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과 운명-죽음의 갑골학

국어사전도 부정하는 현장언어, 보도자료에 휘둘리는 언론 강상헌 기자l승인2019.07.22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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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랏말싸미’라는, 우리말의 연혁(沿革)과 미덕을 주제로 한 영화에도 출연하여 더 관심을 모았던 배우 고(故) 전미선을 독자 여러분과 함께 추모한다. 좋은 배우였다고들 한다.

그의 사망 보도를 보면서 마음에 걸리는 대목이 있었다. 신문 방송 인터넷 등의 기사 절반 이상이 ‘전미선이 운명을 달리했다’였다. 나머지 매체의 표현은 ‘유명을 달리했다’였다. 아끼던 이의 궂긴 소식을 ‘죽었다’ 또는 ‘사망했다’고 쓰는 것이 섭섭했겠다. 그의 소속 연예기획사는 부고(訃告)를 겸한 보도자료에서 ‘배우 전미선 씨가 운명을 달리했습니다’라고 썼다.

▲ 영화 ‘나랏말싸미’ 발표회 때의 배우 고(故) 전미선.

죽음과 관련한 표현 또는 어휘는 (국제적으로) 다양하다. 그런데 대부분의 언론이 이 슬픈 소식을 ‘운명을 달리했다’처럼 ‘**을 달리했다’라고 쓴 것은 그 보도자료의 ‘영향’이었을 것이다.

그 중 하나, ‘운명을 달리했다’는 기사의 대부분은 연예기획사의 보도자료를 전적으로 참고(?)했을 것이다. 그런데 ‘유명을 달리했다’는 표현은 뭐지? 운명과 유명은 같은 말인가?

기업체나 기관의 홍보 담당 직원이나 언론사 기자가 가진 어휘(語彙)의 차이가 빚은 현상으로 보인다. 어휘(력)의 수준에 따른 언어 구사의 능력은 사람마다 천차만별이다. 500개의 단어로 말하고 생각하는 사람과 5000개 단어를 가진 사람의 차이라고 생각해보자.

운명이라 하면, 얼핏 두 단어를 연상한다. 첫 번째는 ‘운명은 이렇게 문을 두드린다’고 작곡자가 말했다는 베토벤 교향곡 5번을 예(例)로 들 수 있는 운명(運命)이다. 영어로는 데스티니(destiny)다. 두 번째 운명(殞命)은 ‘생명이 끊어짐’ ‘목숨이 다함’이란 뜻의 단어다. 죽음이다.

이 두 ‘운명’은 외래어처럼 한국어의 구성요소 중 하나인 한자어다. 즉 그 말의 뜻(속뜻)을 運命과 殞命이라는 한자가 붙들고 있다는 것이다. 運은 ‘자동차 운전’의 운이다. 殞은 ‘죽다’이다. 이제 ‘운명을 달리한다’는 말이 어떤 뜻도 가지지 못하는 맹목(盲目)의 비문(非文)임을 알 수 있다. 모르고 남의 말을 베껴 쓴 잘못된 글인 것이다. 보도자료를 그대로 베끼지 않고 고쳐 쓴 언론사를 이제는 칭찬해야 할 상황일세.

유명은 동음이의어(同音異議語·발음은 같고 뜻이 다른 말)가 여럿이다. 몇 개 안되는 문자를 조립해 무수히 많은 일(事 사)과 물건(物 물) 즉 사물의 이름을 짓기 때문에 동음이의어는 (대부분의) 언어에서 불가피하다. 그 구분의 방법이 또한 어문법의 중요한 대목이다.

‘유명’의 동음이의어들 중 죽음과 관련한 말만 떠올려도 幽明 幽冥 遺命 등이 있다. 이 ‘유명’들은 그 뜻을 붙들고 있는 한자의 풀이 없이는 정확하고 적확(的確)한 활용이 쉽지 않다.

幽明은 어둠(幽)과 밝음(明)의 한자를 나란히 놓아 저승(죽음 이후의 세상 幽)과 이승(지금 세상 明)을 함께 말한다. 명상(冥想)이라 할 때의 ‘명’이 든 幽冥은 어둡고 그윽한 세상 즉 저승(幽)이다. 遺命은 유언(遺言)처럼 부모나 임금이 세상을 떠나며 후세에 남긴 뜻(명령)이다.

오늘의 주제인 ‘유명을 달리함’은 이 중 어떤 유명일까?

익은 말 즉 숙어(熟語)처럼 쓰이는 이 말의 유명은 당연히 幽明이다. 우리의 넋이 이승의 몸을 떠나, 나비처럼 훨훨 날아 저승으로 가는 것이다. 저승과 이승을 달리하는, 죽음의 모습이다.

역사가 그렇듯, 뜻이 없는 말은 없다. 사람에게 영혼이 있는 것과 같다. 말의 뜻이 흔들리면, 그 말로 생각하고 소통하는 사람들과 세상의 영혼도 흔들린다. ‘유명을 달리함’의 사례로 우리말이 언론이라는 현장에서 뜻밖에 흐리멍덩하게 쓰이고 있음을 본다.

대학입시에서도 ‘읽어도 뭔 소린지 모르겠다’는 불평이 날로 커진다. 말글은, ‘가나다’를 아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글을 읽어 이해하고, 글을 지어 설명하는 것이 문해력(文解力)이다. 그런 말로 시도 쓰고, 철학도 하고, 수학도 한다.

사람 병 고치는 의학도 그런 언어로 배운다. 기적이라고나 할까? ‘사회의 목탁’ 언론인들마저도 ‘홍보’에 말려 이제 우리말을 헷갈리는 이런 상황을 그대로 보아야 할지, 이번 일, 빙산일각(氷山一角) 불과하니 더욱 저어함.

▲ 저승을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그윽할 유(幽)자의 갑골문.

토/막/새/김

상형문자 한자의 ‘그림 읽는 법’

유(幽)와 운(殞), 생명의 장엄한 종말을 그리는 저 글자들의 시초, 죽음과 직간접적으로 얽힌 사연, 3000년 전 갑골문(甲骨文)에 이미 또렷하다. 사람의 본디와 생사의 인연일러라.

실(糸,絲 사) 아래 산(山)처럼 변한 불(火,灬 화)이 있다. 그윽하다는 뜻으로 저승을 은유(隱喩)하는 그림글자 幽다. 명주실 몇 가닥 불에 사위고, 다음의 어두움은 칠흑이 아니다. 심연의, 의식의 끝 모를 전개다. 우주의 영원함이다. 이집트나 티베트의 ‘사자(死者)의 서(書)’에 나오는, 저승을 향하는 깊은 통로를 연상한다. 인류학적인 유사성이라 본다.

殞은, 죽고 난 다음 남은(부서진) 뼈인 알(歹)이 뜻(形 형)요소, 사람 수효(數爻)의 뜻 원(員)이 소리(聲 성)요소로 만나 ‘(사람이) 죽다’는 뜻을 이뤘다. 사(死) 몰(歿) 등에 든 歹을 떠올리자. 뼈 골(骨)과 구분된다. 상형문자 즉 그림글자인 한자의 ‘그림 읽는 법’이다.

강상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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