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주(酒)자의 언어학

‘존경’과 ‘짐작’의 속뜻에 술이 숨었다 강상헌 기자l승인2019.11.18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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酉(유) 글자 내밀면 문자 속 밝은이들도 십중팔구는 ‘닭 유’라는 답 내놓는다. ‘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 외우며 십이지(十二支)의 열 번째란다. 옳다. 그런데 모자란다. 글자가 그림이라는데 닭 모양은 어디 숨었지? 새(鳥 조) 모양이 들어있는 계(鷄)자는 또 뭔데?

酉는 원래 술 담는 그릇, 술병이다. 물 수(氵, 水)자 합쳐 술 주(酒)가 된다. 3천5백년쯤 전 황하(黃河) 유역, 동이(東夷)겨레도 다른 족속들과 함께 살며 지었던 황하문명에 끼친 자취 또렷하다. 갑골(甲骨)문자다. 모래나 진흙바닥에 박아 쓰도록 만든 그릇 그림의 디자인, 기호다.

▲ 연꽃 위에 닭이 내려않은 화려한 뚜껑의 고려청자 주전자(해외소장 한국문화재도록 사진)

나중에 점치는 절차가 업그레이드되면서 酉가 점술(占術) 분야 등에 가차(假借)돼 닭의 ‘간판’ 중 하나가 됐다. 허나 십이지 말고 이 글자가 닭의 대명사로 쓰이는 경우는 많지 않다. 가차는 발음이 같은 글자를 다른 뜻의 글자로 빌려 쓴다는 뜻의 문자학 용어.

酉의 ‘술병’의 뜻은 다양한 변신으로 동아시아 문명에 중요한 뜻이 됐다. 고졸(古拙)한 모양새이긴 해도, 갑골문과 그 다음 시기 한자인 금문(金文)에 이미 ‘인류의 귀한 재산’인 술을 담는 그릇의 기호로서의 디자인이 완벽하다. ‘술의 뜻’을 담을 채비가 됐다는 얘기다.

두목 즉 우두머리만이 술을 나눌 수 있다. 술은 신(神)의 몫이니 그걸 거부하면 추방이나 죽음이었겠지. 서양 그리스 신화에서도 술인 넥타르는 음식 암브로시아와 함께 신의 차지였다.

숫자 팔(八)은 원래 나눈다(分 분)는 뜻이다. 그래서 추장은 술병(酉)의 술을 나누는(酋 추), 무리의 우두머리다. (추장 몫의) 제일 좋은 술이란 뜻으로도 쓰였다.

추(酋)를 한 손으로 섬기면, 즉 손 기호(寸 촌) 하나를 더하면 높을 존(尊)이다. 손으로 술잔 높이 들어 제사 지내는, 현대에는 존경(尊敬)의 뜻이다. 두 손으로(廾 공) 섬기면 제사지낼 전(奠)이다. 奠 아래 大자 모양은 廾의 변형이다.

유교국가 시절, 문묘(文廟)에서 한 해 두 차례 공자에게 지내는 제사가 석전제(釋奠祭)다. 요즘도 문화재의 하나로 계승되고, 종묘 등에서 연희된다. 처음부터 끝까지 장중하다.

八을 술병 위로 향기 퍼져 오르는 그림으로 보아 酋를 ‘오래 묵은 좋은 술’의 뜻으로 읽기도 한다. 술병에서 비롯한 술과 그 향기는 이토록 신령스런 분위기를 빚는다. 함부로 퍼마실 게 아닐세. 문자의 속뜻이 알려주는 진지한 경건함은 시간 또는 역사 속의 ‘우리’를 짐작케 한다.

그런가하면, 논리(학) 부문에서도 이 술병은 중요한 개념의 실마리(단서 힌트)다. 짐작이라는 단어 얘기다. 우리의 지식의 방법 중 제일 일반적인 것 하나가 짐작 아닌가, 어림짐작이라고도 한다. 대강 헤아려보는, 추론(推論)의 행위다.

이 짐작(斟酌)은, 술 따를 斟과 술 따를 酌 글자의 합체다. ‘술 따르는 (직업) 여성’을 작부(酌婦) 즉 접대부라 한다. 추론 행위의 짐작(estimate 헤아림)과 접대부의 짐작(술 따르기)은 어떤 관계인가? 같은가? 어쩌다 이런 ‘사태’는 빚어졌을까.

도자기나 색유리 같은 투명하지 않은 술병에 담긴 술은, ‘짐작’을 잘 해서 조심스럽게 따라야 한다. 갑골문 시대, 술병은 토기나 도기 같은 질그릇이었으리.

술병 안에 술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 밖에서는 볼 수 없으니, 손에 전해지는 무게로 느껴야 한다. 또 얼마나 더 따라야 저 술잔을 넘치지 않게, 법도에 맞게 할 수 있을지도 중요하다. 그 조심스런 헤아림을 짐작이라 한 것이니 참 유서 깊은 말이다.

결국 같은 것일세. 술 따르는 것이 ‘어림잡아 헤아리는 것’ 그 짐작이 된 까닭이다. 문자의 역사성은 이렇게 생활 속 인문학 주제가 되기도 한다.

▲ 술병을 그린 닭 유(酉)자의 옛 글자들(하영삼 著 ‘한자어원사전’ 사진)

토/막/새/김

한자에서 그림을 읽어야 하는 이유

일(현상 事)과 물건(物)이 문명의 새벽을 살던 옛 사람들 마음의 눈에 비친 모양, 그 그림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 기호 되고 글자가 된다. 사물(事物)의 심상(心象), 상형문자의 개요다.

이런 첫 글자들, 토(土) 인(人 亻) 심(心 忄) 력(力) 상(上) 수(手 扌) 화(火 灬) 등의 대표적인 글자들은 레고나 직소퍼즐과도 같은 두뇌게임에서처럼 서로 붙이고 떼고 뒤집고 바꾸고 하는 오랜 과정을 거쳐 오늘날 쓰이는 모양과 뜻이 됐다. 이 ‘문자의 왕국’은 지금도 확장 중이다.

그림이 뜻을 짊어지는 이 한자와 같은 글자(표의문자)는 그 그림과 뜻의 어울림이 마치 소월의 시(詩)나 삽상(颯爽)한 산수화를 대하는 느낌을 준다. 한자에서 그림을 읽어야 하는 이유다.

斟酌이 ‘짐작’이 되는 뜻도 그렇지만, 그림풀이는 해학적(諧謔的) 익살도 풍긴다. 酌은 술통(酉)에 국자(勺 작)를 넣어 향기로운 술을 퍼내는 그림이다. 斟 글자도 거의 비슷한 그림의 형상화(기호화)다. 글자에 희로애락(喜怒哀樂)이 담겼으니 바로 철학이기도 할 터다.

酉에서 비롯한 글자들을 톺아보자. 먼저 ‘유’로 읽는 猶 猷 楢 庮 偤 輶 槱 蒏 庮 蕕 蝤 등이다. 다음은 추장 酋와 연결된 ‘추’ 발음 글자들, 崷 揂 煪 緧 鰌 趥 蝤 등이다.

조금 틈 내면, 인터넷사전으로 금방 뜻 확인할 수 있다. 한자의 바탕을 짐작할 수 있으며, 재미도 은근하다.

강상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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