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의 새로움은 정치의 새로움을 동반한다. 김호기 교수는 촛불에 의해 정치의 새로운 이분법이 그려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대의정치와 맞서는 생활정치, 제도정치에 맞서는 참여정치, 계급정치에 맞서는 위험정치, 권위정치에 맞서는 인정정치(politics of recognition), 물질정치에 맞서는 (탈물질적) 가치정치가 광장의 촛불이 일으킨 정치의 새로운 불꽃들이다.
그러나 정치의 불꽃 제전은 그저 아름다운 건만 아닌 듯싶다. 김 교수는 현재의 정치국면을 ‘파국적 균형’이란 그람시의 언어로 묘사하고 있다. ‘갈등하는 세력들이 파국적인 방식으로 상호 균형을 짓고 있는 상황’이 곧 촛불정치의 속내라는 것이다. 이는 한국정치의 암담한 현실과 미래를 말해준다. 보수와 진보, 신자유주의와 반신자유주의, 정치사회와 시민사회 등으로 갈라진 세력들 간에 출구 없는 내전이 촛불에 의해 시작되었지만 냉큼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그는 이를 한국 정치사회의 비극이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정치의 진정한 비극은 파국적 균형 속에서 일어나는 사태에 있다. 민주정치의 미덕인 소통, 논쟁, 성찰, 합의 등의 씨앗을 말살시키는 파쇼적 정치세력의 횡포가 파국적 균형 속에서 거침없이 자행되고 있다. 그것은 곧 소통성과 성찰성을 결여한 보수세력의 준동을 말한다. 이들은 온라인, 오프라인 할 것 없이 어느 곳에서나 출몰하여 시위꾼들이 제기하는 모든 것을 ‘친북 좌파빨갱이(좌빨)’로 몰아붙이고 있다. 남북이 대치하고 이념적 학습이나 논의가 자유롭지 않는 우리나라에서 ‘친북 좌빨’이라고 덮어버리면 모든 논의와 시도가 벽에 부딪히거나 증발해 버린다.
가령 먹거리 안전문제를 지적하는 ‘위험정치’, 여성들의 목소리가 소중하게 들리는 ‘성(gender)정치’, 검역주권을 내세우는 ‘인정정치’, 재협상을 요구하는 ‘참여정치’, 미국에 대등하고 싶은 ‘가치정치’ 모두는 촛불이 밝히는 한국정치의 새로운 가능성이지만 보수주의자들에겐 ‘친북 좌빨’의 소행일 뿐이다. 왜 보통시민들이 촛불을 들여야 하고, 정부에 대해 어떤 잘못을 지적하며, 무엇을 해결하길 요구하는지 등에 대해선 보수주의자들은 전혀 이해하려고 들지 않는다.
오히려 친북 좌빨을 소탕하기 위해선 쓸 무기가 너무나 많다는 언어를 서슴치 않고 사용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탈근대적인 정치적 실험을 말하는 것은 그저 사치일 뿐이다. 세계화 시대인 오늘날, 이러한 퇴행적이고 폭력적인 이념적 자폐증은 다른 나라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으며, 이점에선 분명 한국정치의 비극임에 틀림없다.
문제는 보수주의가 군복을 입고 가스통으로 자국민을 협박하는 보수단체 사람들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점이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보수주의란 이념적 흑사병은 새 정부 들어서면서 언론, 법조계, 기업, 종교, 정부, 심지어 시민운동 영역까지 빠르게 침투하고 있다. 반공이데올로기에 뿌리를 둔 한국의 보수주의는 남북 대치상황으로 인해 체제적으로 재생산되고 있다. 근자에 한국사회에 새롭게 고개를 드는 보수주의는 신자유주의와 결부된 채 정책과 시장의 영역까지 장악해가면서 촛불시위를 맞아 특유의 맹목적이고 폭력적인 성향을 거침없이 드러내고 있다.
촛불로 밝혀진 광장엔 탈근대를 향한 정치의 실험이 이루어지고 있고, 이는 한국정치의 새로운 희망을 열어주고 있다. 그러나 퇴행적이고 맹목적인 보수세력의 발호로 그 실험은 한국의 정치상황을 ‘파국적 균형’으로 변질케 하는 빌미가 되고 있다. 희망의 정치가 파국의 정치로 반전되는 이 현상이야 말로 한국정치의 비극을 말한다. 정치비극의 악순환을 우리는 언제 끊을 수 있을까? 우리는 언제 이념의 쇠사슬을 풀고 하늘 높이 훨훨 자유롭게 날을 수 있을까? 이를 위해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조명래 단국대 교수
조명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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