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습 자본주의’ 시대의 정치

한영인 문학평론가l승인2020.02.10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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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일 점심, 서울 을지로입구역 인근 식당가로 밥을 먹으러 나온 20대 노동자들의 모습을 그려보자. 그들이 SK텔레콤이나 KEB하나은행 사원증을 목에 걸고 있다면, 그들의 60년대생 부모도 대졸 화이트칼라일 가능성이 크다. 거꾸로 사원증이 없는 중소기업에 다니거나 아니면 명동 인근에서 서비스, 판매직에 종사하고 있다면 그들의 부모도 비슷한 일을 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세습’의 시대

최근 화제가 된 『세습 중산층 사회』(조귀동 지음, 생각의 힘 2020)에 나오는 한 대목을 읽으며 조금 당혹스러웠다. SK텔레콤과 하나은행 같은 곳에 다니는 지인들의 얼굴이 금방 떠오른 것과 달리 상점이나 식당에서 일하는 친구의 얼굴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아서였다.

현재 소득에 따른 계층 분류에 따르면 최하 1분위(2016년 통계 기준으로 서울 4년제 대학 졸업자의 1분위 월소득은 91만2천원이다)에도 미치지 못하는 나의 주변에 최상층 화이트칼라들만 득시글한 것은 내가 특별히 중산층 집안의 자제들만 골라 사귀는 사람이어서가 아니다. 굳이 이유를 찾자면 나는 서울에 있는 유명 사립대를 나왔는데 거기엔 초등학교밖에 나오지 못한 부모가 있는 나 같은 학생은 흔치 않아서 아무렇게나 친교를 맺어도 말끔한 집안 자제들과 엮이기 쉬웠을 뿐이다.

그런데 요즘 이십대들에게는 내 사례가 희귀한 케이스로 여겨질지 모르겠다. 이른바 ‘SKY 대학’ 재학생의 절반가량이 소득 9~10분위에 해당하는 고소득층 집안의 자녀라는 통계는 ‘명문대학’의 중산층 쏠림현상이 내가 대학에 입학하던 2000년대 초반보다 훨씬 심해졌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그건 고소득 중산층들이 계급 상승의 사다리인 교육을 모두에게 열린 공평한 기회가 아니라 세습의 수단으로 전용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잠깐, 세습이라니. 그렇다. ‘나 때만 해도’ 세습은 재벌이 등장하는 드라마에서나 접할 수 있는 단어라고 말해볼 만했다. 자꾸 옛날 얘기해서 그렇지만, ‘나 때만 해도’ 평범한 어른들이 자신의 아이들에게 물려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은 정직, 인내, 노력과 같은 삶의 가치가 중심이었지 물질적 삶의 형태에 치우치진 않았다. 물론 의학논문의 제1저자 자격이나 인턴 수료증 같은 것들은 더더욱 아니었다.

‘세습’에는 이념이 없다

세습의 실체는 나날이 또렷해져 가는데 이상하게도 그걸 문제 삼는 건 점점 어려워진다. 오랫동안 사회에 대한 계급적 인식을 강조하며 계급차별 철폐를 외쳐온 ‘진보세력’ 역시 이제는 세습의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게 된 탓이다. 조국 사태는 ‘세습’이 좌우 불문하고 모든 가족구성원이 합심해서 추진하는 ‘가업’이자 쟁취해야 할 인생의 목표가 되었음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사건 아닌가.

조국 사태가 한국사회에 끼친 가장 큰 악영향은 조국 일가를 수호하는 과정에서 세습과 사회적 양극화라는 중요한 사회적 의제를 공론장에서 추방시켜버렸다는 데 있다. 이번 총선을 앞두고 민주당이 야심차게 영입한 한 청년 인재는 조국 일가의 행위를 두고 “모든 학부모들이 관행적으로 해온 일”에 불과하다고 말함으로써 관련한 사태를 바라보는 민주당의 속내를 엉겁결에 드러내고 말았다.

청년 인재 오영환의 말을 반박하기 위해 조국 내외처럼 살아오지 않은 수많은 이웃의 존재를 일일이 거론할 필요는 없다. 문제는 그 평범한 사람들이 실재한다는 사실을 몰라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엄연히 존재하는 그들을 대표하겠다는 집권 여당의 의지가 약화된 데 있기 때문이다.

사회적 양극화를 해소하기 위한 집권 여당의 의지가 희박하다는 사실은 여당이 야심차게 내놓은 총선 공약에서도 잘 드러난다. 지난 20대 총선 당시 민주당은 ‘양극화 해소 777 플랜’(GNI 대비 1인당 가계총처분가능소득 비율을 2020년까지 70%대로 끌어올리고 중산층 비중을 외환위기 이전인 70%대로 회복시키겠다는 내용을 담았다)을 전면에 내세웠다.

하지만 2019년 현재 중위소득 인구는 전체의 52%에 불과한데도 어찌된 일인지 아직까지 격차 해소에 대한 집권 여당의 진지한 정책적 의지는 찾아볼 수 없다. 알다시피 집권 여당의 이번 총선 공약 제1호는 무료 와이파이 확대였다. 우리는 더 많은 와이파이를 무료로 사용하기 위해 집권 여당을 찍어야 할까?

물론 빈곤 문제와 양극화 이슈는 야당이 여당을 공격하기 좋은 소재인 반면 집권 여당이 그걸 들고 나온다는 건 스스로 정부의 사회정책 실패를 자인하는 꼴이기에 상당한 용기와 진정성을 필요로 하는 일이다. 하지만 우리가 그 용기와 진정성을 기대할 수 없다면 도대체 민주당은 왜 집권해야 할까? 차라리 평생 야당을 하면서 보수 여당으로 하여금 양극화 해소에 힘쓰도록 거세게 압박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그러면 적어도 양극화 해소라는 의제는 여전히 정치적 유효성을 지닐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급진적 사회정책이 필요하다

양극화는 오래된 문제지만 오늘날엔 그 격차를 유발하는 핵심적 요인이 세습이라는 점에서 과거와 다르다. ‘새처리즘’(Thatcherism)으로 표상되는 신자유주의 시대의 사회적 격차가 사회보장 폐지와 노동조합 무력화에 따른 노동자계급의 빈곤화에서 비롯했다면 오늘날 문제가 되는 격차는 교육과 1차 노동시장 진입의 여부에 의해 구획되는 상위 20%와 하위 80% 사이의 분할에서 발생한다.

이와 관련해 새로운 불평등을 교정하기 위해서는 사후적 재분배만으로는 부족하며 생애 첫 25년 동안 인적자본을 축적하는 과정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리처드 리브스(Richard Reeves)의 주장을 우리 역시 진지하게 고려할 필요가 있다.

가령 최저임금 상승과 청년기초자산제도 같은 재분배정책은 불평등의 현실을 교정하는 데 도움을 주지만 특정 계층의 사람들이 최저임금을 받는 직종에 ‘세습적으로’ 종사하게 되는 문제까지 포괄하지는 못한다. 한국사회에서 다양하게 발현되는 격차의 양상을 객관화하여 제시하고, 후에 커다란 불평등을 결과하는 요소들에 대해 선제적으로 개입해 들어가는 적극성이 요구되는 이유다.

그 핵심 고리는 아마도 지역격차를 매개로 하는 교육 기회와 문화자본의 불평등일 것이다. 이를 풀어가기 위해서는 ‘교육 뉴딜’에 방불하는 교육정책의 대전환과 적극적인 재정투입이 요구되지만 아직까지 정치권의 논의는 ‘정시 확대’를 두고 입씨름을 벌이는 정도에 머물러 있다.

우리 사회가 앓고 있는 새로운 불평등은 수시모집을 줄이고 정시 비중을 늘리는 정도로 감당 가능한 수준을 넘어서고 있다. 알렉시 드 또끄빌(Alexis de Tocqueville)의 유명한 문장을 패러디해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자라온 과정에서 부여받는 기회의 양과 질이 불평등한데 다른 지점에서 인간들이 영원히 평등하게 남아 있으리라고 생각할 수는 없는 일이다. 결국 그들은 모든 점에서 불평등하게 될 것이다.”

2006년 집권 여당이던 열린우리당 유재건 의장은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가 내세운 감세정책과 작은정부론에 맞서 양극화 해소를 위해 여야가 함께 머리를 맞대고 특위를 구성하자고 제안했다. 그후로 강산이 한번 하고도 절반 가까이 변했고 우리가 직면한 격차의 성격 또한 달라졌다.

정부는 이제라도 새로운 사회격차 해소를 위한 범정부 차원의 컨트롤타워를 만들어야 하는 게 아닐까? ‘세습 자본주의’ 시대의 정치가 마주해야 할 소명을 직시하지 않는다면 여당은 지금 이 순간에도 차갑게 얼어붙고 있는 ‘불만의 겨울’ 한가운데에 속수무책으로 내던져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영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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