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속 지배의 정당성 시민 동의로”

철학여행까페[31]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l승인2008.05.06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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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희
아비뇽

1328년 5월 26일 위대한 프란체스코 수도회 승려 오캄은 바이에른 황제 루트비히를 찾아 피사로 도피했다. 프란체스코 수도회 총회장 미카엘이 교황의 소환을 거부하고, 비밀리에 아비뇽을 몰래 떠나기로 결심하자 오캄도 동행하기로 했던 것이다. 동행하기 보다는 뜻을 함께 하고자 했다. 뜻을 같이 한 또 한 사람의 승려는 파두아 출신의 마르지글리오였다.

면도날 철학자 월리엄 오캄

프란체스코회는 청빈을 내세우며 로마교황청의 사치와 부패를 비난했다. 당시 프란체스코 수도회 총회장 미카엘과 그의 지지자들은, 예수와 그의 제자들은 사적으로든 공적으로든 재산을 전혀 소유하지 않았다는 주장을 내세우며 청빈을 이론적으로 옹호하였다. 미카엘은 교황을 알현하는 자리에서 대놓고 교황에게 대항하다 아비뇽에 유폐되었다. 그러다 아비뇽을 몰래 탈출해 도피를 하게 된 것이다.

교황 요한 22세는 프란체스코회에 대한 이단 심문을 하기 위해 그들을 아비뇽으로 불렀다. 그러나 그들은 바이에른의 독일 황제 루트비히에게로 갔다. 그들은 막 로마에서 돌아오던 황제를 피사에서 만났다. 황제는 로마에서 아비뇽에 있는 황제 대신 새로운 교황을 세우고, 그 교황으로부터 로마 황제의 왕관을 받았다.

로마 교황에게 반기를 든 이 수도사들은 황제를 따라 뮌헨까지 갔다. 뮌헨은 로마 교황의 박해를 피해 온 수도사들 때문에 자연스럽게 교황 요한 22세에게 대항하는 지적 투쟁의 중심지가 되었다. 오캄은 그곳에서 교황권에 대항하는 중심적인 인물이 된다.

오캄은 루트비히 황제를 처음 만난 자리에서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한다.

“오 황제여, 당신의 칼로 나를 지켜주신다면, 나는 기꺼이 당신을 나의 펜으로 지켜드리겠나이다.”

이동희
오캄의 모습
오캄은 루트비히 황제에게로 도피하기 전에 이미 아비뇽에서 청빈의 문제에 대해 연구하였다. 그는 요한 22세의 법령들이 이전 교황들의 성명서들과 모순적이라는 것을 발견하고 교황에 반대하는 입장에 뜻을 같이 했다.

청빈에 대한 논쟁은 예상치 않게 정치적 문제로 점화된다. 독일의 황제 바이에른의 루트비히는 청빈에 대한 논쟁이라는 기회를 이용하여 자신의 정치적 야욕을 증진시키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이 정치적이고 신학적인 투쟁 속에 오캄은 교황의 적이라는 동지회로 내몰렸고, 교황과 반대편에 있던 루트비히 황제 편에 설 수 밖에 없었다.

월리엄 오캄은 아마도 런던 근처에 서레이 카운티에 있는 오캄이라는 곳에서 대략 약 1285년에 태어났다. 그는 일찍이 프란체스코 수도회에 가입했고, 1309년에서 1315년 사이에 옥스퍼드에서 고등단계의 신학을 연구했다. 그는 1315년부터 1317년까지 성경에 관해 강의했고, 1317년부터 1319년 까지는 ‘문장’을 강의 했다. 오캄의 이런 경력을 볼 때 신학교수의 역할을 했던 것 같은데, 그의 학력은 교육학사(Baccalaureus Formatus)로 나타낸다. 그에 대한 명칭도 현직 교수가 아니라 ‘시작하는 자’(Inceptor)였다.

그가 교수로 불리지 못하고 ‘시작하는 자’에 머무른 것은 옥스퍼드 대학의 전임 총장 루터렐이 그의 교수직을 맡았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루터렐은 광신적인 토마스주의자로 옥스퍼드대학의 학문적 경향과는 사실 맞지 않는 사람이었다. 루터렐은 대학당국의 이의제기를 받아 린컨의 주교 헨리 버트월쉬에 의해 자리에서 쫓겨났다.

루터렐은 이론적으로 오캄의 이론을 주로 공격했다. 어쩌면 오캄을 자신의 이론을 내세우기 위한 희생양으로 삼았는지도 모른다. 오캄은 토마스주의에 대항해서 유명론의 입장을 내세웠다. 보편적 개념은 단지 어떤 것을 가리키기 위한 이름에 불과할 뿐이며, 개별자만이 실재한다. 따라서 보편적 이념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이름에 불과하다.

루터렐은 아비뇽의 교황에게 오캄의 교육하는 이론을 이단으로 고발하였다. 교황은 1324년 오캄을 아비뇽으로 소환하였다. 교황은 이단 심문을 위해 그의 <문장집 주해>를 검토하는 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심리는 3년이나 걸렸다. 그의 이론은 비판을 받기는 했지만, 그러나 공식적으로 유죄판결은 받지 않았다.

그렇게 이단 심문을 받기 위해 와 있던 아비뇽에서 그는 프란체스코회의 청빈 논쟁에 연루되기 시작한다. 처음에 그는 아무 편도 들지 않았다. 그러다 그는 프란체스코 수도회 총회장 미카엘의 권고를 받고 청빈을 연구하다, 교황에게 반기를 들고 프란체스코의 입장에 뜻을 같이 했던 것이다.

당연한 결과이겠지만 오캄을 비롯한 이 수도사들은 교황에 의해 그리고 프란체스코 수도회에 의해서도 파문을 당했다. 오캄은 뮌헨에 남아 청빈의 문제에 대해 그리고 말년에는 국가와 교회 사이의 관계에 대한 글을 썼다.

그는 무엇보다 프란체스코 수도회가 강조한 사유 재산의 포기를 옹호하고 교황의 권력으로부터 세속적 권력인 왕권의 독립을 주장한다. 오캄은 세속적 권력의 정당성도 왕권신수설이 아니라 시민들의 자유로운 동의에서 찾는다.

“세속적 지배의 정당성은 시민의 자유로운 동의에 의거한다.”

이동희
뮌헨의 전경

지금은 너무나 당연한 주장이지만 오캄의 주장은 당시로서는 급진적인 것이었다. 그가 이런 급진적인 주장을 펼 수 있었던 것은 교황권에 맞선 황제 루트비히의 보호막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보호막은 오래 가지 않았다. 1347년에 황제가 죽어 버린 것이다. 오캄의 상황은 절망적이 되었다. 이후 그는 교황과 프란체스코 수도회와 화해를 시도했다. 그는 미카엘이 죽을 때 그에게서 물려받은 수도회의 인장도 수도회로 돌려보냈고, 황제의 처신이 잘못 되었으며, 로마 교황에게 충성하겠다는 복종고백서도 작성했다. 그러나 그가 복종고백서를 보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오캄은 그 복종고백서를 작성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기 때문이다. 아마 흑사병의 희생양이 되어 죽었던 것 같다. 오캄은 뮌헨에 있는 구 프란체스코 교회의 제단 앞 성찬대에 묻혔지만, 그의 무덤은 1802년에 없어졌다.

경험과 관찰을 강조

오캄이 당시 주류 철학에 대해 내세웠던 이론의 기본원리는 두 가지다. 하나는 전능의 원리이고 다른 하나는 소위 오캄의 면도날이라고 불리는 경제 원리이다.

전능의 원리는 신은 자신의 전능에 근거해서 모순을 포함하지 않는 것은 무엇이든지 만들거나 창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신은 전능하기 때문에 사물들을 신의 마음대로 지금보다 다르게 창조할 수 있었을 것이고, 또한 신이 창조한 피조물들이 만드는 것들에도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계는 신의 전능에 따라 얼마든지 다르게 창조될 수 있기에, 우리는 결코 원인과 결과의 연과관계를 필연적인 근거에서 인식할 수 없다. 피조된 세계는 우연적인 연관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세계는 어떻게 인식해야 하는가? 세계에 대한 인식은 사실적으로 현존하거나 발생하는 사건들을 경험하고 연구함으로써 가능하다. 여기서 오캄은 경제원리를 도입한다. 사건의 설명에 필수적인 아닌 모든 설명들은 불필요하며, 그것들은 면도칼로 잘라 내듯 잘라 내 버려야 한다.

“더 작은 것을 가정해서 설명할 수 있는 것을 더 많은 것을 가정해서 설명할 필요가 없다.”

또한 그는 쓸 데 없이 존재를 늘려서도 안된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보편적 개념인 ‘인간’은 하나의 존재가 아니라 개별적 인간들을 가리키는 이름에 불과하기 때문에 존재로 설정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존재는 필연성 없이 증가되어서는 안된다.”

근대 철학의 기초 놓다

오캄의 철학은 사변에 기초해서 세계를 설명하려 했던 스콜라철학에 대항해서 경험과 관찰을 강조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근대적 철학의 기초를 놓는다. 알베르트 마그누스, 토마스 아퀴나스, 둔스 스코투스로 연결되는 학파가 ‘고대의 길via antiqua’을 걸었다면, 오캄은 새롭게 ‘근대의 길via moderna’을 걸어갔다. 아니, 그가 그 길을 그냥 걸어갔다고 하는 것은 옳지 않은 표현이다. 오히려 고난에 찬 지적 투쟁을 통해 그는 없던 길을 만들어 걸어갔던 것이라 해야 옳을 것이다.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 \'구스타프 슈바브 그리스로마신화\' 역자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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