 하에서 그러했듯이 단선적 사고방식을 지닌 젊은 장성 출신을 대상으로 고려한다면 결과가 어찌될 것이냐는 데 있다.

청춘예찬론에도 있듯이 사람이 젊음에 끌리는 마음을 어쩔 도리는 없다. 젊음에는 싱그러움이 있고 박력이 넘쳐흐른다. 어름다운 빗깔로 색칠이 돼 동경의 대상이 되고 누구나의 눈을 쉽게 끈다. 그에 비해 노인의 주름진 얼굴은 볼품이 없다.

젊은이들은 하기 쉬운 생각으로 노인의 주름투성이 얼굴을 달가워하지 않고 어떻게든 곁을 떠나고 싶어 한다. 진지한 비판의 눈을 번뜩여 보면 그러나 이는 정욕에 이끌리는 가다듬어지지 못한 마음이 아닐까. “형만 한 아우가 없다”는 속담도 있거니와, 경험학적 진단에 의하더라도 사람을 감칠맛 나게 하는 인간적 조예나 경륜, 도야된 인격과 달관 등은 섭렵한 지식에서 보다 경험의 축적에서 우러난다고 보아야 할 상당한 이유가 있다.

매너리즘 풍조에 빠진 시세의 젊음들은 학력 수준이 높음을 긍지로 여겨 엘리트 연하며 언감생심 상대적으로 학력 수준이 낮은 어른을 능멸하는 못 말릴 작태를 연출하곤 한다. 하루 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만용일 뿐이다.

경험은 지식의 아버지다. 아무리 신 들메를 고치고 또 고쳐 앞으로 달려가 도 따라잡기 어려울 만큼 아득히 먼 시간 거리에 있으며 진취와 안정이 공존하고 조화를 이루는 바탕 위에서만 미학적 개념에 어울리는 아름다움은 창조되는 것이다.

“인생사 다 헛되고 헛되다”는 솔로몬의 고백처럼 인생의 노른자위라 할 청장년 기를 거친 것이 엊그제인 데 어느덧 산수 나이를 앞두고 보니 허탈감만이 앞선다. 과거를 돌이켜 보는 마음이 그리 명랑 상쾌하지 않으며 여운이 개운하지 않다함이 솔직한 고백이다. 아니 현재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남을 입어 영적으로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됐거니와 인간 차원에서 보더라도 과거는 후회스러운 일 뿐이다.

신세타령 끝에 시세의 젊음들에게 줄 당부의 말이 있다. “부모에게 지극한 효성을 받치는 노력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집념으로 간직하라”는 충고다. 이는 부모의 은공이 태산 같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것만이 축복 된 삶을 사는 장수의 길이기 때문이다. 효도의 꼭지 점에 올려놓아야할 항목은 무어니 해도 용돈이다. 사회보장 제도가 제대로 정착된 사회라면 책임을 국가에게 떠넘길 수도 있을 것이로되 시늉만의 복지연금이 주어질 뿐인 나라에서 자식이 부모님에게 무관심하다면 언어도단의 망발일 것이다.

기독교인으로 부럽진 않으나, 함께 군 생활하던 옛 전우 가운데 딸 둘이 경쟁적으로 부모에게 매달 200~300만원의 용돈을 주어 세계 여행을 즐기며 사는 이가 있다. 이전에 가난에 찌들어 살던 이인데 자식들 머리가 뛰어나 장학생으로 미국 유학을 가 출세하여 그곳에 정착했다고 들었다.

혹자들은 반론을 제기할지도 모른다. 부자니 그럴 수 있다고. 과연 그럴까. 천만의 말씀이다. 효도를 하고 안하고는 마음에 달렸지 세상에는 빌딩을 가지고 살면서도 부모에게 노랭이짓하는 자식이 수두룩하다.



한석현 신앙에세이 ‘하늘나라 영광나라’ 저자

한석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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