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배자는 여우와 사자가 돼야 한다

철학여행까페[33]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l승인2008.05.19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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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희
산타크로체 성당
“독자 여러분, 이것을 다 읽고 나선 지금, 여러분에게도 이 사나이는 ‘나의 친구’가 되었습니까?”

로마사 이야기로 유명한 시오노 나나미는 <나의 친구 마키아벨리>에서 책의 마지막 구절을 이렇게 독자들에게 묻는 질문으로 마무리했다.

그러나 시오노 나나미가 친구로 삼길 권했던 마키아벨리를 ‘친구’로 삼는다는 것은 잘못하면 꽤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정치에서 마키아벨리즘이라고 하면, 아직도 칭찬이라기보다는 욕에 가깝기 때문이다.

두 얼굴의 마키아벨리

마키아벨리즘이라는 말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온갖 추악한 행위를 정당화하는 사악한 정치적 입장을 뜻한다. 실제로는 철권통치를 했던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는 <안티마키아벨리>라는 책을 써서 자신의 통치가 마키아벨리즘과는 전혀 다른 인도주의적이며 계몽주의적 통치라는 것을 강조한 적도 있다.

커다란 오해를 무릎 쓰고라도, 우리는 시오노 나나미가 권하는 대로 마키아벨리를 ‘나의 친구’로 삼을 수 있을까? 마키아벨리를 친구로 삼거나 비열한 권모술수의 원조로 물리치기 전에 먼저 마키아벨리를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마키아벨리란 어떤 인물이었는가? 마키아벨리는 1469년에 피렌체에서 태어났다.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13세기 이래 다수의 고위행정관들을 배출해낸 피렌체의 명망가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그가 태어 날 당시 집안은 어려웠다. 그의 아버지 베르나르도 마키아벨리는 변호사였지만, 파산으로 일체의 공직에서 물러난 뒤 근교의 소규모 부동산 수입에 의존하며 극히 제한된 소송사건만을 맡아 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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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렌초 메디치
그러나 아버지 베르나르도는 자신이 알고 지내던 대학의 인문주의 학자들과의 관계를 활용해 자신의 아들이 훌륭한 인문주의적 교육을 받도록 배려했다. 그는 이들에게서 라틴어와 고대철학에 관한 지식, 문학 그리고 역사를 배웠다.

마키아벨리는 교육을 받은 후 1498년에 29세의 젊은 나이에 피렌체 공화국의 제2서기국의 서기관 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29세라는 젊은 나이이기는 했지만, 그때 그는 이미 피렌체의 정치적 혼란을 충분히 경험한 나이였다.

그가 이 서기관 자리에 오른 해는 극단적인 정치개혁을 추진했던 도미니쿠스회 수사 사보나롤라가 처형된 해였다. 역사에서 괴승이라고 불리지만, 사보나롤라는 피렌체를 지배했던 메디치 가문의 전제 군주들과 부패한 성직자들에 맞서 싸웠다.

1492년 메디치 가문의 로렌초 데 메디치가 사망하고 1494년 프랑스 왕 샤를 8세에 의해 메디치가(家)가 몰락한 뒤 그는 피렌체의 유일한 지도자가 되어 민주공화정을 세웠다. 그는 청교도적인 정치적 근본주의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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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 10세(죠반니 추기경)
그는 민주적인 제도를 도입하지만 지나치게 엄격하며 종교적이고 도덕 지향적인 제도를 도입하였다. 그가 도입한 제도 속에는 쾌락이나 감각적 즐거움 같은 것을 위한 자리는 찾을 수 없다.

쾌락적이거나 세속적 즐거움을 찬미하는 듯한 그림과 책은 불태워 졌다. 1498년 그는 ‘불의 시련’ 사건을 계기로 급속하게 몰락하여 이단자로 처형당하였다.

그가 처형되고 닷새가 지난 후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새로운 공화국의 서기관의 자리에 앉았다. 마키아벨리는 피렌체 공화국 대사의 업무까지 맡아 1512년까지 프랑스, 로마교황청 등을 방문하는 등 공화국의 수많은 외교 업무를 위임받아 행하였다. 이러한 그의 외교 활동은 정치가들과 권력자들을 직접 관찰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그러나 1512년에 스페인의 공격으로 피렌체 공화정이 무너지고 최고행정관 소데리니가 축출되었다. 다시금 메디치가의 군주정이 복원되자 마키아벨리는 공직에서 추방되었고, 베키오 팔라초에의 출입도 금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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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아벨리
군주론으로 고대·중세와 결별


설상가상으로 1513년 초 그는 메디치 정부에 대한 반역음모를 공모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고문을 받고 투옥되었다. 그는 모진 고문을 받으며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으나 결국 공모자들의 명부에서 자신의 이름을 빼지는 못했다.

그러나 운 좋게도 그는 그 해에 석방되어 풀려났다. 메디치가의 죠반니 추기경이 교황 레오 10세로 즉위하면서 특별 사면령이 내려진 것이었다. 그는 피렌체에서 15km 떨어진 작은 영지인 상트 안드레아로 추방되었다. 모든 정치적 행위는 금지되었다.

그러나 추방된 마키아벨리는 메디치 정부의 공직에 참여하려고 여러가지 계획을 짰다. 그 일환으로 그는 <군주론>을 집필했지만,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다. 낙심한 그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교외의 사유지에 은둔해 메디치가에 반대하는 공화주의적인 지식인들과 어울리며 자신의 공화주의적 생각을 담은 <전술론>과 <로마사론>의 집필을 하게 된다.

그리고 이 무렵에 그는 인간의 어리석음과 성직자들의 사악함과 타락을 주제로 한 희극작품 ‘만드라골라 La Mandragola’를 쓴다. 만드라골라는 몇 년 전에 한국에서도 공연이 되었는데, 다시 공연이 된다면 이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 꼭 한번 가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 공연을 통해서 인간의 위선과 어리석음 그리고 속임수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유쾌한 마키아벨리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1520년에 드디어 메디치 궁정의 부름을 받는다. 처음에는 공화국의 사료편찬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다 그는 교황 클레멘스 7세가 되는 줄리오 추기경의 눈에 들어 피렌체 사를 집필하는 커다란 임무를 맡게 된다. 점차 신임을 얻은 마키아벨리는 1526년 4월 요새방비를 목적으로 뒤늦게 설립된 '5인 위원회'의 위원장이 되었다.

클레멘스 7세는 신성 로마 제국의 카를 5세에 대항하기 위해 '코냐크 동맹'을 결성했고 마키아벨리는 군대를 이끌고 교황의 보좌관 프란체스코 구이차르디니와 합류했다. 그러나 1527년 5월 카를 5세의 스페인군이 로마를 점령하고, 교황의 도주와 민심의 이탈로 피렌체에는 메디치가가 쫓겨나고 새롭게 공화정이 복원되었다.

공화주의자인 마키아벨리도 공화정의 복원과 더불어 예전의 관직을 되찾을 희망을 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새로운 공화주의자들은 그를 메디치가의 늙은 가신에 불과한 인물로 여겼다. 그는 생애의 말년에 가장 큰 좌절을 맛보아야 했다. 실의와 낙담 탓인지 그는 끝내 병을 얻어 새롭게 공화정이 복귀된 지 1개월이 채 지나기도 전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마키아벨리는 전형적인 르네상스의 자식이었다. 르네상스는 모든 영역에서 새로운 전망들이 열리던 시대였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이라는 책을 써서 정치의 영역에서 고대와 중세와의 결별했다. 그는 정치에서 날카롭게 정치와 도덕의 연결 고리를 끊어냈다. 그는 정치를 도덕과 연결시키지 않은 채 그 자체로 적나라하게 관찰했다.

통일군주에 대한 열망

그가 <군주론>을 통해서 군주들에게 강조한 것은 현실주의였다. 군주는 냉혹한 현실을 직시하고 냉정하게 판단해야지, 공허한 이상에 치우치면 자기의 파멸을 초래할 뿐이다. 인간을 다스리려면 군주는 인간을 알아야 한다. 마키아벨리가 볼 때 인간은 전혀 도덕적이지 않으며, 늑대와 같이 공격적이며 뱀과 같이 갈라진 혀로 말을 한다. 그러므로 마키아벨리는 군주는 사자나 여우처럼 행동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뱀을 알기 위해서 여우가 되어야만 하고 늑대에게 겁을 주기위해 사자가 되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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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아벨리 무덤
그는 이런 점에서 체자르 보르지아를 이상적인 군주로 여겼다. 그렇지만 체자르 보르지아도 완전한 군주가 되기 위해서는 가져야 할 능력이 있었다. 그것은 행운을 추구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조종할 수도 있어야 하는 능력이었다. 이상적 지배자는 행운을 지배할 수 있는 ‘덕’(virtu)을 발전시킴으로서 자신의 탁월함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을 통해 강력하면서도 영악한 군주를 옹호했던 것은 분열과 외세의 침략에 시달리는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해 줄 군주에 대한 기대 때문이었다. 그러나 마키아벨리의 기대와는 달리 그런 군주는 등장하지 못했다.

마키아벨리는 이탈리아 반도의 통일이라는 열망을 안은 채 산타 크로체 성당에 묻혔다. 어떤 일화에 의하면, 마키아벨리는 자신의 임종 시에 악마와 그 자신이 쓴 모든 작품들을 저주하라는 종용을 받고 다음과 같이 대답을 했다고 한다.

“지금은 스스로를 적으로 만들 수 있는 때가 아니요.”

죽을 때까지 냉철한 현실 정치 이론가서의 그의 면모를 알려주는 일화이겠지만,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그의 이상과 기대가 얼마나 왜곡되었는지도 보여주는 일화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사악하고 추악한 군주’의 옹호자로부터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냉철한 정치철학자로서 마키아벨리를 새롭게 보아야 하지 않을까.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 \'구스타프 슈바브 그리스로마신화\' 역자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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