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카르트는 살해됐는가

철학여행까페[36]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l승인2008.06.16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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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인류 박물관에는 데카르트의 것으로 추정되는 두개골이 보관되어 있다. 이 두개골의 이마 부분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다.

“데카르트의 해골. 1666년 프랑스로 유골 이장을 하게 된 차에 이스라엘 한스트룀이 이양 받아 소중히 보관함. 계속 스웨덴에 숨겼음.”

이동희
데카르트의 두개골
데카르트의 무덤에 두개골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그가 죽고 난 뒤 140년도 더 지난 후였다. 1791년 프랑스 혁명 정부는 오래 전에 죽은 데카르트를 기억해 내고 그를 기념하기 시작했다. 데카르트의 증조카는 이런 분위기를 이용해 할아버지의 유해를 위대한 프랑스인들의 영예로운 사원인 판테옹으로 이장하자는 제안을 했다. 데카르트의 증조카는 이장을 위해 관을 다시 파내어 보고 머리가 없는 것을 발견하였다. 머리가 없는 상태로 데카르트의 유해를 판테옹으로 이장하려는 시도는 어떤 의원의 음모로 무산되었고, 결국 데카르트는 상 제르망 데 프레 교회에 묻히게 되었다.

머리없는 유해

왜 데카르트의 유해에는 머리가 없고, 그의 두개골은 현재 파리 인류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것일까? 지금까지 알려진 데카르트의 공식 사망 원인은 폐렴이다. 1649년 데카르트는 스웨덴 주재 프랑스 대사 엑토르 피에르 샤뉘의 주선으로 스웨덴 여왕 크리스티나의 궁정에 초대받았다.

크리스티나 여왕은 처음에는 데카르트에 관심을 보이지 않다가 1650년에 들어서서 국사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일주일에 세 번 새벽 5시에 철학을 가르쳐 줄 것을 그에게 요청했다. 여왕은 마차를 보내 데카르트를 모셔왔다. 그러나 데카르트는 얼마 후에 북구의 추운 겨울을 이겨내지 못하고 갑자기 감기에 걸리고 말았다. 감기는 폐렴으로 악화되어 데카르트는 1650년 2월 11일 스톡홀름에서 숨을 거두었다.

데카르트의 시신은 프랑스로도 그가 오래 거주했던 네덜란드로도 이송되지 못한 채, 아돌프 프리드릭 교회에 묻혔다. 그렇다면 데카르트의 유해 중에서 두개골만 어떻게 파리 인류 박물관이 소장하게 된 것일까? 데카르트가 죽은 지 16년이 지난 1666년에 프랑스는 위대한 자국의 철학자를 기리기 위해 그의 유해를 프랑스로 이장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프랑스 대사 드 테를롱의 입회하에 스톡홀름시 근위대장 한스트룀이 발굴 작업을 지휘해 그의 유골을 구리 관에 이관하였다. 데카르트의 관은 열광적인 영국인들이 데카르트의 유골을 훔치려 한다는 정보원의 보고에 따라 3개월이 지난 후에 몰래 파리로 옮겨지게 된다.

아마 이때 두개골은 남겨지고 다른 유골은 옮겨진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앞서 언급했던 두개골에 ‘계속 스웨덴에 숨겼음’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개골을 빼돌린 것은 근위대장 한스트룀으로 여겨진다. 1878년 스웨덴의 학자 베르셀리우스는 어떤 수집가의 유품인 ‘데카르트의 해골’이 경매에 붙여졌다는 소식을 듣고 그것을 사들였다.

이동희
아리스토텔레스의 책을 밟고 있는 데카르트
사인은 폐렴이었지만


그는 그 유골을 세밀하게 조사해 이마에 새겨진 글씨를 발견하였다. 그는 그의 조국이 위대한 철학자에게 저지른 모독행위를 보상하는 의미에서 데카르트의 해골을 파리 인류박물관에 기증하였고, 그렇게 해서 데카르트의 두개골은 이 박물관에 소장되었다.

근위대장 한스트룀은 왜 두개골을 빼돌려 스웨덴에 숨겨 놓고 있던 것일까? 그는 왜 데카르트의 두개골을 파리로 보내지 않은 것일까? 이러한 의문에 대한 가장 강력한 대답은 데카르트가 독살되었다는 설이다. ‘폐렴’으로 숨졌다는 궁정의 공식성명에도 불구하고, 당시 스톡홀름시에는 독살되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고 한다. 또한 이러한 소문을 뒷받침하는 것은 당시 여왕의 주치의이자 명의였던 요한 반 불렌이 자신의 동료의사에게 보낸 편지에서 묘사한 병의 진행과정이었다.

그 편지에 의하면, 데카르트는 딸꾹질을 하고, 밤색을 띤 가래를 토해내고, 호흡을 불규칙하게 눈동자를 이리 저리 움직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증세는 폐렴보다는 비소중독으로 의심된다.

폐렴으로 죽었던, 비소 중독에 의해 죽었던 간에 데카르트의 죽음은 많은 의문을 남긴다. 데카르트가 죽고 나서 샤뉘 프랑스 대사가 손수 작성한 묘비문에서도 그러한 의문점이 발견된다.

“그는 철학을 그 기초에서부터 혁신하였으며, 언젠가는 죽을 밖에 없는 인간들에게 자연의 가장 깊은 내면에로 이르는 길, 새롭고 분명하고도 안전한 길을 제시하였다… 그는 그를 시기하는 자들을 그의 죄 없는 생명으로 속죄하였다.”

누가 그를 시기했고, 왜 데카르트는 그들을 위해 죄 없는 생명으로 속죄해야만 했을까? 혹 데카르트는 자신의 철학을 위해 순교를 당한 것은 아닐까? 사실 데카르트는 자신의 철학을 통해 기존의 학계에 대해 전면전을 선포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학문적 기초를 여지없이 허물어 버린 사람이었다. 그는 전통적 학문의 방법과 진리에 대해 회의를 하고, 인간의 이성에 기초한 새로운 학문 방법을 주장했다. 그는 전통과 권위 보다는 이 세상 모두가 가지고 있는 양식(bon sens)을 믿었다. <방법서설>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양식 (bon sens)은 이 세상 사람 모두에게 가장 공평하게 분배되어 있는 것이다.”

양식이란 올바르게 판단하고 참과 거짓을 분별하는 능력, 즉 이성을 뜻한다. 데카르트는 이성은 모든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공평하게 갖고 태어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는 이 이성을 가지고 기존의 진리와 전통이라 믿어왔던 것을 의심해 보고, 더 이상 의심을 할 수 없으면 그것을 진리로 인정하라고 요구했다. 이 요구는 오늘날로 보면 당연하고 소박한 요구이다.

철학을 위한 순교?

그러나 당시에 이러한 요구는 전통의 학문과 세계관을 뒤 엎을 수 있는 위험하고 불온한 생각이었다. 전통적 학문과 진리에 도전하거나 의심을 품는 자는 반역자이며 이단자로 취급 받았다. 데카르트가 <방법서설>을 쓸 당시 파리의 의회는 아리스토텔레스에 반대하는 다른 물리학을 내세우는 자는 사형으로 다스릴 것을 결정할 정도였다.

사실 데카르트도 자신의 위험을 의식하고 있었다. 그가 파리를 떠나, 자유의 바람이 불고 있는 네덜란드로 망명해 거처를 알리지 않고 자주 옮겨 다닌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나 <방법서설>은 그를 독살할 만한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데카르트는 어째서 비교적 학문적으로 자유로운 개신교 국가인 스웨덴에서 독살을 당했다는 의심을 받는 것일까?
<다음 호에 계속>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 \'구스타프 슈바브 그리스로마신화\' 역자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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