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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효선 |
| 5월17일 저녁, 28년 전 군부에 맞선 민주항쟁의 광장 옛 전남도청 앞 광장에는 '5.18 민주항쟁 28돌 전야제'가 열렸다. 이날 이 곳 민주광장에 모인 시민 2만여명은 28년 전 그날을 다시 가슴에 새겼다. |
#5월17일, 망월동 그리고 금남로
빛고을 광주 망월동 초입에 들어서자 빗방울이 돋았다.종일 우울한 빛깔로 잔뜩 찌푸려 있던 광주의 하늘이 기어코 빗방울을 뿌렸다.
연록을 넘어 초록을 더해가는 담양의 명물, 메타스퀘이어 가로수길이 끝나고 ‘국립 5.18민주묘지’와 ‘망월동 민주열사 묘역’으로 들어서자 한 차선을 가득 물고 경찰차가 늘어서 있다. 망월동으로 오르는 고갯길은 사복경찰이 빼곡 장악했다. 우중충한 날씨 마냥 망월동으로 오르는 길은 삼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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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망월동 국립 5.18민주묘역으로 오르는 길엔 만장과 경찰차와 그리고 적막만이 가득하다. |
빗방울을 흩뿌리며 한줄기 바람이 몰아쳤다. ‘5.18민중항쟁 28돌 기념행사위원회'(위원장 지선)가 마련한 ‘추모 만장’이 사복경찰 머리 위로 솟구치며 휘날렸다. 얼핏 먹 글씨로 ‘학살...’이라고 쓴 만장이 눈에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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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무리의 젊은이들이 묘소 앞에서 주먹을 흔들며 오월가를 부른다. 박관현 열사의 묘 앞이다. 대학 새내기쯤으로 보이는 앳된 얼굴이 숙연함과 함께 사뭇 긴장되어 있다. 선배쯤으로 보이는 한 여학생이 ‘80년 오월과 박관현 열사’에 대해 진지한 표정으로 설명을 한다. 학생들 사이로 ‘의혈 중앙’이라는 깃발이 펄럭인다.
“혁명정신 계승하여 신자유주의 박살내자” 학생들이 주먹을 흔들며 구호를 외쳤다. 수 년 간 잘 접하기 어려웠던 구호여서 잠시 어리둥절했으나, 퍼뜩 이곳이 광주임을 새삼 일깨워준다.
그러고 보니 ‘5.18 순례단’으로 보이는 젊은이들의 무리는 족히 스물을 넘어 보인다. 이들은 ‘29년 전 좌익과 빨갱이라는 이름으로 군사정권의 총칼에 의해 학살된 폭도’에서 ‘ 1995년 광주와 이 땅의 민주주의를 위해 군부학살정권에 맞서 싸우다 희생당한 민주열사’ 로 부활한 영령들의 묘소 앞에서 고개 숙였다. 묘역 앞을 하얗게 달군 찔레꽃향이 한웅큼 이들 머리 위로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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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8 민주열사 참배를 위해 경북 의성에서 온 공부방 어린이들이 5.18묘역 추념문 안으로 들어서고 있다. |
#5월17일 저녁, 옛 전남도청 앞 광장
28년 전 5.18 민주항쟁 당시, ‘7일간 민주 해방구의 심장’이었던 옛 전남도청 건물 정면에 ‘다시 서는 금남로’라는 대형 현수막이 펼쳐졌다.
‘5.18 민주광장’으로 불리는 금남로엔 차량의 물결 대신 사람의 물결이 넘친다. 5.18 광주민중항쟁이 숨가쁘게 진행되던 29년 뒤 5월17일 저녁, 도청 앞 광장과 금남로에는 2만여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주로 10대 학생들과 초등생을 데리고 나온 30~40대 중년들이었다. 60대 이상의 노인분들과 함께 ‘5.18 순례단’으로 전국에서 모여든 대학생 동아리팀도 눈에 부쩍 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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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년 전 광주 전역을 달구던 ‘오월가’와 ‘광주출정가’가 울려 퍼졌다. 한 무리의 노래패가 무대를 달궜다. 그러나 광장의 분위기는 예전과 달리 가라앉은 분위기다. 노래패의 율동이 끝나자 준비위 측의 사회자가 마이크를 잡고 광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을 향해 연호를 제창했다.
“일부 신문과 방송에서 5.18 기념행사를 앞두고 찬물을 끼얹고 있습니다. 5.18기념행사가 물리적 충돌이 우려된다고 대서특필했습니다. 이곳은 한국 현대사의 민주주의를 완성한 민주광장입니다. 28년 전 광주시민들의 고결한 희생이 오늘 촛불로 다시 살아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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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 위로 칠순의 할머니 세 분이 올라왔다.광주항쟁 당시 계엄군들로부터 구타를 당해 지금까지도 허리와 다리를 온전하게 쓸 수 없다는 최정안(73) 할머니는 “30년이 지나도록 그 때의 잔인함을 잊을 수 없다”고 말했다.
다시 무대 위로 ‘4.19의거 김주열 열사 추모 대장정단’이 횃불을 들고 올라왔다. 마산에서 광주까지 186Km를 걸어서 왔다고 했다. 모두 칠순의 노인들이다. 186Km를 함께 달려 온 횃불이 5.18민중항쟁 기념행사위원회 측에 전해졌다. 48년 전 4.19혁명의 횃불이 2008년 5월17일, 광주민중항쟁의 광장으로 이어진 셈이다.
“명박이 뽑으면 대박 터지는 줄 알았다. 그런데 온 국민이 쪽박 차게 됐다.”며 이명박 정부를 꼬집었다. 광장에 모인 2만 여개의 촛불이 일제히 환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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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자가 자유발언시간을 선언하자 기다렸다는 듯 남학생 한명이 무대 위로 올랐다. 광주에서 고등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라고 자기소개를 한 남학생은 대뜸 “대학생 형님, 누나들 부끄러운 줄 알라”고 일갈했다. “우리가 왜 5.18 전야제에서 광우병을 외치는 줄 아는가”고 반문한 뒤 “역사를 배우기 위해서이고 또 이를 실천하기 위해서이다”고 목청을 높였다. “지난 번 대통령 선거 때 대학생들 투표율이 20%도 안됐다고 한다. 그래놓고 우리 동생들을 광우병 위기로 내몰고... 대학생 형님, 누나들 부끄러워라”고 소리쳤다. 광장에서 ‘와’하고 함성이 터졌다.
무대 위로 앳된 여고생이 올라왔다. 모범생이라고 수줍은 표정으로 말문을 연 여고생은 “5.18 전야제에 참석했는데, 이미 우리들 손에는 촛불이 들려있다. 우리들 손에 들린 촛불은 미래를 밝히는 우리들의 요구”라고 말했다. 여학생은 “우리가 생체실험 대상이냐”며 반문하고 “이명박 대통령님 이 나라를 살려주세요”라며 기어코 눈물을 터트렸다. 시민들은 “울지마”를 연호했다. 또 다시 광장은 함성으로 뒤 덮였다.
이들이 내지르는 함성은 단순한 구호가 아니라 역사를 잇는 물줄기로 흐르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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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40대 중년 아주머니가 무대로 나섰다.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다니는 두 아이를 키우고 있다고 했다. “우리 엄마들 너무 힘들다”고 말문을 뗀 뒤 “우리 아이들이 꿈을 잃어 버렸다. 아이들에게 꿈을 키워주는 것은 우리 어른들의 몫이다. 오죽하면 우리 아이들이 ‘밥 좀 먹자, 잠 좀 자자’고 하겠는가? 4.15 교육자율화 누굴 위한 것인가? 가진 사람이나 못 가진사람이나 모두 함께 잘 사는 나라 만드는데 우리 아줌마들의 힘을 보태겠다”고 목청을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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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여덟 돌을 맞는 광주민주항쟁 기념 전야제는 ‘쇠고기 파동’을 이어 ‘공교육 문제’로 파도를 타듯,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역사가 역사를 만든다’는 순리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현장이었다.
“오월 혁명정신 계승하여 신자유주의 박살내자.” 시민들 사이에서 구호가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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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들은 어깨를 걸고 긴 띠를 이뤘다. 광장은 역사의 희망을 소망하는 촛불이 일렁거리는 거대한 은하수였다. 광장과 맞댄 금남로는 메구소리와 풍물소리로 메꿔졌다. 시민들은 광장을 걸어나와 금남로에서 어깨를 걸고 신명으로 지핀 희망의 불을 밝혔다.
스무 여덟 돌, 광주의 이름은 ‘5월의 희망으로 세상을 보라’였다.
#5월18일, 다시 망월동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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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8돌을 맞는 5월18일, 광주 망월동 민주열사 묘역에는 전국에서 참배에 나선 시민들의 발길이 늦도록 이어졌다. |
5월18일 오전 10시, ‘5.18 민주화운동 28주년 기념식’이 거행되는 광주 5.18민주묘역 주변은 삼엄했다. 묘소 참배는 물론 기념식 참석은 미리 허가를 받은 사람과 단체에게만 출입이 허용됐다. 민주묘역으로 들어가는 길목과 광주 망월동 민주열사 묘역 주변은 적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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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역 주변의 언덕과 길숲에는 찔레꽃만 하얗게 달아있었다. 5.18민중항쟁 기념행사위원회 측이 꾸민 만장만이 펄럭거렸다. 기념회 측이 만든 만장전은 ‘광주 사발통문 날리다’였다. 그러나 사발통문을 전해 듣고 이곳을 찾은 많은 사람들은 정작 묘역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한 채 삼엄한 봉쇄에 갇혀 있었다.
기념식이 끝난 10시 40분 경, 민주묘역으로 들어서는 ‘추념문’ 앞에서 한 무리의 대학생들이 구호를 외치며 성토를 하고 있다. 출입을 봉쇄한데 따른 항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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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8 민주묘역 참배에 나선 대학생들이 기념식이 열리는 동안 출입을 봉쇄당하자 이를 항의하며 구호를 외치는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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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8 기념식이 거행된 오전 10시경, 민주묘역 참배에 나선 한 여학생이 출입을 봉쇄당하자 이의 부당함을 알리며 눈물을 흘리는 모습 |
“5.18 민주항쟁의 주범인 5공세력에 뿌리를 둔 한나라당이 진정한 속죄도 없이 민주묘역을 출입하는데 왜 시민들의 출입을 원천 봉쇄합니까? 민주열사들의 정신을 훼손하는 일입니다. 진정한 속죄도 없이 그들이 어떻게 열사추모에 참석합니까?” 김형택(인하대, 4년) 군이 분노의 표정으로 울먹거렸다.
학생들이 추념문 앞에서 출입 원천 봉쇄를 항의하며 구호를 외치자 중년 시민이 이들을 제지했다. 중년시민은 “학생들 심정은 충분히 이해한다. 그러나 오늘은 추념일이다. 추념일에 구호는 삼가 달라”고 학생들의 울분을 달랬다. 이들 곁으로 기념식을 마친 한나라당 소속 국회의원들이 지나갔다. 얼핏 민주화 시대 모 대학 총학생회장 출신 한나라당 국회의원이 이들의 주장에 곤혹스런 듯 손으로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잠시 걸음을 멈췄다가 이내 지나쳤다.
기념식이 끝나자 참배객이 밀물처럼 몰려들었다. 묘역에는 유가족들이 기념식을 마친 뒤 자식의 묘소를 찾아 넋을 놓고 앉아 있었다.
광주 ‘민주열사참배단’이라는 깃발을 앞세운 전국에서 몰려든 대학생들이 무리를 지어 묘소 앞에서 추모의례를 가진 뒤 ‘오월가’와 ‘님을 위한 행진곡’을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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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민주묘역 동쪽 언덕, 망월동 민주열사 묘역으로 오르는 길은 만장과 찔레꽃으로 덮혀 있다.군부정권에 의해 학살된 시민들이 생명과 영혼마저 앗긴 채 마구잡이로 버려져 매몰되어 있던 고갯길을 ‘살아있는 자’들은 아이들의 손을 꼭 잡고 고개를 떨군 채 오르고 있다. 지팡이에 몸을 맡긴 백발의 할머니 한 분이 한 손에 흰 국화송이를 꼭 쥔 채 고갯길을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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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역 앞으로 낯익은 이름들이 액자에 갇혀 걸려 있다. 시민들은 이들 앞에서 이들을 호명하듯 걸음을 멈췄다. 이한열, 박종철, 이내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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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사들의 묘소는 선홍빛 참꽃 문양을 새긴 흰 천에 덮여 있다. 사람들은 ‘살아있는 자의 부끄럼’으로 ‘죽어서 영원히 살아 있는 희망’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 사람들이 고개를 떨구고 흘리는 참회와 다짐의 눈물 속으로 모 여성단체 인사의 결의가 찔레꽃향처럼 번졌다. “우리의 딸들이 반드시 싸워서 이기겠습니다.”
남효선 기자
남효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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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마귀가 날자 배 떨어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