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고 지다-찬란한 슬픔

영랑과 모란의 5월 영토, 혼(魂) 어루만지다 강상헌 논설주간/한국어문연구원장l승인2020.05.13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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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란이 지고 말면 그 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꽃은, 구태여 그 색깔과 모양을 뇌지 않아도 이쁘다. 저 모란, 얼마나 아름다운가. 시인을 따라 울고 싶은 저 마음이 또한 꽃이다. 사람이 꽃이다. 모란 피고서 이내 지고 말 그 5월에 다가서면 시나브로 가슴에 사무친다.

▲ 강진 영랑 생가 마당의 모란꽃을 마음에 담는 여심. (‘전남새뜸’ 이돈삼 사진)

영랑 김윤식(1903~1950) 말고도 꽃을 이렇게 노래한 시인이 있다. 입술 눈동자 꼭 들먹여야 미인인가? 꽃을 꼼꼼히 설명하지 않고도 ‘꽃의 뜻’을 깃발세운 시인, 김춘수(1992~2004)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 ‘꽃’의 일부)

마음에 그린 아름다움, 꽃이 아니라도, 여인이 아니라도 무슨 상관이랴. ‘미친 듯이 놀아보자...’나 ‘내가 제일 잘 나가...’ 같은 춤추는 노래도 멋지지만, 그윽한 사색 부르는 꽃의 존재와 이를 표현하는 이 말글들은 참말 멋지다.

표독스런 새 환경, 코로나 바이러스와의 공존은 필연적으로 저런 은유(隱喩)를 키우리라. 한 발짝 비켜서서 지켜보는, 황소걸음 바보 삶이 섭리를 깨치는 열쇠가 되지 않을는지? 우리 머릿속 이제까지의 ‘중심’이 사상누각으로 스러지니 내내 어지럽다 맴맴 타령만 할 터인가.

우리는, 시인이었던 고운 시절의 심상(心象)을 잊어서는 아니 된다. 쌍무지개와 네잎 클로버에 가슴 뛰던 그가 더 당신다운 당신이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새 기준’에 맞춤한 당신들의 약속의 땅 남도를 비로소 열지니...

남도에는 영랑이 있다. 강진의 그 집에 모란이 핀다. 눈 감으면 선한, 모란의 영토에선 독한 마음 내려놓자. 영랑 따라 시인이 된다. 그리운 사람을, 그 이름을 밤새워 부르자. 마음의 바다, 구원의 노래다. 장보고 삼별초 울돌목 금남로 세월호 코로나까지도, 혼(魂) 어루만진다.

까까머리 학창 시절, ‘영랑 용아 시집’이란 책을 받았다. 용아 박용철 시인(1904~1938)의 작품도 영랑의 ‘모란’과 함께 담긴 책이었다. 조회 때 얼마간의 책값을 냈다. 모양 비록 초라했으나, 아마 표지에는 화사한 모란(꽃)이 얹혀 있었던 것 같다.

나중에 들은 얘기, 학교에 기자가 왔고 ‘책을 강매(强賣)한 것’이 신문에 나서 난리가 났다. 학교가, 선생님들이 책을 억지로 팔았다는 기사였다고 기억한다. 선생님이던 아버지는 어느 날 술에 만취해 귀가가 늦었다. 필자가 언론의 길을 걷게 된 인연 중의 하나다.

‘시(詩)’를 설레는 마음으로, 정색하고 대하기는 그때가 처음이었다. ‘모란’이 거기 있었다. ‘오메, 단풍 들겄네’도 있었으리라. ‘시적(詩的) 변용에 관하여’라는 특별한 평론의 필자인 용아 시인의 ‘떠나가는 배’도 그 때 처음 만났겠다.

‘직녀에게’의 문병란 시인(1935~2015)은 이렇게 우리에게 시를 가르쳤다. 시가 없던 궁핍의 시대, 시를 어린 사람들에게 쥐어주고자 어렵게 ‘그 일’을 꾸민 가난한 시인들 중 한 사람이었다. 정의(正義)와 정의(情意)를 그는 노래했다. 나의 첫 시는, 무지개처럼 그렇게 왔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 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형태 그리지 않았으되 더 선명한 詩 속 모란의 화용(花容)을 끝내 내치지 못한다. 5월이 걸어오는 소리는 모란이 꽃으로 저를 여는 몸짓이다. 영랑이 꽃이듯 당신이 꽃이다. ‘찬란한 슬픔’은 젤 영롱한 꽃이다. 처연하게 아름다운, 모란의 제 이름을 불러주자. 기쁜 슬픔 되도록.

토/막/새/김

모란이 피기까지는?

모란은 화중왕(花中王) 부귀화(富貴花)라고 한다. 꽃의 왕 뜻 화중왕은 설총의 ‘화왕계(花王戒)’, 풍요롭고 귀하다는 부귀화는 강희안의 ‘양화소록(養花小錄)’에서 비롯한 이름이다.

신부 예복인 원삼이나 활옷에는 모란꽃 자수 무늬가 오른다. 미인을 일러 모란꽃 같다고 한다. 글방 선비들 책거리 그림에도 부귀공명을 기원하는 모란이 제격이었다.

이름은, 허나 남성적이다. 뿌리 위로 돋는 새싹이 수컷의 모양새여서 수컷 모(牡)자 붙었다. 붉은 꽃 색깔 기린 붉을 단(丹)자 합쳤다. 유력한 설(說)이다. ‘모단’이라 읽어야 하는 말이다.

‘모단이 지고 말면 그 뿐...’하면, 어떤가? 솔직히 맛이 안 산다. 선조들이 알고 멋 부려 ‘모란’으로 읽었을까? 모란만큼 모란 같은 이름이 또 있을까? ‘모단(牡丹)’이 [모란]이 된 이유는 아직 안 밝혀졌다.

허나 다행이다. 국어당국도 한글맞춤법 ‘해설’에서 그 ‘멋’을 지지했다. 시중에서 오래 써 온 말인 ‘모란’을 표준어로 인정한 것이다. 그렇지만 ‘모단’이라 한다고 틀렸다 할 수는 없겠다.

어떤 식자(識者)나 자료는 ‘목장(牧場)’의 牧자를 써 牧丹(목단)이 그 ‘모란’이라고 한다. 이런 얘기가 있다는 것은, 설득력은 떨어지나, 언급해둔다. 그러다보니 어떤 이들은 牡丹을 ‘목단’이라 읽는다. 목단(의 발음)이 모란이 됐다고 설명한다. 牧(목)과 牡(모) 구별이 어려웠나보다.

너도 모르고, 나도 모르니 그냥 편히 지나가자고? 문학도 그렇지만, 어학은 특히 정교해야 한다. 정확하고도 적확(的確)해야 생산성이 생긴다. 한국어가 불임(不姙)의 흐리멍텅 말글이 되도록 그냥 지나갈 수는 없다.

강상헌 논설주간/한국어문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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