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인을 사랑하는게 신에게 죄가 되나”

철학여행까페[32]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l승인2008.05.13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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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희
페트라르카
밤이 깊어 오면 새벽도 가깝기 마련인가. 중세의 밤이 깊어 가자 근대의 여명을 알리는 별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중세의 어둠 속에서 근대의 여명을 알리는 수많은 별들 중에서 새벽별 같은 사람이 오늘 소개할 페트라르카이다. 페트라르카는 철학자로 분류되기 보다는 시인이며 문학자이다. 그래도 ‘철학사’에서 그를 빼놓지 않고 언급하는 이유는 그가 ‘인문주의’의 시조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유럽 인문주의 정신의 시조

페트라르카 (Francesco Petrarca, 1304~1374) 는 초기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중요한 인물이다. 이탈리아 르네상스는 중세의 종말을 알리고 근대의 서막을 알렸던 과도기적 시기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오늘날 르네상스라고 부르는 이 과도기의 시기를 르네상스라고 부른 것은 후대의 역사가에 의한 것이다. 프랑스 역사학자 미셀레는(J. Michelet)가 1854년에 유럽의 15~16세기의 시기를 ‘세계의 발견, 인간의 발견’이라고 하면서 ‘재탄생’이라는 의미로 르네상스라는 말을 쓴 것이다.

미셀레가 정의한 것처럼, 르네상스의 시기는 발견과 발명을 통해 ‘세계’와 ‘인간’에 대해 중세와 또 다른 인식을 가져왔다. 중국에서 유래한 나침반 덕분에 콜럼버스와 바스코 다 가마는 보다 넓은 곳으로 항해여행을 할 수 있었고, 신대륙의 발견과 낮선 나라와 민족에 대한 유럽인의 인식을 확장시켰다.

구텐베르크가 발명한 인쇄술은 활자화된 사상과 생각을 유럽 사회로 급속하게 전파시킬 수 있었다.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은 ‘지구 중심’의 세계관을 뒤엎는 사고의 혁명을 가져왔다. 그리고 회화에서는 알베르티가 ‘투시법’을 발견한다. 그리고 인문주의자들에 의한 고대 세계의 재발견은 ‘신’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인간’에 대한 재발견으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문화사적 격변’ 위에서 르네상스는 코페르니쿠스,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에라스무스 등 자연과학과 예술 그리고 인문 분야에서 수많은 천재들을 배출해 냈다. 르네상스의 천재들은 새롭게 ‘세계’를 발견하고 세계에 대한 방향설정을 새롭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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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피치 미술관
이렇게 문화사적 변혁과 격변의 시대라 할 수 있는 르네상스의 초기에 ‘인문주의’의 ‘정신’ 을 대변했던 인물이 페트라르카였다. 페트라르카에게 영향을 받아 이 인문주의 운동에 불을 일으켰던 또 하나의 인물은 데카메론을 쓴 보카치오였다.

페트라르키와 보카치오는 피렌체에서 함께 단테를 읽으며 인문주의 운동에 공감했다. 이 두 사람이 정초한 인문주의 정신 운동은 경직된 스콜라철학에 염증을 느끼던 인문주의자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에라스무스, 토마스 모어, 몽테뉴 등 유럽의 인문주의자들은 중세의 신학 사상이 경직된 논리에 지나치게 빠져 있다고 여겼다. 그들은 스콜라철학을 벗어나 ‘고대 그리스’ 정신을 통해 인간의 ‘재발견’과 ‘재탄생’을 요구했다. 오스만 투르크에 의해 동로마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어 이주해 온 학자들에 의해 그리스의 사상이 본격적으로 유럽에 소개된 것도 이러한 분위기에 일조했다.

페트라르카는 토스카나주 아레초 출생이다. 1302년 아버지 페트라코로는 피렌체의 서기였는데, 정치 투쟁에 휘말려 피렌초 이남의 아레초로 추방을 당한다. 그러니까 페트라르카는 유배지에서 얻은 아들이라 할 수 있다. 이후에 그의 가족은 1312년에 남프랑스의 프로방스 지방에 있는 아비뇽으로 이주한다. 그는 아버지의 권유로 몽펠리에와 이탈리아의 볼로냐에서 법률 공부를 했다. 그러나 그는 법률 보다는 고전 문헌에 더 관심이 많았던 것 같다. 그가 어렸을 적부터 고전 문헌에 얼마나 심취했는가를 보여주는 다음과 같은 일화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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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테
그는 아버지의 기대와 달리 법률 공부 보다는 몰래 고전 작품을 즐겨 읽곤 했다. 그러다 아버지가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화가 난 아버지는 그가 갖고 있는 고전 문학 작품들을 모두 불 속에 던져버렸는데, 아들이 그것을 보고 대성통곡을 하자 놀라서 불꽃 속에서 두 권의 책을 끄집어냈다. 한 책은 베르길리우스였고, 다른 한 책은 키케로의 수사학 저서였다.

아무튼 그는 공부를 마치고 아비뇽으로 돌아가 교황청에서 직업을 얻었다. 페트라르카는 아비뇽에서의 생활을 즐겼고, 교황청의 호화로운 생활에도 잘 적응했다. 그러던 와중에 그의 일생에 벼락과 같은 사건과 만나게 된다. 그것은 1327년 4월 6일에 아비뇽에 있는 생 클레어 교회에서 처음 라우라를 본 것이었다.

라우라를 만나다

라우라를 본 그는 벼락 맞은 사람처럼, 사랑에 감전되어 버렸다. 그렇게 만난 라우라를 그는 죽을 때까지 사랑했지만, 가까이 다가가지는 못했다. 라우라는 그때 이미 다른 사람의 부인이었다. 그러나 그는 단테가 그랬던 것처럼 라우라에 대한 사랑을 시로 승화하기 시작한다. 이후 40년에 가까운 세월에 걸쳐 그는 라우라에 대한 사랑을 시로 승화시켰다.

라우라와의 결정적인 만남 뒤에 그는 여러 곳을 여행해 고전에 대한 연구를 했다. 그는 수도원 도서관들을 조사하여 키케로 연설문 등 분실된 고전 필사본들을 찾아내기도 하였다. 그는 고전 필사본들만 찾아 낸 것이 아니라 문헌과 문헌들의 비교를 통해 문헌의 다른 점을 철저하게 기록해 이를 필사본 교정에 활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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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카치오
그는 교정에 대한 자신의 제안을 필사본 난외에 써놓았다. 이렇게 그가 기록한 필사본은 100년 후 마찬가지로 고전문헌학사에 중요한 족적을 남긴 로렌초 발라(1407~1457)에게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로렌초 발라는 실베스테르 교황에게 이탈리아의 세속권을 선물한‘콘스탄티누스 기증장’이 후대의 위작이라는 것을 언어 문헌학적, 역사적으로 증명한 사람이다.

그는 계속해서 문헌 수집과 조사를 위해 다니다 파리에서 친구이자 영적 상담자였던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 수사 산세폴크로의 디오니기를 만났다. 그는 그에게서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 사본을 받아 이 책을 영적 생활의 지침서로 삼았다. 그가 나중에 상상 속에서 아우구스티누스와 나눈 대화인 <나의 비밀> 이라는 쓴 책을 쓸 정도로 이 책은 그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

이 작품은 상상 속에서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주고받은 3편의 대화로 이루어진 자서전적 저술이다. 이 작품 속에서 그는 인간이 세속적 관심과 과오를 범하기는 하지만 자기 자신이나 자신의 일에 몰두할지라도 여전히 신에게 이르는 길은 발견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피력했다.

그는 1337년에 처음으로 로마를 방문했으며, 그 폐허 속에서 고대 로마의 위대함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아비뇽으로 돌아가서 그는 교황청의 부패한 생활과 거리를 두고 작품 집필과 학문에 몰두했다. 그는 제2차 포에니 전쟁을 주제로 한 서사시〈아프리카>를 썼고 로마 역사에 나오는 영웅들의 전기인〈위인전De viris illustribus〉을 썼다. 그가 고전 문헌학에 대한 학자와 시인으로서 명성이 높아지자 1340년 9월 파리대학과 로마 원로원은 그를 계관시인으로 동시에 추대했다. 그는 추기경 콜론나의 조언을 받아 들여 로마를 선택했으며, 1341년 4월 8일 카피톨리누스 언덕 위에서 월계관을 받고 계관시인이 되었다.

계관시인이 된 후 그는 1347년 로마에서 일어난 콜라 디 리엔치(Cola di Rienzi)의 반귀족정치의 혁명을 지지하였으나 그 혁명은 좌절하고 말았다. 이듬해 파르마 체재 중 그는 친구 소크라테에게서 라우라가 흑사병으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러나 라우라에 대한 그의 사랑은 변하지 않았다. 그는 죽을 때까지 라우라에 대한 서정시를 담은 <칸초니에레>를 정리했다.

그가 1350년 로마로 가던 길에 잠시 피렌체에 들렀을 때, 그를 존경하던 보카치오가 마중 나와 그를 초대했다. 이후 두 사람은 서로의 사상에 공감을 하며, 인문주의 운동에 불을 놓기 시작했다. 보카치오는 페트라르카에게서 고전어와 고전문헌을 배웠고, 페트라르카는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의 마지막 이야기를 이탈리아어로 번역하기 했다. 이 번역본이 원본보다 더 탁월했다는 평을 받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페트라르카는 1374년 봄 <칸초니에레>를 마지막으로 정리하고, 그해 7월 19일에 자택에서 숨을 거두었다. 페트라르카가 학문의 역사에 기여한 것은 그리스, 로마 고전 필사본을 발굴하고, 그것에 대한 주석과 번역 작업을 통해서 고전 텍스트를 편집해 냈을 뿐만 아니라 고전 텍스트 속에 담긴 인간에 대한 가치와 덕목을 발굴해 냈다는 것이다.

그는 <칸초니에레>에서 라우라를 그리워하며 노래했지만, 단테처럼 동경하는 여인을 ‘천사’로 만들어 놓고 천상의 여인을 동경하지 않았다. 그는 지상의 여인 라우라를 사랑했다. 그러나 그는 지상의 인간을 사랑하고 집착한다는 것과 하늘에 계신 신에 대한 사랑 사이에 번민했다.

사랑의 번민

“나는 나의 순간들을/한없이 고통스러워하네/날개를 가지고 있음에도, 간과할 수 없는 일을 해낼 수 있을 만큼 하늘로 날지 않은 채/인간을 사랑함에 모두 써 버린 그 순간들을.”

그러나 그는 인간을 사랑함에 모든 써버린 그 순간들을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중세 사람들처럼 그것을 죄악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는 라우라에 대한 사랑을 통해 그리고 그 사랑에 대한 노래를 통해 그 시대에 이런 질문을 던지지 않았을까.

“인간이 인간을 사랑하는 것도 신에게 죄가 됩니까?”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 \'구스타프 슈바브 그리스로마신화\' 역자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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