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 철학자의 끊이지 않는 독살 의혹

철학여행까페[37]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l승인2008.06.23 1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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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호에 이어>

데카르트는 몽테뉴가 죽은 지 4년 후인 1596년에 태어났다. 1604년에 그는 파리에서 서남쪽으로 약 200km 정도 떨어진 '라 플레슈'에 입학했다. 이 학교는 앙리 4세가 설립해서 예수회에 운영을 맡긴 곳이었다. 이 학교는 당시 유럽에서 엘리트학교로 유명했고, 교육 프로그램은 그때 당시의 기준으로 볼 때 가장 새로운 수준이었다.

선생들은 코페르니쿠스나 갈릴레이의 충격적인 발견들을 가르쳐 학생들을 열광시켰다. 데카르트는 재능이 뛰어난 학생으로 인정되어 금서를 읽은 것도 허용이 되었다. 라 플레슈에서 그는 논리학, 철학, 수학을 배웠다.

1612년 그는 이 학교를 졸업한 후 뽀이테르의 대학에서 법률학 디플롬을 획득했다. 그러나 그는 학교 교육에서 많은 오류를 깨닫고 직접 세계라는 책을 공부하고자 결심한다.

이동희
세계를 공부하고자


“나는 스승들로부터 해방되는 나이가 되자 학교 공부를 완전히 버리고 말았다. 나는 내 자신과 세계라는 커다란 책에서 찾아 낼 수 있는 그런 학문 이외에는 어떠한 다른 학문도 탐구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는 잠시 파리에 머물며 연구한 뒤 1618년 30년 전쟁이 시작될 무렵 자원해서, 그리고 자비를 들여 네덜란드 군대에 들어간다. 그가 군인이 된 것은 전쟁에 참여하려 하는 목적 보다 군대를 따라 여행하며 전쟁의 실상을 관찰하고자 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여행을 통해 책 보다 현실 세계가 훨씬 더 다양하고 상호 모순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게 군대에 복무하던 중 그는 1619년 11월 10일에 도나우에 있는 노이부르크의 겨울진영에서 결정적인 철학적 영감을 경험한다.

그는 세 가지 꿈을 꾸고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그러던 중 그는 모든 학문의 기초가 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을 발전시키는 과제가 자기에게 부여되었다는 결론을 끄집어낸다. 이후 18년 동안 데카르트는 이 세계를 확실하게 인식할 수 있는 새로운 ‘보편적 방법’을 추구한다.

그렇지만 그는 아직은 학문과 철학에 완전히 헌신할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바이에른 공의 군대에 들어갔고, 1620년에 ‘겨울 왕’ 팔츠의 프리드리히에 대항하는 바이센베르크 전투에 참여했다.

이 전투 후에 그는 비로소 군대를 떠났다. 그 후의 세월을 그는 주로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보냈다. 그는 여행 활동을 계속하면서 여러 학자들과의 접촉을 했다. 그가 만난 인사들은 대개 장미십자가단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추측이 된다.

장미십자가단원들은 신비적 비밀이론을 계몽주의적-인문주의적 실천과 결합시켰다. 그들에게 학문적 탐구와 교환은 서로를 손님으로 맞이해 환대하고 서로에게 도움을 주어야 하는 것처럼 그들이 가진 원칙에 속하였다.

1628년에 데카르트는 개신교 국가인 네덜란드로 이주해 그 곳에서 20년 이상 살았다. 네덜란드의 자유로운 정치적 분위기와 종교적 관용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 같다. 그는 네덜란드에서 주소를 자주 옮겨 다니며 고독하게 학문에 몰두했다.

그는 노이부르크에서 얻었던 학문적 영감에 따라 모든 학문의 방법에 의심을 품고, 이 회의에서 견뎌낼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사실을 발견하고자 노력했다. 그는 절대적 확실성을 찾기 위해 ‘의심’이라는 방법을 선택한다. 그는 모든 것을 의심한다. 간단한 수학적 진리인 2+2가 4라는 것도 그는 악마가 나에게 그렇게 믿게 하는 것이라고 의심을 한다. 그렇게 모든 것을 의심할 수 있지만, 그는 의심을 하더라도 의심하는 동안 의심하는 내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만을 부인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해서 그는 방법적으로 모든 것을 의심했지만, 의심하는 나는 더 이상 의심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래서 그는 그러한 발견을 유명한 말로 이렇게 정리하였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이동희
데카르트
의심하고, 의심하라


그는 이러한 발견을 1637년에 ‘방법서설’이라고 불리게 되는 조그만 소책자에 담아 출판한다. 이 책은 라틴어가 아니라 불어로 쓰여 진 에세이 풍의 책이었다. 이 책의 원제목은 ‘학문을 통해 진리를 탐구하는 데 있어서 이성을 올바르게 사용하는 방법에 관한 논문’이었다.

그는 모든 학문의 움직일 수 없는 기초를 발견한 이후 이 절대적 확실성에서 세계에 관한 모든 인식을 수학적 명증성에 기초해 도출하고자 하였다. 그는 1641년에 <성찰록 Meditationes de Prima Philosophia>, 1644년에는 <철학의 원리 Principia philosophiae>를 출간하였다.

데카르트의 사상으로 인해 이제까지 인간의 이성과 합리성에 빛에 비추어 의심스러운 지식들은 더 이상 존속하기 어려운 것이 되었다. 특히 교회의 도그마나 전통적 이론들은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데카르트 사상의 혁신성이 세상의 주목을 끌자 ‘자유로운 나라’였던 네덜란드도 살기 어려운 곳이 되었다. 1641년에 데카르트는 교회 측으로부터 무신론자라는 비난이 제기되어 자신을 변호해야 했고, 친구의 도움으로 재판에서 겨우 풀려났다. 그 무렵 그는 스웨덴의 크리스티나 여왕으로부터 초청을 받아 1649년 가을 스톡홀름으로 가게 된다.

그렇게 스웨덴에 갔던 데카르트는 간 지 5개월도 안 되어 죽고 말았다. ‘폐렴’이라는 공식적 사인에도 불구하고, 그가 독살되었다는 소문은 끊이지 않았다. 데카르트를 초대한 크리스티나 여왕은 개신교의 편에서 가톨릭의 연합세력에 대항하여 전쟁을 이끌었던 구스타프 아돌프 대왕의 딸이었다. 30년간에 걸친 종교전쟁이 끝나고 스웨덴은 개신교 국가로서 남았지만, 정작 여왕은 가톨릭으로 개종할 것을 고려하고 있었다.

종교갈등과 동료의 시기

그 시기에 데카르트가 스웨덴에 있었고, 로마 교황은 여왕을 로마 교황청의 품으로 끌어 들이기 위해 반개혁주의 예수회 학자들을 스웨덴 궁정으로 보냈다. 그들에게 데카르트는 눈에 가시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만이 데카르트를 미워한 것은 아니었다. 크리스티나 여왕이 초대한 수많은 다른 학자들도 여왕의 총애를 받다가 이제 데카르트로 인해 뒷전으로 밀려나는 초라한 신세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데카르트의 출현으로 인해 안락한 삶을 보장해 줄 기회를 모두 읽게 될 위기에 놓인 것이었다.

여왕은 처음 3개월 동안 데카르트를 부르지 않았다. 그러나 1650년에 들어 여왕은 데카르트를 궁전으로 불러 철학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데카르트는 여왕을 가르치기 시작한 지 14일 만에 갑자기 병이 났다. 그렇게 병이 난 지 7일 만인 1650년 2월 11일에 그는 사망했다.

그가 독살되었다는 소문은 스톡홀름 시내에 파다하게 돌았다. 데카르트의 진짜 사인이 무엇이었는지 아직 풀어야 할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현재 그의 두개골도 진짜 그의 것인지도 미스터리이다.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 \'구스타프 슈바브 그리스로마신화\' 역자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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